12-사위지기자사(士爲知己者死) (3)
12-
“위하여!”
호정문에 잔치가 벌어졌다.
안뜰 가장 넓은 곳에 수많은 탁자들이 놓였고 술과 음식이 날라져 왔다.
호정문주 호연암이 술잔을 높이 들었다.
“이번 표행의 일등 공신, 주예화 표두를 위하여!”
“위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술잔을 치켜든다.
그 중심에는 이번 표행을 무사히 성공시킨 표사들이 뿌듯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이번에는 정말 죽는 줄 알았지.”
“설마 흑도방 놈들이 그렇게 작정하고 습격을 해올 줄이야.”
“그래도 마감 기한을 맞춰서 다행이었어. 까딱했으면 위약금을 물 뻔했다고.”
“이렇게 살아서 호정문의 장원을 다시 보게 되다니. 눈물이 날라 그러네 막.”
“결국에는 다시 돌아왔구나. 휴-”
죽은 자들에 대한 미안함으로 복잡한 심경이었지만, 그보다는 살아남았다는 것에 대한 기쁨이 더 컸다.
주예화 표두가 술잔을 들어올렸다.
“죽어간 동료들의 넋은 평생 가슴에 품고 갈 일이지만, 오늘 밤만은 다 잊자! 다 잊고 산 사람의 기쁨을 누리자!”
“위하여!”
표사들도 술잔을 들어 올렸다.
군데군데 비어있는 자리.
원래대로였다면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어야 할 얼굴 얼굴들.
하지만 칼밥을 먹는 사람들이라면 다 익숙해져 있다.
어제를 함께 보냈던 얼굴과 오늘 헤어져야 하는 삶, 그리고 오늘을 함께 보낸 얼굴들과 내일 헤어질지도 모르는 삶.
이런 삶에 대한 새삼스러운 회한 때문일까, 잔치는 평소보다도 훨씬 더 떠들썩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때. 직접 술과 음식을 나르던 호예양이 무언가를 발견했다.
무표정한 얼굴, 남루한 차림새의 소년.
추이가 잔칫상의 가장 말석에 앉아있었다.
추이의 앞에는 술과 음식이 아무것도 없었는데 그 옆에 있는 다른 마굿간지기 소년들의 그릇에는 먹을 것들이 가득했다.
“······저것들이 진짜!”
호예양은 화난 표정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마굿간지기 소년들을 향해 소리쳤다.
“얘들아! 음식을 너희들끼리만 먹으면 어떡해!”
그러자 우동원을 비롯한 마굿간지기들이 화들짝 놀랐다.
이윽고, 우동원이 더듬거리며 변명했다.
“나, 나눠 먹으려고 했어요. 아가씨.”
“또 한번 이렇게 먹을 걸로 차별하는 모습 보이면 진짜 화낸다?”
“그럼요! 이제 막 나누려던 참이었어요! 진짜 참말이에요!”
호예양이 눈을 부릅뜨자 우동원은 황급히 자기 그릇에서 고기와 떡을 덜어서 추이의 그릇에 부어주었다.
다른 마굿간지기 소년들도 아 뜨셔라 일어나서 자기 그릇에 담긴 음식들을 덜어준다.
“······.”
추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이 없었다.
호예양의 그런 추이의 등을 한번 탁 쳤다.
“누가 괴롭히면 바로 나에게 오라니까.”
“······.”
추이는 여전히 별다른 반응이 없다.
그러자 호예양은 그릇에서 떡 하나를 집어들어 강제로 추이의 입에 넣어주었다.
우물······
추이가 떡을 씹는 것을 본 호예양이 밝게 웃었다.
“많이 좀 먹어. 비쩍 말라가지고는. 애들이 밥 굶겨?”
호예양은 추이에게서 시선을 떼고 눈을 부릅뜬다.
우동원을 비롯한 다른 마굿간지기들이 재빨리 그릇에 얼굴을 처박고 눈치를 본다.
“너희들, 내가 앞으로 지켜볼 것이다. 알겠어? 추이 괴롭히지 마.”
호예양은 마굿간지기 소년들에게 단단히 으름장을 놓았다.
그때.
“희야- 이리로 오너라.”
저 멀리서 호연암이 호예양의 아명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주예화 표두와 나눌 말이 있는 것 같았다.
호예양은 다시 한번 추이를 보고 말했다.
“음식이 모자라면 나한테 와라. 알겠지?”
“······.”
추이는 이번에도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윽고, 호예양은 호연암과 주예화가 있는 곳으로 갔다.
그러자 우동원의 표정이 곧바로 변했다.
“이 새끼, 진짜 아가씨를 어떻게 구슬렸길래 저러시지?”
“맞아. 하- 고놈 참 맹랑하네. 나이도 어린 새끼가.”
다른 마굿간지기 소년들도 인상을 쓰며 추이를 돌아보았다.
우동원이 젓가락으로 고기조각 하나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추이의 얼굴로 던졌다.
“어따- 주워 먹어라.”
“큭큭큭- 니 주제에 고기 맛이라도 볼라면 먹어야지. 별 수 있나?”
“왜? 선배들이 띠껍냐? 꼬우면 일찍 들어오던가? 어?”
“표정 관리 안 해? 너 이 마굿간 생활 제대로 꼬이고 싶어?”
마굿간지기 소년들이 추이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틱- 탁- 철썩!
고기조각이나 떡 쪼가리, 술 방울들이 추이의 얼굴로 날아들기 시작했다.
* * *
······바로 그 시각.
주예화 표두는 호연암과 술잔을 나누고 있었다.
호연암과 사지원은 주예화 표두를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칭찬했다.
“주 표두 덕분에 이번 표행이 무사히 끝났어. 대금도 잘 들어왔고, 덕분에 숨통이 좀 트이게 되었군.”
“이번 표행에서 돌아오지 못한 표사들의 가족들은 걱정 말아요. 제 명예를 걸고 그들을 마지막까지 잘 보살필게요.”
“제 일을 했을 뿐입니다. 동료들의 가족들까지 생각해 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주예화 표두는 호정문의 주인 부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때, 호예양이 자리에 앉았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한 잔 받으시지요, 주 표두님.”
“감사합니다. 아가씨.”
주예화 표두는 술잔을 들어 호예양이 따라주는 술을 받았다.
호예양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참. 보내주신 서찰에 적힌 객 말씀인데요.”
“안 그래도 여쭤보려 했습니다 아가씨. 상석에 그분의 모습이 안 보이던데 어찌 된 일인지요?”
“으음. 호정문에 딱히 무림인의 방문은 없었습니다.”
“이런. 그분께서 호정문에 방문하지 않으셨나 보군요.”
주예화 표두의 표정이 아쉬움으로 물들었다.
“창을 쓰는 한 젊은 협객이었습니다. 그분 덕분에 저희는 녹림도, 아니 흑도방의 습격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지요. 꼭 찾아뵙고 구명지은에 대한 인사를 드리고 싶었는데······ 호정문으로 오지 않으신 듯하니 아쉽게 됐습니다.”
“그 협객 분이 그렇게 강했습니까?”
“엄청났습니다. 창 한 자루만으로 흑도방원들을 수도 없이 쓰러트리셨지요. 젊은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실로 놀라운 신위였습니다. 오죽했으면 제가 금패까지 내어드렸겠습니까.”
“만약 표두님의 금패를 소지하신 분이 오셨다면 특급 귀빈으로 모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어요.”
“정말 아쉬운 노릇입니다. 그런 고수를 식객으로 품을 수만 있다면 문의 위세가 크게 높아질 텐데요.”
“그러게요. 말씀만 들어도 정말 아쉬워요.”
하지만 미련을 품는다고 해서 지나간 인연이 다시 돌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나 자유롭게 떠도는 것을 좋아하는 기인들은 타의로는 절대 붙잡아 놓을 수 없다.
주예화 표두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애써 아쉬움을 털어버렸다.
“호정문에 방문하지 않으셨다면 어쩔 수 없지요. 이 술 한잔에 다 잊어버려야겠습니다.”
“좋습니다.”
호예양이 생긋 웃는다.
주예화 표두는 그 아름다움에 순간 술잔을 들고 있다는 것도 잊어버릴 뻔했다.
‘아가씨의 미소를 다시 볼 수 있어서 다행이야.’
주예화 표두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며 술잔을 들어올렸다.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호정문은 너무나도 익숙하고 또 반가운 장소였다.
믿고 신뢰하고 사랑하는 사람들.
장원의 담벼락과 건물, 정원, 나무와 돌, 자갈들 하나하나까지 모두 정겹고 소중하게 느껴진다.
주예화 표두는 술잔을 들어올렸다.
호연암 역시도 다른 표사들을 독려하며 건배를 준비했다.
“건배사 한번 하시게, 주 표두! 이 자리의 영웅이 한 말씀 하셔야지!”
“크흠- 흠- 그럼 부족하지만 한 마디 하겠습니다!”
주예화 표두는 술잔을 든 채 호정문의 모든 이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께 합당한 기쁨과 영광, 대가가 돌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녀는 상석에 앉아있는 귀빈들부터 시작해 중간 부분을 지나 말석에 있는 하인들까지를 모두 둘러보았다.
비단옷을 입고 상석에 앉아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귀빈들.
즐거운 표정으로 점잖게 먹고 마시는 무인들.
그리고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또 언제 먹어보겠냐는 듯, 정신없이 먹고 마시는 말석의 하인들.
“자, 그럼. 위하여!”
“위하여!”
모두가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주예화 표두 역시도 술잔을 기울여 입술을 적시려 했다.
바로 그 순간. 그녀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그것은 잔칫상 가장 말석에 위치해 있는 마굿간지기들의 탁자였다.
“야, 이 새끼 이거 입 꾹 다문거 봐라? 너 진짜 맞을래?”
“밥이고 뭐고 오늘 푸닥거리 한판 해?”
“안 되겠다. 야, 넌 이거 먹지 마.”
“에이- 아무것도 안 주면 또 아가씨께 혼나. 저 새끼가 다 일러바칠 거 아냐.”
“그럼 여기 이 찌꺼기들이나 먹으렴. 니 주제에 딱이다, 인마.”
마굿간지기 소년들이 집단으로 괴롭히고 있는 한 소년.
다른 마굿간지기들에 비해 유독 남루한 옷을 걸친 그는 얼굴이 음식물 찌꺼기로 범벅이 되어 있는 채였다.
스윽-
소년이 자신의 얼굴에 묻은 찌꺼기들을 소매로 닦아내자.
‘······!’
저 멀리, 상석에 앉아있던 주예화 표두의 눈이 화등잔만해졌다.
시원하게 목젖 고개를 넘어가려던 술이 갑자기 톱밥 뭉텅이로 변한 듯하다.
“케헥!?”
주예화 표두는 입안에 머금고 있던 술을 모조리 뱉어버렸다.
촤악-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술이 호연암의 얼굴에 확 끼얹어졌다.
“으왓!? 이게 무슨! 주 표두! 왜 그러나!?”
깜짝 놀란 호연암이 얼굴을 닦고는 고개를 든다.
하지만 주예화 표두는 호연암의 반응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저 눈을 찢어질 듯 크게 뜬 채로 덜덜 떨고 있을 뿐이었다.
추이가 앉아있는 잔칫상의 말석을 바라보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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