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무적쟁자수 (3)
5-
추이는 호정문의 정문을 지나쳐 후문으로 향했다.
호질표국의 표두에게 받았던 금패를 보여준다면 간단하게 정문으로 들어갈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하면 훗날 행동에 제약이 많아진다.
어떻게 해야 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고민하던 그때.
···벌컥!
갑자기 후문이 열리며 안에서 누군가가 뛰어나왔다.
“이 자식아! 왜 이제 와!”
큰 키에 뚱뚱한 몸, 사나워 보이는 얼굴을 가진 소년.
그는 난데없이 추이의 목덜미를 꽉 붙잡더니 호정문의 후문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하여간 이래서 거지새끼들한테 일을 맡기면 안 된다니까! 오갈 데 없어 보이길래 불쌍해서 거둬줬더니만! 아니, 말똥 좀 치우라 했더니 그걸 못 참고 그새 토껴!? 나머지 니 친구들은 다 어디갔어! 어!?”
무언가 오해가 있는 것 같았지만, 추이는 딱히 반박하지 않았다.
큰 덩치의 소년은 추이를 연신 윽박질렀다.
“잘 들어라. 나는 대 호정문의 명예 마굿간장 우동원이다. 너는 앞으로 내 밑에서 마굿간을 관리하는 거야. 별 거 없어. 말똥만 제때 치우고 여물만 제때 먹이면 돼. 그것만 잘 지키면 삼시세끼 찬밥이나마 얻어먹을 수 있어. 어때? 거지새끼로 살 때보다 훨씬 낫지? 그러니까 튀지 말고 열심히 일하란 말야. 이 복에 겨운 놈아!”
우동원의 말에 추이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옷이 많이 더러워지긴 했다.
하루 막일하고 밥 얻어먹는 거지 소년과 착각당할 정도이니 말이다.
우동원은 투덜투덜거리며 추이의 등을 떠밀었다.
“요즘 애새끼들은 당최 근성이 없어. 유리걸식 하는 것에 비하면 호정문에서 하인으로 일하는 건 극락 생활이나 마찬가진데. 에잉- 쯧!”
이윽고, 추이는 호정문의 장원에서도 가장 외진 곳으로 향했다.
마굿간이 있는 곳이었다.
우동원은 추이에게 말했다.
“자세한 것들은 엊그제 다 말해줘서 알지?”
“모른다.”
“모른······ 다? 너 말이 짧다?”
추이가 잠자코 있자 우동원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닌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윽고, 녀석은 설명을 시작했다.
“으휴, 그새 까먹었어? 머리 나쁜 놈. 그러니까 빌어먹고 살지. 잠은 저기 마굿간 한 칸에서 자고, 밥은 우리들이 먹고 남긴 거 대충 주워먹으면 된다는 게 그렇게 기억하기 어렵냐?”
“······.”
“말들은 비싸니까 따로 전문가들이 돌봐. 우리같은 놈들이 할 건 똥 치우는 거랑 밥 주는 것 말고는 없어. 괜히 뒷발굽에 채여 뒤지기 싫으면 말한테 접근도 하지 마.”
끝으로, 우동원은 추이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원래 우리들은 필요 없는 잉여 인력이야. 그런데 호정문주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근방의 배곯는 아이들을 대거 채용하신 거고. 그러니까 일 힘들다고 튀지 말고 제대로 일해라. 알겠······ 헉?”
하지만 우동원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두그닥- 두그닥- 콰쾅!
별안간 마굿간 문을 박차고 뛰어들어온 말 한 마리 때문이었다.
“어어어!? 으악!”
추이는 적당히 몸을 피했으나 우동원은 말발굽에 스치는 바람에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다.
“아이고오!”
우동원은 다리를 부여잡고 데굴데굴 굴렀다.
“······.”
추이가 고개를 돌렸다.
커다란 한 마리의 흑마가 마굿간 안에서 콧김을 씩씩 뿜어내고 있었다.
돌 같은 피부와 철 같은 뼈, 다른 말보다도 훨씬 더 커다란 덩치를 가진 명마였다.
그리고 지금, 그 명마의 주인은 마굿간 밖에서 낄낄 웃고 있었다.
“저 녀석, 참. 비싼 값을 하는구만. 기와집 한 채 값을 주고 산 놈이라 그런가, 길들이기가 참 어려워~”
“도련님. 근데 이래도 될까요? 마굿간지기 하나가 다친 것 같은데.”
“어차피 개 같은 놈들 아닌가? 개값이야 물어주면 그만이지. 까짓거, 복날 한번 더 왔다고 생각하고. 하하하-”
비단옷을 입은 공자 하나와 그의 호위무사로 보이는 남자가 대화를 하고 있었다.
몇몇 마굿간지기 소년들이 우동원을 부축하며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또 조가장의 조태범 공자네.”
“공자는 개뿔. 저 색마 새끼.”
“또 무슨 패악질을 부리러 온 거야?”
추이는 마굿간지기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조가장의 조태범.
그는 미끈한 얼굴에 짙은 눈썹, 짙은 쌍꺼풀에 그윽한 눈빛을 가진 청년이었다.
조태범은 섭선으로 얼굴의 절반을 가린 채 말했다.
“말똥 냄새 나니 얼른 내실로 가자고. 천한 것들의 눈빛이 닿는 것만으로도 옷이 더러워지는 기분이야.”
그들은 마굿간을 떠나 안뜰로 향하려 했다.
그때.
“손님이 왔다는 말에 급히 나왔더니만, 그게 조 공자인 줄은 내 몰랐구려.”
저 앞쪽에서 조태범을 막아서는 이가 있었다.
호랑이 같은 외모에 긴 수염을 기른 중년인.
그가 바로 호정문의 문주 호연암이었다.
조태범을 바라보는 호연암의 눈빛에는 불쾌한 빛이 역력했다.
“조 공자께서 예까지 무슨 일로 오셨소?”
이윽고, 조태범은 느긋한 태도로 포권을 취해 보였다.
“처갓댁에 무슨 일로 방문하였겠습니까, 장인어른. 미래의 제 아내를 보러 왔지요.”
“우리 예양이를 말하는 것이라면, 나는 혼사를 수락한 적이 없네만?”
“아직 아니기는 하죠. 호 소저가 17살이 되면 혼인할 생각이니.”
“······.”
호연암은 눈을 부릅뜨고 조태범을 바라보았다.
조태범은 능글거리는 웃음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미 동네에 소문 쫙 퍼졌습니다. 호 소저와 제가 1년 뒤에 혼인식을 올린다고. 동네 어린애들이 노래까지 만들어 부르고 있더군요. 호정문의 호 소저는~ 남 몰래 짝 맞추어 두고~ 조 공자를~ 밤에 몰래 안고 간다~”
“그 소문은 조 공자께서 낸 것이 아닌가 싶다만. 내 딸자식 혼삿길을 망치려고 말이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제가 뭐가 아쉬워서 굳이 우리 조가장의 위세보다 한참 처지는 호정문의 여식을 아내로 맞으려고 그렇게까지······”
바로 그때.
“서로 아쉬울 게 없는 것 같으니 당연히 혼담이 오가는 것도 어불성설입니다.”
호연암의 뒤에서 날 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안뜰에서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소녀와 여인의 기로에 서 있는 나이.
흑비단 같은 머릿결과 백옥처럼 흰 피부, 반달 모양의 검은 눈썹과 눈이 쌓일 정도로 긴 속눈썹, 호수처럼 크고 맑은 눈을 가진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호예양(虎豫讓).
호정문의 금지옥엽.
호정문주의 무남독녀 외동딸이었다.
그녀는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저는 세간의 시선에는 신경쓰지 않습니다. 그러니 조 공자께서는 따로 혼담을 알아보시지요.”
“아니, 소문이란 게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아시지 않습······”
“이 이야기는 더 들을 필요가 없군요. 저는 조 공자뿐만이 아니라 조가장의 그 누구와도 혼인하지 않습니다. 그럼 이만.”
딱 잘라 내린 축객령.
이내 호연암과 호예양은 발길을 돌려 사라져 버렸다.
대놓고 무시를 당한 조태범은 혼자 남아 비릿하게 웃었다.
“······돈도 없어서 다 쓰러져가는 삼류 문파 주제에 여전히 뻣뻣하기 그지없구나.”
“도련님. 어떻게 할까요?”
“뭐, 어차피 기루 가다가 잠시 여흥 차 들린 것 아니냐. 돌아가자. 일단 오늘은 말이야.”
조태범은 호위무사에게 어깨동무를 걸며 씩 웃어보였다.
“그나저나, 봤느냐? 호예양 말이다.”
“호 소저의 옥안을 본 것은 오늘이 처음입니다.”
“어땠냐?”
“솔직히, 처음 보는 순간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사람이 아닌 것처럼 아름답더군요. 제가 평생 살면서 본 모든 사람 중에 화용월태(花容月態)라는 말이 가장 딱 들어맞는 여인 같습니다.”
“그치? 소문대로 경국지색(傾國之色)이지?”
“소문이 오히려 현실을 다 못 전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 내가 집착하는 이유가 다 있다니까.”
조태범은 비릿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호예양의 외모를 경국지색이라고 표현한 이유도 알겠지?”
“나라를 망하게 만들 외모라······ 그렇군요. 알 것 같군요.”
호위무사는 호정문 전체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태범이 말을 받았다.
“예쁜 여자가 돈이 없고 힘이 없으면 불행해지지. 호예양의 불행은 모두 자신의 얼굴에서 비롯된 것이다. 호정문 따위의 여식치고는 너무 예뻐. 그러니까 나 같은 불한당에게 노려지는 것이 아니겠나? 다 자기 스스로 불러온 재앙이다, 이 말이야~”
“그도 그렇습니다. 천하의 색마 조 공자님께 노려지다니, 호 소저의 앞날도 참 기구해지겠군요.”
“흐하하하! 이 녀석, 봉급의 반을 기루에서 탕진하는 네놈이 할 말이냐?”
조태범과 호위무사는 주거니 받거니 하며 마굿간으로 돌아왔다.
아까의 소란 때문인지 마굿간지기들은 모두 다 마굿간을 비우고 도망친 지 오래였다.
“엿차. 기루로 가자!”
조태범은 마굿간에 넣어두었던 자신의 흑마 위로 뛰어올랐다.
한데? 거친 성격의 이 흑마는 어찌된 영문인지 조태범을 등에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반응도 없이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뭐야, 이 녀석? 왜 가만히 있어? 어서 가지 않고.”
조태범은 의아한 표정으로 흑마를 내려다보았다.
기와집 한 채 가격의 돈을 주고 구입한 이국의 명마.
한번 고삐를 당기는 것만으로도 앞으로 쭉쭉 나가는 이 귀한 보물이 오늘은 어째 평소와 같지 않게 얌전하다.
“뭐지? 어디 아픈가?”
호위무사가 말의 얼굴을 만졌다.
바로 그 순간.
부글······
흑마가 갑자기 게거품을 물며 눈을 까뒤집었다.
그리고는.
쿵!
그대로 옆으로 쓰러지더니 혀를 빼물고 죽어버렸다.
* * *
추이는 멀찍이 떨어진 곳에 서서 마굿간 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태범과 호위무사가 쓰러진 말을 보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것이 보인다.
말이 왜 죽었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말의 몸 전체를 살피고 있는 듯하나.
“헛수고.”
그들이 말이 죽은 이유를 알게 될 일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저 말을 죽인 자가 바로 추이이기 때문이다.
뚝- 뚝-
추이의 손에 들린 말의 간에서 피가 뚝뚝 떨어진다.
전장에서 수많은 말을 죽여본 추이는 눈에 띄는 외상 없이 말을 죽이는 방법을 서른 세 가지도 넘게 알고 있었다.
그중 하나는 바로 기름칠을 한 손을 말의 항문에 집어넣어 간을 빼내는 것이었다.
‘호조공(狐爪功). 여우누이의 술.’
과거, 말단 병사로 전장을 뒹굴던 당시에 배웠던 잡기들 중의 하나였다.
추이에게 이걸 알려준 ‘매구’라는 이름의 병사는 식량 보급이 안 나와 배를 곯을 때마다 몰래 마굿간을 돌며 군마의 간을 빼먹곤 했었다.
‘그러다가 걸리는 바람에 목이 잘려 삼백 일간 효시되었지만 ······뭐, 아무튼.’
마굿간을 나오며 투덜거리는 조태범을 추이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 녀석인가 보군. 조가장의 호색한 외동아들이.”
과거 호예양에게 들어서 안다.
호정문이 몰락하게 된 계기가 바로 조가장 때문임을.
조가장이 흑도방이라는 곳에 의뢰를 넣어 호정문을 습격했고 호정문은 세상에서 사라진다.
호예양은 단지 조가장과 호정문의 이권 다툼 때문에 벌어진 참사라고 했지만······ 사실 진짜 이유는 호예양의 미모를 탐한 조태범 때문이었던 것이다.
호예양 본인이 이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추이는 그가, 아니 그녀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 녀석이 어떤 마음으로 자신의 얼굴을 불로 지져 없앴는지 알겠군.’
불로 얼굴을 지지고 숯을 삼켜 목소리를 태웠던 것은 단지 외모를 바꾸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아름다움을 저주처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저벅-
생각을 마친 추이는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지평선 너머로 사라진 조태범의 뒤를 밟기 시작했다.
저벅- 저벅-
친구의 원수를 만났는데 달리 말이 필요 있으랴?
저벅- 저벅- 저벅-
행동으로 보여주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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