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사위지기자사(士爲知己者死) (1)
10-사위지기자사(士爲知己者死) (1)
스스스스스스······
댓잎들이 바람에 스친다.
피를 머금은 듯 붉은 혈죽(血竹)들 위로 까마귀들이 우수수 날아올랐다.
“어디서 왔느냐?”
느른한 어조로 이야기하는 노인.
하지만 그는 일반적인 늙은이가 아니었다.
꼬장꼬장하고 뻣뻣한 기세.
그리고 그 밑바탕에 깔려있는 짙은 혈향.
마치 피를 먹고 붉게 자라난 대나무처럼, 조양자(趙襄子)의 기세는 이질적이다.
읍습함과 대쪽같음이 한데 공존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며, 추이는 앞으로 일 보를 내딛었다.
그것을 보며 조양자는 신기하다는 듯 수염을 쓸었다.
“보아하니 정도를 걷는 놈은 아니고. 나락곡(奈落谷)? 패도회(佩刀會)? 아니면 흑사(黑砂)의 건너편인가?”
그 질문에 추이는 짧게 대답했다.
“호정문.”
“?”
조양자의 눈에서 처음으로 이채가 발했다.
“호정문주가 키운 아이더냐? 믿을 수가 없는데. 개가 범을 키울 수는 없는 법이거늘.”
“······.”
“호정문과 무슨 관계이지?”
이어지는 조양자의 질문에 추이는 한번 더 짧게 대답했다.
“쟁자수.”
“??”
“혹은 마굿간지기.”
“???”
추이가 장난을 친다고 생각했는지, 조양자는 고개를 저었다.
“하긴. 어디 소속인지가 무에 중요하겠느냐. 칼밥을 먹으러 온 객이니 칼밥을 먹여 보내는 것이 인지상정일 뿐.”
조양자가 기세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추이 역시도 손에 든 창을 앞으로 뻗었다.
스릉-
이윽고, 조양자의 허리춤에서 긴 장검이 뽑혀 나왔다.
푸르스름한 검기가 검신을 타고 흐르는가 싶더니 이내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추이는 생각했다.
‘살아있는 조양자를 보게 되니 감회가 새롭군.’
회귀하기 전, 전생의 조양자는 천수를 누리고 늙어 죽었다.
그가 늙어 죽었기에 조가장의 추격자들은 호예양을 더 쫓지 않고 발걸음을 돌렸고, 그 때문에 호예양은 목숨을 건져 군으로 도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호예양은 그 이후로 평생을 괴로워했다.
자기 손으로 직접 조양자를 죽이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 추이는 살아있는 조양자의 앞에 서 있다.
지난 생의 호예양이 죽기 직전까지도 염원하던 자리였다.
꽈악-
추이가 쥔 묵창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이윽고.
까-앙!
조양자의 칼이 추이의 창과 부딪쳤다.
냉랭한 병기 둘이 맞닿자 그 자리에서부터 서서히 열꽃이 피어오른다.
병장기를 매개로 전달된 양측의 내력들이 사납게 뒤엉키며 쇠를 뜨겁게 달구기 시작했다.
“······!”
먼저 물러난 쪽은 조양자였다.
그는 날끝이 시뻘겋게 변한 자신의 장검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사술이냐 이놈?”
“왜?”
“어찌하여 네놈의 내력에서 우리 조가장의 것이 느껴지는 게야?”
조양자의 의문대로였다.
현재 추이는 조가장의 독문심법으로 모은 내공을 사용하고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이 내공은 추이의 것이 아니라 창귀가 되어 추이에게 굴복한 조가장의 무인들의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츠츠츠츠츠츠······
추이의 전신에서 검붉은 마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흑도방과 조가장의 무인들이 창귀가 되어 추이에게 자신의 내공을 전달해 주고 있었다.
굴각(屈閣)의 아홉 층계를 내디딘 추이의 공력은 이제 일류에서 절정 사이에 서 있는 조양자와도 필적할 만한 깊이가 되었다.
···쾅!
조양자가 발을 굴렀다.
바닥이 움푹 꺼지며 주변의 벽이 쩍쩍 갈라진다.
조양자의 칼이 앞으로 날아들며 초승달 모양의 궤적이 생겨났고 그것은 허공을 날아서 추이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쩌-어어억!
참격은 채찍처럼 휘어지며 복도를 두 조각으로 갈라놓았다.
추이는 그것을 피해 옆으로 움직이며 창을 앞으로 세 번 내질렀다.
펑! 퍼펑! 쩡-
첫 번째와 두 번째 찌르기에 조양자의 옷깃과 도포 자락에 구멍이 뚫렸고, 세 번째 찌르기는 장검에 의해 가로막혔다.
···까가가가각!
조양자는 추이의 창을 빗겨 쳐냈고 그 과정에서 생겨난 무수히 많은 불똥들을 추이의 눈을 향해 튕겨보냈다.
과연 수많은 전투를 치러 본 노강호다운 순간 판단력이었다.
하지만.
“······!”
조양자는 순간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추이는 부릅뜬 눈을 감지 않았다.
눈을 시퍼렇게 뜬 채로 불똥들을 모조리 받아내며 그대로 밀고 들어왔다.
병기와 병기가 맞부딪치며 순간적으로 튄 불똥들이 눈으로 떨어진다면 제아무리 고수라도 눈을 감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추이는 불똥이 눈알에 맞고 튕겨나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밀고 들어와 조양자의 턱을 향해 창을 찔러넣었다.
썩둑-
조양자의 흰 수염이 뭉텅이로 잘려나가며 목젖에 붉은 점이 생겼다.
주르르륵-
목젖에서 피가 흘러내려와 옷깃을 시뻘겋게 물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양자의 표정은 평온했다.
“허허- 이거 참. 까딱했으면 숨구멍이 셋 될뻔했군.”
“······.”
추이는 인상을 썼다.
옆구리가 뜨겁다.
목을 노리고 깊이 들어갔지만 공격이 얕았다.
깊이 들어갔던 만큼, 빠져나올 때 오래 걸렸고 그 탓에 옆구리를 내주고 말았다.
[조양······ 자······]
[칼······ 너무 길어······]
[공격······ 범위······ 넓다······]
승기를 잡기가 쉽지 않다.
조가장 출신의 창귀들이 조양자의 검법과 습관들에 대해 속속들이 알려주고 있어서 그나마 밀리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확!
추이는 소매 속에 넣어두었던 송곳들을 날렸다.
“허? 잡기에도 능한가.”
조양자는 날아드는 송곳들을 피해 고개를 옆으로 젖혔다.
그러자 그의 관자놀이 위로 망치가 떨어져 내린다.
“근성도 있고.”
조양자는 망치를 피하며 추이의 허리춤으로 칼을 찔러 넣었다.
추이는 인상을 쓰며 그것을 피했다.
부욱-
찢어진 무복 사이로 회색 곰 가죽이 드러난다.
추이의 옆구리가 어느새 붉게 물들어 있었다.
조양자는 그것을 보며 웃었다.
“대체 어떤 기인이 너를 길러냈는지 궁금하구나. 아해야, 지금이라도 창을 내려놓거라. 내 너를 중히 쓰마.”
하지만 말과는 다르게, 조양자는 바로 다음 초식을 준비한다.
창궁무애검법.
남궁세가의 먼 친척뻘 되는 가문답게, 조양자는 정석적이고 올곧은 검법을 펼친다.
아래에서 위로, 위에서 좌우를 번갈아 쓸어가는 참격의 폭풍우가 집요하게 추이의 옆구리를 노리고 있었다.
···깡! 까앙! 쩡!
조양자의 칼에 힘이 실리면 실릴수록 추이의 창이 뒤로 밀려난다.
추이는 어느새 창날 바로 아래를 손으로 잡고 있는 모양새가 되었다.
하지만 추이는 창날을 멀리 두게끔 창을 고쳐 쥘 새가 없었다.
조양자가 허공을 난도질하듯이 칼을 휘두르며 앞으로 돌진하고 있었다.
어느덧, 추이는 창날 바로 아래를 손으로 쥔 채 벽에 바짝 붙게 되었다.
그 앞으로 조양자가 긴 칼을 가로로 뉘고 있었다.
“끝이다.”
“······.”
추이는 더 이상 칼을 막아낼 수 없는 위치까지 몰려버렸다.
창의 길이는 너무 짧아졌고 뒤로 튀어나온 창대 부분이 벽에 걸려서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는 상황.
그런 상황 속에서.
“잘 가거라.”
조양자가 추이의 옆구리를 향해 칼을 찔러 넣었다.
푸-욱!
긴 칼날이 추이의 몸을 파고든다.
“······.”
추이는 입을 다물었다.
입술에서 새빨간 피가 흘러내려 턱 밑으로 뚝뚝 떨어졌지만 비명 소리는 튀어나오지 않았다.
“비명도 안 질러? 기특하구나.”
조양자가 추이의 옆구리에 칼을 더욱 깊숙하게 박아 넣었다.
“내 아들과는 정말 천지 차이야. 태범이, 그 녀석은 검에 손가락만 베여도 하루 종일 드러누워 버리거든.”
씁쓸함이 묻어나는 조양자의 목소리.
그는 추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혀를 끌끌 찼다.
“그래서 좀 씩씩하고 당찬 며느리를 보고 싶었지. 하여 호정문에 혼담을 넣었던 것이고. 내가 앞으로 얼마나 더 살지는 몰라도, 말년에 손주라도 잘 봐야 하지 않겠누?”
바로 그때.
···덥썩!
추이가 옆구리에 꽂힌 칼날을 손으로 움켜잡았다.
“네가 앞으로 얼마나 더 살지를 몰라?”
“······!”
추이의 말에 조양자의 표정이 변했다.
꽈악······
추이의 옆구리에 꽂아넣은 칼날이 빠지지를 않는다.
“이 무슨······!?”
조양자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칼을 마구 비틀었지만 날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사람 몸에 들어간 칼날이 대체 왜 안 빠진단 말인가?
아무리 대단한 악력이라고 해도 칼날을 이렇게 꽉 쥐어 고정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
꽈드득-
추이가 몸을 옆으로 슬쩍 틀었다.
그러자 칼날은 더더욱 단단하게 고정되어 아예 비틀리지도 않게 되었다.
그제야 조양자는 자신의 칼이 지금 무엇에 잡혀 있는지 깨달았다.
늑골(肋骨).
추이의 갈비뼈 사이를 관통한 칼은 지금 뼈와 뼈 사이에 걸려 오도 가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설마 이걸 일부러?’
조양자의 표정이 변했다.
추이는 일부러 다친 옆구리를 내보여 칼이 그쪽으로 들어오게끔 유도했다.
그리고 칼이 자신의 몸을 꿰뚫었을 때, 몸을 비틀어 늑골 두 대로 칼날을 붙잡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한 것이다.
꽈아아악-
칼날을 붙잡고 있는 추이의 왼손에서 피가 줄줄 흘러나온다.
하지만 추이는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조양자를 향해 속삭였다.
“모르면 내가 알려주지. 네가 앞으로 얼마나 살지.”
새빨갛게 물든 추이의 눈동자가 조양자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이윽고, 피로 물든 추이의 입술이 움직였다.
“조양자야.”
그 부름을 듣는 순간, 조양자의 전신에 오싹 소름이 돋아났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오직 그 생각만이 머릿속에 웅웅 메아리치고 있었다.
“조양자야.”
두 번째 부름을 듣는 순간, 전신의 털이 바늘처럼 꼿꼿하게 일어섰다.
조양자는 얼굴 전체를 뒤덮는 식은땀에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이윽고, 세 번째 부름이 들려왔다.
“조양자야.”
그 순간, 조양자는 보았다.
추이의 등 뒤에 있는 수많은 얼굴들을.
자신을 향해 피눈물을 흘리며 절규하는 수많은 이들의 단말마를.
[너도 이리 와!]
[나 혼자는 못 가!]
[꺼드럭대는 것도 이젠 끝이다!]
[너도 우리와 똑같은 신세가 되는 거야!]
[이-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
정신이 아득해지는 그 광경을 눈앞에 두고, 조양자는 손에 들어가고 있던 힘을 순간 풀어버렸다.
바로 그 찰나의 틈을 추이는 놓치지 않았다.
푸-욱!
짧게 쥔 창이 조양자의 복부에 꽂혔다.
“컥!?”
조양자의 작은 눈이 찢어질 듯 커진다.
추이는 조양자의 뱃속으로 들어간 창날을 위로 번쩍 치켜올렸고 이내 사납게 한번 휘저었다.
창날은 조양자의 배를 관통하지는 못했지만 그 대신 뱃속에 든 모든 내장들을 갈가리 찢어버렸다.
웨-엑!
조양자가 입에서 피를 토한다.
내장 조각들이 잔뜩 섞여있는 핏물이었다.
“어, 어떻게······ 어떻게······ 했······?”
조양자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추이를 내려다보았다.
추이는 어깨를 으쓱했다.
조양자는 사람 대 사람의 전투를 많이 치러 본 노장이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틀과 형식을 갖춘 비무, 혹은 대련이었을 뿐.
하지만 추이가 살았던 곳은 전장이다.
눈먼 칼과 창, 화살들이 범람하는 그곳에서는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끔찍한 참상들이 비일비재했다.
말단 병사의 생사결(生死決).
목숨을 도외시한 채 버둥거리는 악다구니.
추이에게 있어서는 새삼 새로울 것도 없는 것들이었다.
···땅그랑!
창과 칼이 동시에 바닥에 떨어졌다.
서 있는 자는 추이였고, 쓰러진 자는 조양자였다.
조양자는 바닥에 누워 추이를 올려다보았다.
추이는 허리를 펴고 곧게 서서 조양자를 내려다보았다.
곧 죽을 자가 산 자에게 말했다.
“나만······ 죽이고······ 아들은······ 살려다오······”
산 자는 죽은 자에게 대답했다.
“안 돼.”
되도 않는 감성에 취해 자비를 베풀 거였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다.
아니, 애초에 이 자리에 서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추이는 바닥에 떨어트렸던 망치를 집어들고 조양자의 얼굴을 내리찍었다.
···우직! ···우직! 따악!
두 번의 확인사살, 세 번째의 망치질은 거의 바닥만 때렸다.
추이는 망치를 물리고는 얼굴에 튄 피를 옷소매로 스윽 닦았다.
“못 보고 갔군. 손주.”
이윽고, 추이는 조양자의 시체를 지나 안쪽으로 향했다.
텅 비어있는 내실.
언뜻 보기에는 아무것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우-우우우······]
[도련······ 니임······]
[저쪽······ 저쪼옥······]
[이쪼옥······ 이쪼오오옥······]
[저기······ 아래애애······ 항아리······]
조가장의 창귀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한 방향으로 손가락질을 한다.
추이는 귀신들이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걸었다.
츠츠츠츠츠츠······
옆구리의 관통상쯤은 금방 회복된다.
창귀 몇 마리를 비틀어 내력을 짜내면 그만이었다.
이윽고, 추이는 내실 안쪽에 있는 탁자 앞에 섰다.
두 개의 찻잔.
아직 식지 않은 찻물.
그 옆에는 커다란 항아리가 놓여 있었다.
···깽창!
추이는 항아리 밑바닥을 발로 걷어차 부쉈다.
그러자 안에서 반응이 있었다.
“흐악!?”
조태범. 눈물범벅이 된 그가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덜덜 떨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 모습을 본 추이는 미간을 찡그렸다.
‘······이런 녀석이 호예양, 그 녀석을 넘봤던 건가.’
아비의 복수를 위해 숯불로 얼굴과 몸을 지지고, 그 숯을 삼켜 목소리까지 바꿨던 호예양.
아비가 눈앞에서 죽었는데도 그 원수를 피해 항아리 속에 숨어 덜덜 떠는 조태범.
분수를 모르는 자 하나가 욕심을 부려 수많은 사람들의 눈에서 피눈물을 뽑았다.
이런 하찮은 놈 하나 때문에 호예양은 성별도, 외모도 버린 채 추한 외모의 복수귀가 되어 변방 오랑캐들과의 전장에서 목숨을 잃어야만 했다.
터억-
추이는 조태범의 머리카락을 잡아챘다.
그리고 물었다.
“아직도 목에 힘이 들어가나?”
“으으으으······”
“부모 잘 만나서 돈푼께나 있고, 힘께나 쓰니까, 네가 세상의 주인공 같았어?”
추이의 눈이 시뻘겋게 타오르는 것을 본 조태범의 가랑이가 누렇게 젖어들어간다.
“좋다. 내가 너를 이 세상의 중심으로 만들어 주마.”
이윽고, 송곳과 망치를 든 추이의 목에서 숯불같이 뜨거운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오늘 밤 주인공은 너야.”
공교롭게도 오늘은 동짓달 초하루, 일 년 중 밤이 가장 긴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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