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사위지기자사(士爲知己者死) (2)
11-
冬至ᄉᄃᆞᆯ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내여
春風 니불 아레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론 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
깊어가는 밤. 위태롭게 흔들리는 촛불.
여기 소녀와 여인의 기로에 서 있는 한 사람이 있다.
밤하늘의 한 허리와 같은 머리카락과 별빛 같은 눈빛.
호예양(虎豫讓).
그녀는 화선지에서 붓을 떼고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혼담이라······”
호예양은 지금 조가장에서 들어온 혼담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호정문의 자금 사정은 너무나도 열악했다.
몇몇 표행에서 큰 사고를 겪고, 표사들과 쟁자수들을 잃었다.
표물에 대한 위약금을 물어주고 사상자들에게 위로금을 지급하고 나니 매년 적자를 면할 수 없었다.
혼탁한 세상 속에서 혼자만 제정신을 지키기는 어려운 법이다.
그저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고, 도리를 도리처럼 여기고자 했을 뿐이지만······ 가세는 점점 기울어만 갔다.
그러던 상황에서 조가장이 제시한 혼담.
그리고 막대한 혼인 지참금.
빈자들에게는 매매혼(賣買婚)이 흔한 일이라지만 부자들 역시도 똑같다.
정략혼(政略婚).
단지 부르는 명칭만 다를 뿐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르겠구나.”
호예양은 또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가문의 재기와 부흥을 위하여, 그녀는 자신의 한 몸 바칠 각오를 다졌다.
바로 그때.
덜컥-
그녀의 방문이 급하게 열렸다.
호연암. 그녀의 아비가 당황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그 옆에는 어미인 사지원도 함께 서 있었다.
“희(姬)야.”
“아버님?”
호예양은 놀라서 붓을 놓았다.
부모님이 연락도 없이 직접 방문을 열고 찾아온 것은 처음이다.
그것도 이 야심한 시각에 말이다.
‘하지만 잘 됐어. 이참에 내 결심을 말씀드려야지.’
호예양은 애써 담담함을 고수했다.
그리고 이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버님, 저번에 일축하셨던 조가장과의 혼담에 대하여······”
하지만 그녀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호연암이 먼저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들었느냐? 조가장이 멸문되었단다.”
“······예?”
* * *
고래현과 내송현 곳곳에 방(榜)이 나붙었다.
내용은 간단했다.
一. 정도(定道)가 흑도(黑道)와 손잡고 부당 이득을 취했다.
二. 그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들을 대신해 벌을 내린다.
조가장이 흑도방에게 은밀하게 의뢰를 맡겨 수많은 부당 이득을 취했다.
지금껏 흑도방이 원흉인 줄로만 알았던 사람들은 조가장의 겉과 속이 달랐던 행태에 분노했다.
그러나 그들은 조가장에게 복수를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조가장은 지난밤 새에 모두 불에 타버렸기 때문이다.
불타버린 장원의 중앙에는 조양자와 구양포의 시체가 놓여 있었다.
그들이 오래 전부터 결탁해 왔음을 뜻하는 장부들이 관아의 담장을 넘어 날아들었다.
흑도방도, 조가장도, 무공을 익힌 이들은 모두 죽었다.
살아남은 이들은 오직 무공을 모르는 고용인들 뿐이었다.
현의 사람들은 둘 이상 모이면 무조건 간밤의 혈사(血事)에 대해 떠들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거여?”
“흑도방과 조가장이 뭔 은거 고수의 심기를 거슬렀다던데?”
“단신으로 쳐들어와서 모조리 죽였다더군.”
“그것들이 확실히 요즘 도를 넘긴 했지. 세상에 호정문까지 건드릴 줄이야.”
“암, 호정문이 어떤 문파인데? 세상 다 썩었어도 거기만큼은 깨끗하다고. 허 참, 건드릴 곳을 건드려야지.”
“그나저나, 누가 이런 짓을 했을까? 흑도방의 구양포는 몰라도 조가장의 조양자는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닌데.”
“무림맹(武林盟)에서 단죄를 위해 고수를 파견한 게 틀림없어.”
“멍청아, 무림맹이 이렇게 잔혹하게 굴겠냐? 사도련(似道聯)에서 흑도방을 꼬리자르기 한 것이겠지!”
원래도 시끄러웠던 저잣거리가 더더욱 시끄러워졌다.
관심은 이제 흑도방과 조가장을 멸문시킨 존재를 향해 옮겨가고 있었다.
“조가장에서 살아남은 시비 하나가 들었다더군. 협객이 조양자를 죽이기 전에 그의 이름을 세 번 불렀다고.”
“무슨 저승차사도 아니고, 이름을 왜 불러?”
“그런데 그렇게 이름을 세 번 부르니까 조양자가 겁에 질려서 막 울었다던데?”
“거 무섭구만······ 이름을 세 번 부르고 황천으로 데려간다는 거 아냐.”
원래 호사가들은 부풀리는 것을 좋아하는 법이다.
소문 속의 고수는 조양자의 이름을 세 번 부르고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를 황천으로 보내버린 절대고수가 되어 있었다.
삼칭황천(三稱黃泉).
그것이 정체불명의 고수를 지칭하는 별호였다.
* * *
말 한 필이 산책로를 걸어간다.
호예양은 말고삐를 잡은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흑도방과 조가장의 멸문이라······’
그녀는 마음속이 복잡했다.
다른 사람의 불행이 자신의 기쁨이 된다는 것은 죄책감을 느끼게 만든다.
그것이 집단과 집단이 되면 죄책감은 옅어진다.
호예양은 내쉬려던 한숨을 그대로 삼켰다.
‘그래. 좋게 생각하자.’
흑도방이 불에 타면서 호정문의 채권들도 모두 사라졌다.
이제와서는 갚고 싶어도 갚을 사람이 없어서 갚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리고 흑도방을 통해서 호질표국을 습격하던 조가장도 사라져 버렸다.
이제 호정문은 곧 자금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나저나, 누굴까? 그 고수가.’
호예양은 곰곰이 생각했다.
무림에서는 종종 비슷한 류의 이야기가 들려온다.
위세를 자랑하던 한 거대 집단이 혈혈단신의 개인을 우습게 보고 시비를 걸었다가 잡초 한 포기 빠짐없이 몰살당하는 류의 괴담들.
이야기 속에서는 무성하게 등장하는 소재이지만 현실에서는 그다지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현실에서 벌어졌다.
“삼칭황천이라.”
소문은 부풀려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정말로 흑도방과 조가장을 하루 건너 멸망시킨 이가 개인 한 사람이라면, 그는 사람일까? 귀신일까?
바스락-
호예양은 말 위에 탄 채로 편지 하나를 꺼내들었다.
몇 주야 전에 전서구를 통해 도달했던 주예화 표두의 편지였다.
편지의 내용은 꽤나 길었다.
이번 표행에서 어떤 일이 있었고 앞으로의 계획이 어떤지에 대해 알리는 서찰.
하지만 호예양이 주목한 것은 그 서찰의 말미였다.
-······하여, 녹림도들의 습격에서 무사히 표물을 지켜냈고 이대로 표행을 재개할 계획입니다.
한 협객의 도움 덕분에 많은 표사들의 목숨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 협객에게 제 금패를 주어 호정문으로 가게끔 했으니, 부디 그분을 잘 예우하여 주셨으면 합니다.
주예화 표두는 표행 도중 녹림도의 습격을 받았고, 한 협객의 도움으로 그들을 물리쳤으며, 그 덕분에 표행을 성공적으로 재개할 수 있었다고 서찰에 적어놓았다.
‘하지만 주예화 표두의 금패를 소지한 객은 없었는데.’
호연암은 이 편지를 받고 나서 호정문에 방문했던 식객들을 모두 수소문했지만 그런 사람은 없었다.
문득, 호예양은 생각했다.
‘어쩌면 흑도방과 조가장을 멸문시킨 삼칭황천이라는 고수가 주예화 표두가 말했던 협객이 아닐까?’
그녀는 약간 시무룩한 표정이 되었다.
‘우리 무관으로는 안 오셨나 보구나.’
무섭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하다.
대체 어떤 존재이기에 호정문에 이렇게 이로운 행보만을 걷고 있을까?
물론 우연이기는 하겠지만, 정말로 딱 우연이라고만 치부하기에는 참 기묘하다 싶었다.
그때.
“······아!”
호예양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편지를 읽으며 생각에 집중하느라 말이 가는 방향에 신경을 못 썼다.
어디 이상한 곳으로 와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 호예양은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순간.
“······아.”
아까와는 다른 탄성이 그녀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말은 유계호(裕渓湖) 근처의 신작로를 거닐고 있었다.
호숫가에서 흔들리는 버들잎들이 사락사락 몸을 흔든다.
금빛으로 빛나는 물결이 반짝일 때마다 오리들이 수면 아래로 자맥질을 했다.
“······.”
호예양은 고개를 돌렸다.
말 앞에서 고삐를 쥐고 묵묵히 걷는 소년.
추이의 뒷모습이 호예양의 크고 맑은 눈에 가득 담긴다.
호예양은 추이의 어깨를 탁 치며 말했다.
“내가 호수 좋아하는 줄 어떻게 알고 여기로 왔니. 말도 안 했는데.”
“말 했다.”
“응?”
호예양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자기가 추이에게 호수를 좋아한다고 말했던 적이 있었나 싶어 잠시 생각에 빠졌다.
한편, 추이는 옛날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기분이 나쁘거나 생각할 게 많은 날에는 늘 호숫가에 앉아 있곤 했지.’
전생에서 만났던 호예양은 호숫가를 참 좋아했다.
상관에게 무리한 임무를 받거나, 그래서 동료들을 많이 잃은 날이면 늘 호숫가에 서서 버들잎을 바라보곤 했다.
그는 호숫가의 비린 물냄새를 싫어하지 않았고 진흙뻘 위의 억새들과 그 위를 날아가는 철새 무리를 마음에 들어 했다.
그때, 호예양이 말했다.
“그런데 너, 말을 정말 잘 다루는구나?”
“······.”
추이가 말이 없자 호예양은 신기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이 말은 사실 성질이 좀 고약하다. 그래서 다른 마굿간지기 아이들은 좀 꺼리거든. 근데 얘가 네 말은 참 잘 듣는구나”
호예양은 자신이 탄 말을 내려다보았다.
이 녀석은 아까부터 추이의 눈치를 보며 고분고분 굴고 있었다.
이윽고, 추이는 말고삐를 잡고 호숫가 쪽으로 다가갔다.
햇빛이 잘 드는 곳에서 호예양은 기지개를 켰다.
‘뭐랄까, 되게 편하다 오늘.’
그녀는 생각했다.
보통 다른 아이들이 말을 몰게 되면 햇빛을 피해서 몬다.
대부분의 여인들은 피부에 햇빛을 직접 쬐고 싶지 않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예양은 예전부터 햇빛을 쬐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추이는 마치 그걸 알고 있기라도 하듯, 말을 양지바른 쪽으로만 몰고 가고 있었다.
그때.
위잉-
날벌레 하나가 호예양의 코끝을 스쳤다.
“윽, 벌레. 물가는 다 좋은데 이거 하나가 문제로구나.”
호숫가에는 본디 날벌레들이 무척 많다.
날이 쌀쌀해졌는데도 그렇다.
호예양은 호수 구경을 좋아했지만 벌레가 유일한 귀찮음이었다.
그때.
치이이익-
추이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말린 쑥이었다.
추이가 쑥불을 피우자 날벌레들이 모두 달아났다.
호예양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것도 가지고 다니는 건가?”
“······.”
추이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는다.
하지만 호예양은 왜인지 화가 나지 않았다.
그녀는 추이에게 물어보았다.
“너는 신입 같은데, 되게 감이 좋구나. 원래 그렇게 일을 잘하니?”
그러자 비로소, 추이가 대답했다.
“사위지기자사(士爲知己者死).”
그는 호예양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나를 가족으로 대해주는 이를 나 역시 가족으로 대할 뿐이다.”
추이의 말에 호예양은 잠시 눈을 크게 뜨고 말이 없다.
이윽고, 그녀의 입이 열렸다.
“뭔가 사연이 있는 것 같아서 길게 말하기가 좀 그렇지만······”
호예양의 크고 맑은 눈에 추이의 얼굴이 담겼다.
“네가 호정문에 있는 동안은, 우리가 네 가족이다.”
그 말을 들은 추이는 일순간 과거로 돌아간 듯한 착각이 들었다.
‘내가 너를 왜 살린 줄 아느냐?’
‘모르겠다.’
‘그것은 네가 호질표국의 쟁자수였기 때문이다.’
‘······?’
‘나는 멸문당한 호정문의 마지막 후예다.’
‘······!’
‘너는 말했었지. 잠시지만 호질표국에서 쟁자수를 했던 적이 있다고. 그곳의 문주와 그의 아내는 좋은 사람이었다고.’
‘······.’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너를 가족으로 생각한 것이.’
쏟아지는 빗속에서, 죽어가는 호예양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오른다.
형제의 마지막 모습과 목소리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럴수록 지금의 눈앞에 보이는 형제의 모습은 추이의 마음을 더더욱 아프게 만들고 있었다.
화상으로 인해 얼굴부터 가슴까지, 추하게 일그러졌던 과거의 호예양.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한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지금의 호예양.
숯을 삼켜 쉑쉑거리는 쇳소리만 내뱉을 수 있었던 과거의 호예양.
또르르 굴러가는 옥구슬 같은 목소리를 가진 지금의 호예양.
“······.”
추이는 입을 다물었다.
분노와 복수심, 슬픔과 그리움.
이러한 감정을 계속해서 쭉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인 이상 분노는 사그라들고, 복수심은 옅어지고, 슬픔과 그리움은 망각된다.
제아무리 철혈의 복수자였던 호예양이라 할지라도 마음이 꺾이고 의지가 약해지는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럴 때 그녀는 자신의 처지와 외모를 돌아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성별과 외모를 버린 복수귀가 되었던, 변소간 똥물에 몸을 담갔던, 구더기 끓는 시체 더미를 비집고 들어가 숨어있었던, 그리고 추격자들에게 쫓겨 머나먼 변방의 전장까지 도망쳐야만 했던, 더럽고 못 배운 말단 잡배들과 뒤섞여 한 막사를 쓰던······ 그녀는 어떤 마음이었던 것일까?
추이는 입을 열어 무엇인가를 말하려 했다.
호예양은 귀를 기울여 그것을 듣고자 했다.
······하지만.
둘 사이를 갈라놓는 외침이 있었다.
“아가씨!”
저 뒤에서 우동원이 허겁지겁 뛰어오고 있는 것이 보인다.
“표사님들이 돌아왔습니다요!”
그 말을 듣는 순간, 호예양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표행에 나섰던 주예화 표두를 비롯한 호질표국의 표사들이 무사히 돌아왔다.
호정문의 자금난을 일거에 해소시켜 줄, 장장 백팔 일간의 여정이었다.
호예양은 재빨리 고삐를 잡았다.
그리고 추이를 돌아보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먼저 가볼게! 오늘 저녁에는 큰 잔치가 벌어질 거니까 배 비워 놔! 맛있는 거 많이 먹을 수 있을 거야!”
말을 마친 호예양은 양해를 구하고는 재빨리 말을 몰았다.
호정문의 장원을 향해 순식간에 달려나가는 호예양을 보며, 추이 역시도 발걸음을 돌렸다.
저 멀리 호정문의 담벼락 너머에서 무사 귀환한 표사들을 대대적으로 환영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울려퍼지고 있었다.
바로 그때.
“야.”
우동원이 추이의 뒷목을 턱 붙잡았다.
그리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넌 뭔데 지멋대로 아가씨 수행을 따라나갔냐? 그건 원래 고참들이 하는 거 몰라?”
우동원은 추이에게 으름장을 놓으며 등을 떠밀었다.
“안 되겠다. 너는 이따 잔치 때 보자. 찌꺼기 국물도 못 먹게 될 줄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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