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보복행 (4)
9-
발 없는 말은 하룻밤 사이에도 천 리를 간다.
지난밤, 정체불명의 고수가 나타나 흑도방의 무인들을 몰살시켰다는 소문이 안휘성 전체에 쫙 퍼졌다.
호정문 역시도 이 소문 때문에 시끄러웠다.
“와, 진짜. 내가 아는 여자애가 흑도방에서 시비로 일했었거든? 근데 소문이 다 진짜래!”
호정문의 마굿간지기 우동원이 다른 소년들에게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어젯밤에 흑도방에서 살아남은 하인들도 다 똑같이 증언했다더라. 그뿐이야? 흑도방에 큰 빚을 지고 있던 사람들도 말했어. 자기들 빚 문서가 하룻밤새 다 사라졌다고!”
“와. 그동안 흑도방 패악질에 울던 사람들 속이 다 시원하겠네.”
“그러게 말이야. 솔직히 우리 호정문도 가끔씩 흑도방 놈들 때문에 골머리였잖아.”
“엥? 호정문도?”
“그래~ 호정문이 돈 빌렸던 몇몇 전장에서 그 변제 권리를 흑도방에 팔았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뭐, 가끔씩 와서 말도 안 되는 이자를 내놓으라며 행패를 부리곤 했었어. 근데 그것들이 다 무효가 되었으니 호정문에게도 엄청 좋은 일이지!”
“캬- 어떤 협객이 이렇게 멋진 업적을 이뤄냈을까? 정말 안휘성의 영웅이다, 영웅!”
우동원을 비롯한 마굿간지기들은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지난밤의 사건에 대해 떠든다.
그때, 침을 튀기며 떠들던 우동원의 눈매가 갑자기 사나워졌다.
“야, 신입! 너 말똥 다 치웠어!?”
그가 소리치고 있는 대상은 바로 추이였다.
“······.”
마굿간으로 들어온 추이는 잠자코 여물을 푸기 시작했다.
사실 예전에 주예화 표두가 주었던 금패는 아직 꺼내지 않은 상태였다.
자신이 고수의 신분으로 호정문에 머물게 되면 흑도방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이 호정문과 엮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조가장의 일을 정리하기 전까지는 굳이 주목을 끌 필요가 없지.’
바로 그때.
따-악!
추이의 뒤통수를 치는 손길이 있었다.
우동원. 그는 추이의 일거수 일투족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계속해서 시비를 걸어오고 있었다.
“이 새끼 이거, 말똥 좀 치우고 왔다고 표정 썩어있는 것 봐. 표정 안 풀어?”
“······.”
“오갈 데 없는 거지새끼 주워다가 밥 주고 잠자리 주면 고맙습니다~ 하면서 일해야지, 어디서. 어!? 네가 여기서 일할 수 있는 것도 다 호정문주님 덕분이야! 감사한 마음으로 일하란 말이야! 힘든 일 좀 했다고 죽상 떨고 있지 말고!”
우동원은 추이를 다그치며 으쓱거렸다.
가끔 이렇게 한 번씩 약한 놈을 붙잡고 호통을 쳐 줘야 마굿간 안에서 군기가 잡힌다.
하지만.
“일이 힘든 것은 너희들이 뒤늦게 들어온 아이들에게 일을 다 떠넘기기 때문이 아닌가?”
뒤이어진 추이의 발언에 우동원은 순간 멍해졌다.
“너 지금 뭐라고 했냐? 미, 미쳤어? 진짜 뒈지고 싶어, 너?”
마굿간지기 소년들이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온다.
그 모습들을 보며 추이는 옛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맨 처음, 변방에 있는 군부대에 신병으로 전입 왔을 때가 생각난다.
몸도 약하고 성격도 무뚝뚝해서 고참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시절.
자고 일어나면 물건들이 다 없어져 있고, 밤마다 구타를 당하는 게 당연했던 나날들.
‘그때 그 녀석이 참 많이 도와줬었지.’
추이는 자신과 의형제를 맺었던 호예양의 모습을 떠올렸다.
화상으로 얼룩진 그의 얼굴과 몸, 불타버린 목젖에서 나오던 쇳소리를.
······바로 그 순간.
“너희들!”
마굿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옥음(玉音)이 들려왔다.
우동원을 비롯한 마굿간지기 소년들이 별안간 벼락이라도 맞은 듯 빳빳하게 굳었다.
“······.”
추이는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마굿간 밖에 한 여인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호예양.
추이의 기억 속과는 전혀 다른,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으로 서 있는 그녀.
“왜 신참을 괴롭히니? 그러면 안 돼. 너희들끼리의 문화는 존중하지만, 그래도 처음 온 애한테는 배려가 필요한 법이야.”
호예양의 꾸중에 우동원이 주저하며 말했다.
“그, 그게 아니구요, 아가씨. 이 친구가 자꾸 저한테 반말을 해서······ 제가 딱 봐도 나이가 더 많은데. 헤헤-”
“아직 어린 애잖아. 존칭이라는 예법에 익숙하지 않을 수 있으니 너희들이 많이 가르쳐줘.”
“에이, 어차피 잠깐 일하다가 나갈 뜨내기인데요.”
“그래도.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잖아. 인연을 소중히 할 줄 알아야 해. 사람 일은 모르는 법이야. 언젠가 이역만리 먼 곳에서 다시 만나 가족이 될 수도 있는 거니까.”
자신들과 나이 차이도 별로 나지 않는 호예양의 상냥한 질책에 마굿간지기 소년들은 저마다 머리를 긁적인다.
‘잠깐 머물다 갈 뜨내기랑 다시 만날 일이 뭐 있다고.’
‘애초에 내가 이역만리 먼 곳으로 떠날 일 자체가 없는데.’
‘설령 거기서 다시 만났다고 해도 가족처럼 생각될 리가 없잖아.’
다들 생각하는 것들이 눈에 빤히 보인다.
그러거나 말거나, 호예양은 추이를 향해 손짓했다.
“얘, 이번에 들어온 애니?”
“······.”
추이는 가만히 서서 호예양을 바라보았다.
기억 속의 얼굴, 기억 속의 목소리와는 전혀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 수 있었다.
눈빛이 똑같다.
맑고 올곧은 기운.
눈앞의 호예양은 추이가 알던 바로 그 호예양이 분명했다.
“앞으로 누가 너를 괴롭히면 바로 나에게 와.”
말단 병사 시절, 선임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던 자신을 늘 데리고 다니던 의형의 모습 그대로였다.
눈앞에 겹쳐 보이는 형제의 모습에, 추이는 입을 열었다.
“너도.”
“······?”
돌아서려던 호예양이 멈칫했다.
호수처럼 커다란 눈이 추이의 모습을 담는다.
추이는 자신을 마주보고 있는 호예양을 향해 말했다.
“앞으로 누가 너를 괴롭히면 바로 나에게 와라.”
마굿간지기 소년들의 두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커졌다.
‘저 미친 새끼가 감히 주제도 모르고!?’라고 쓰여있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정작 호예양은 큰 눈을 껌뻑껌뻑거릴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내.
그녀의 눈매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응. 그래. 그럴게.”
씩씩한 웃음과 함께, 호예양은 마굿간을 떠났다.
* * *
달도 뜨지 않은 밤.
추이는 조용히 호정문의 담벼락을 넘었다.
으슥한 장소의 수풀 아래 숨겨두었던 무기들을 꺼낸 추이는 곧장 조가장이 위치한 곳으로 향했다.
묵빛의 창 한 자루.
그리고 송곳 두 자루와 망치, 철질려, 독 항아리, 그 외 각종 물건들.
핏-
추이는 눈 깜짝할 사이에 조가장의 담벼락을 넘었다.
경계가 제법 삼엄하다.
흑도방이 몰살당했다는 소식 때문인지 보초들에게 유독 기합이 바짝 들어가 있었다.
추이는 조용히 송곳을 빼들었다.
그리고 담장 아래의 풀숲을 통과해 보초의 그림자를 밟았다.
“누구냐?”
인기척을 느낀 보초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푸-슉!
추이가 뽑아든 송곳이 보초의 관자놀이에 박혔다.
그것은 길지도, 짧지도 않게 딱 사람의 두개골을 뚫고 뇌만 살짝 건드린 뒤 부드럽게 뽑혀나왔다.
꼴꼴꼴꼴······
태양혈에 뚫린 작은 구멍으로 피와 뇌수가 뿜어져 나온다.
추이는 시체를 수풀 속으로 끌고 들어갔고 조가장의 무복을 벗겨 입었다.
이윽고, 안쪽의 정원으로 통하는 산책로가 나타났다.
시비 몇 명이 등불을 들고 이동하고 있었다.
추이는 태연한 표정으로 그 옆을 지나쳤다.
나무 기둥 뒤로 또 한 명의 조가장 무인이 보인다.
그는 키가 아주 커서 머리가 추이의 손이 잘 닿지 않는 높이에 위치해 있었다.
추이는 손가락을 튕겨 철질려 하나를 쏘아보냈다.
푹-
바닥에 떨어진 철질려를 밟은 무인이 아얏- 소리를 내면서 허리를 굽힌다.
그가 발바닥을 찌른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려고 고개를 숙이는 순간.
부웅-
추이는 자루가 가늘고 끝이 두툼한 쇠망치를 꺼내 무인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콰삭!
그는 비명 한번 질러보지 못하고 즉사해 버렸다.
질질질질······
건물 뒤의 그림자에 시체를 숨긴 추이는 그대로 지붕 위로 뛰어올랐다.
‘보자. 지도에 따르면 장주의 침실은······’
저 멀리 불이 켜져 있는 건물 하나가 보인다.
방향은 남서쪽, 5층 높이의 누각이었다.
그 앞에는 몇 명인가의 보초가 서 있었다.
그중 하나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먹기 시작했다.
주먹밥.
아마 몰래 야식을 먹는 모양이다.
추이는 건너편 건물의 지붕으로 잠사 한 가닥을 던졌다.
차라락-
철질려에 묶인 잠사가 건너편 지붕에 단단히 묶이자, 추이는 품속에서 독이 담긴 항아리를 꺼내들었다.
찰랑-
검은 독액 한 방울이 잠사를 타고 흘러내린다.
그것은 어느덧 길게 연결된 잠사의 중앙부까지 흘러내렸고.
···또옥!
이내 잠사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 밑에는 보초가 먹고 있던 주먹밥이 있었다.
스르륵-
독액은 주먹밥에 떨어지자마자 하얀 밥알 사이사이로 곧장 스며들었다.
색깔이 검기는 했지만 어둠 속이라서 특별히 눈에 띄지는 않았다.
“커헉!?”
주먹밥을 먹던 보초가 목을 잡고는 기침을 한다.
그리고는 이내 픽 쓰러져버렸다.
그러자 멀리서 순찰을 돌고 있던 무사들이 뛰어왔다.
“뭐냐? 무슨 일이야!”
“도, 독!? 독이다! 독살이야!”
“주방으로 가자! 시비들부터 붙잡아라!”
“장원의 문을 닫아! 아무도 나가지 못하게 해!”
내부에서 혼란이 일어났다.
조가장의 무사들은 애꿎은 주방 시비들을 단속하러 우르르 흩어져 버렸다.
그것을 보고 있던 추이가 몸을 일으켰다.
“장난은 이쯤 해도 되겠군.”
그는 지붕에서 지붕으로 도약했다.
펄쩍- 푹!
껑충 뛰어오름과 동시에 창을 뻗어 벽에 박는다.
추이는 순식간에 4층 높이에 도달했다.
···펑!
창문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가자 그곳에는 세 명의 무사들이 있었다.
“웨, 웬놈······!?”
“습······!”
“살수······!”
셋 다 입을 벌렸지만 목소리는 내지 못했다.
추이가 번개같은 속도로 창을 놀렸기 때문이다.
···퍼퍼퍽!
세 무사의 목젖에 일자의 흉터가 남았고 뒷목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았다.
살갗을 자르고 들어간 창날이 관통 직전, 딱 멱만 끊어놓고 빠진 자국이다.
추이는 창을 물렸다.
회수할 때 시간이 지체되면 안 되니 굳이 관통까지 할 필요는 없다.
딱 죽일 수 있는 깊이로만 찌르면, 그뿐이다.
피로 물든 바닥을 지나자 계단 쪽에서 인기척이 들린다.
“누구냐?”
5층의 보초가 추이를 보고 인상을 찌푸린다.
“4층 담당이냐? 왜 여기까지 올라왔지?”
“······.”
“가만. 못 보던 얼굴인데? 누구냐 너는? 왜 검이 아니라 창을 들고 있······?”
추이는 소녀처럼 곱상한 얼굴에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조가장의 무복을 걸치고 있었다.
그래서 보초는 추이를 보고 습격자라는 판단을 바로 내리지 못했던 것 같다.
······그것이 그대로 그의 사인(死因)이 되었다.
퍼-엉!
계단을 박찬 추이는 그대로 창을 내질렀다.
창귀칭의 시뻘건 기운이 검은 창에 휘감겨 일직선의 검붉은 궤적을 그려놓았다.
콰직!
보초의 심장이 그대로 꿰뚫려 벽에 박제되었다.
추이는 그 기세 그대로 보초의 몸을 날려버리고는 5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뭐냐?”
“헉! 습격이다!”
“암살자가 왔다!”
5층의 보초 세 명은 추이의 등장에 즉각 반응했다.
하지만 추이의 반응 속도가 더욱 빨랐다.
추이는 건물 내부의 지형을 모두 외우고 있었기에, 맨 처음 마주한 가벽을 그대로 발로 차 부숴버렸다.
그 안에 있던 다른 보초 두 명이 암습을 준비하고 있다가 화들짝 놀란다.
전시 상황에서 찰나의 머뭇거림은 곧 죽음.
쩍- 써걱!
추이는 창을 두 번 놀려 두 개의 머리통을 몸에서 분리해내 허공으로 날려버렸다.
복도에 있던 보초 셋 중 둘이 칼을 뽑아들고 달려들었지만.
“으악! 바닥에······!”
“아악! 내 발!”
못으로 만들어진 철질려들을 밟고 맥없이 고꾸라지고 말았다.
푹- 뿌욱!
추이는 쓰러진 보초 두 명의 등팍에 창을 꽂아넣었다.
마지막 한 명은 벽을 박차며 뛰어올라 칼을 휘둘렀으나.
뻐-억!
추이가 던진 망치에 이마를 얻어맞고는 허공에서 뇌를 쏟아내며 절명해버렸다.
후두둑- 후두둑- 후두둑-
건물 안에서 피의 소나기가 내린다.
추이는 바닥에 깔린 철질려들과 살점 조각들을 발로 밀어 치웠다.
그때.
“소란스럽구나.”
안쪽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추이는 발걸음을 멈췄다.
강대한 내력이 담긴 목소리가 벽 너머의 공간에서 웅웅 울려퍼지고 있었다.
흑도방에서 상대했던 구양포 따위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기세.
“아무리 불청객이라도 최소한의 양심이라는 것이 있어야지. 이 시간에 웬 소동이냐?”
이윽고, 복도로 한 명의 노인이 걸어나왔다.
흰 백발, 풍성한 눈썹, 장신의 키, 검은 낯빛에 부리부리한 안광.
다른 검의 두 배는 될 법한 길이의 장검을 허리에 찬 검호(劍豪)가 추이를 마주했다.
추이가 고개를 까닥 기울이며 물었다.
“조양자(趙襄子). 맞지?”
“말이 짧은 아해로구나.”
조가장의 가주 조양자.
호예양의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트린 원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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