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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귀무쌍-2화 (47/110)

2-삼칭(三稱)에 황천(黃泉)이라

2 삼칭(三稱)에 황천(黃泉)이라

녹림도 위호(爲虎)는 지금 덜덜 떨고 있었다.

어렸을 적, 아비와 형들을 따라 사냥을 나갔다가 호랑이를 마주쳤을 때 느낌이 딱 이랬다.

그 흉악한 얼굴, 무시무시한 울음소리, 압도적인 기세.

아비와 형들이 갈가리 찢어져 죽는 동안 위호는 토굴 속에 숨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덜덜 떨어야만 했다.

그 이후, 위호는 매일 밤 아비와 형들이 부르는 소리에 시달려 왔다.

‘위호야.’

사립문 밖에서 들려오던 아비의 목소리.

‘위호야.’

마당에서 들려오던 형제들의 목소리.

‘위호야.’

그리고 장지문 밖에서 들려오는, 알 수 없는 무언가의 부름.

그럴 때마다 위호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로 덜덜 떨었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어으어어어어······”

위호는 눈앞으로 걸어오는 한 소년을 보고 뒷걸음질 쳤다.

온몸에서 검붉은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소년.

그 모습은 그야말로 흉신악살 그 자체가 현현한 듯하다.

‘이리 와.’

‘같이 가자.’

‘왜 너 혼자만 살았어.’

소년이 쥔 장창에 꿰여 있는 세 동료들이 이쪽을 노려본다.

그들은 모두 아비, 형제들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편.

“······.”

추이.

그는 눈앞에 있는 위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삼칭(三稱)에 황천(黃泉)이라.”

추이는 아주 오래전의 일을 회상하고 있었다.

“이름을 세 번 부를 동안에 상대를 황천으로 보낸다. 이 또한 오랜만이로군.”

그러니까, 자신에게 마공을 가르쳐 주었던 스승에 대한 기억이었다.

*       *       *

어느 비 오던 날 밤.

말단 소년병으로 입대했던 추이는 전장의 최전선에서 수색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길이 험한 반면 딱히 전략적인 가치는 없는 곳이었기에, 동료 병사들은 제일 계급이 낮았던 추이에게 수색 임무를 모두 떠넘긴 채 돌아가 버렸다.

그러던 차, 추이는 묘한 것을 발견했다.

길과 길이 뚝 끊겨서 절벽처럼 깎여 나간 곳.

산기슭 사이에 범의 아가리처럼 쩍 벌어진 협곡.

그곳에 한 노인이 기대어 앉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는 붉은 머리에 붉은 피부, 붉은 눈을 가지고 있었고 입고 있는 옷 또한 시뻘건 일색(一色)이었다.

추이는 직감했다.

그것은 ‘보이되 보이는 척 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돌아서려는 그에게, 노인이 말을 걸어왔다.

‘그렇게 살아서 무얼 하려느냐?’

추이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노인의 말이 계속 들렸다.

‘어차피 벌레같이 살다 갈 목숨이다. 이리 내려와서 도박 한번 해 보지 않으련?’

노인의 목소리에는 실로 묘한 이끌림이 있었다.

말과 이성으로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실로 기묘한 부름이었다.

삶에 달리 미련이 없는 추이였기에, 그는 절벽 아래로 내려가기를 선택했다.

가까이서 보니 노인의 외모는 첫인상과는 조금 달랐다.

그는 흰 머리에 흰 피부를 가졌고 흰 옷을 입고 있었으며 붉은 것은 눈동자뿐이었다.

다만 온몸에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기에 새빨갛게 보일 따름.

노인은 물었다.

‘네 이름이 뭐냐?’

추이는 대답했다.

‘추이.’

그러자 노인이 한번 더 물었다.

‘네 이름이 뭐냐?’

추이는 대답했다.

‘추이.’

노인이 마지막으로 물었다.

‘네 이름이 뭐라고?’

‘추······’

이번에는 대답하지 못했다.

입을 벌리려던 추이의 목덜미를 노인이 강하게 틀어쥐었기 때문이다.

다 죽어 가던 노인이 어떻게 일어났으며, 어떻게 눈 한번 깜빡이는 동안 그 먼 거리를 좁혀 온 것일까?

추이가 눈을 껌벅거리는 동안 숨을 고른 노인은 이내 비릿하게 웃어 보였다.

‘죽이고 싶은 놈이 있거들랑 이름을 세 번 묻거라.’

‘······.’

‘대답에 상관없이, 모두 죽일 수 있게 될 것이다.’

노인은 추이에게 긴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많은 것이 생략된 내용이었지만 추이가 이해하는 데에는 큰 지장이 없었다.

노인의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이랬다.

一. 그의 이름은 홍공(洪公)이다.

二. 홍공은 혈교(血敎)라는 집단의 교주이다.

三. 홍공은 정파(定派), 사파(似派), 마도(魔道) 연합의 추격을 받아 쫓기고 있다.

四. 홍공이 쫓기고 있는 이유는 무림 역사상 전대미문의 혈사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五. 홍공은 기나긴 추격 끝에 정‧사‧마 최후의 고수들과 차륜전을 벌였고 그들을 모두 죽이는 것에 성공했으나, 그 여파로 인해 하반신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

六. 홍공은 추이가 자신의 몸을 치료할 약재들을 조달해 주기를 바란다.

그것을 잠자코 듣고 있던 추이는 이내 한마디로 자신의 입장을 정리했다.

‘죽이시오.’

추이는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하지 않는다.

딱히 신념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가 나고 자랐던 부족에는 거짓말이라는 개념이 없기에 그렇다.

노인 홍공은 다시 물었다.

‘왜 내 부탁을 거절하느냐? 내가 ‘혈마(血魔)’라서?’

‘그것이 아니라, 내게 약재를 구해 올 능력이 없기 때문이오.’

추이는 솔직하게 말했다.

이 근방에 있는 병영에는 홍공이 원하는 약재들이 없었다.

하수오, 설삼, 내단 등등······ 그것은 아군의 병영 본진도 모자라 저 강 건너 적진의 창고까지 털어야 간신히 조달할 수 있을 만한 것들이었다.

추이는 힘도 권력도 없는 말단 병사였고 보신을 위한 약재는커녕 당장 상처를 치료할 연고조차 없었다.

아니, 연고는 고사하고 당장 내일 보급받을 보리떡이나 감자 한두 개가 아쉬울 처지.

······하지만 추이의 대답을 들은 홍공은 그저 비릿하게 웃을 뿐이었다.

‘걱정 마라. 내가 일러 주는 대로만 하다 보면 그보다 더한 약재들도 얼마든지 구해 올 수 있을 테니.’

그렇게 거래가 시작되었다.

추이가 약재를 구해 올 수 있도록 홍공은 자신의 무공을 하나 둘씩 추이에게 전수해 주었다.

어떤 날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담을 넘는 법을, 어떤 날은 거구의 적을 한 번의 손놀림으로 죽이는 법을, 어떤 날은 물에 뜨지 않고 강을 건너는 법을.

그럴 때마다 추이는 강해졌다.

조용히 담을 넘어 적진 한가운데로 침투했고, 적군의 지휘관을 죽였으며, 누구에게도 쫓기지 않은 채 강을 건너왔다.

살아남기 위해서, 추이는 계속해서 싸웠고 홍공 역시도 그러했다.

하지만 추이는 운이 좋았고 홍공은 그렇지 못했다.

어느 날 밤.

그러니까 추이가 서른 명이 넘는 적군 병사를 죽이고 그 지휘관의 목까지 잘라 돌아온 날의 밤.

기껏 훔쳐 온 약재가 무색하게도, 홍공은 죽어 있었다.

머리만 남은 채로.

*       *       *

툭- 데구르르르······

누군가의 머리가 산비탈을 따라 데굴데굴 굴러 내려간다.

표사인지, 녹림도인지, 그 전에는 무얼 하던 사람인지 알 수 없는 자의 머리통.

그것은 흙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다가 한 곳에 멈추었다.

바로 추이의 발치였다.

‘또렷하다.’

정신이 약숫물처럼 맑았다.

어두운 숲속에 들어온 이래 수십의 적을 창으로 찔러 죽였지만 예전처럼 미쳐 날뛰는 일은 없었다.

홍공에게 전수받은 마공은 본디 불완전한 것.

그는 추이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베풀었는데 그것은 추이가 예뻐서가 아니었다.

‘······익히다 보면 언젠가 미치광이 폐인이 되어 버릴 것을 알았기 때문이겠지.’

홍공은 추이를 이용했다.

몸을 낫게 할 약재들을 모두 조달하고 나면 추이를 죽여 없애거나 혹은 미치광이로 폭주하도록 유도했을 것이다.

하지만 홍공은 죽었고, 추이는 그가 남긴 마공을 구 할 가까이 익혔다.

그동안 골수에 스며들어 뇌까지 미친 마기를 억누르느라 추이는 수많은 고생을 해야 했다.

때로는 먹지도, 자지도 않은 채 장장 구십 일 동안이나 무림공적들을 쳐 죽이고 다녔던 적도 있었다.

사람을 죽이지 않을 때는 몸도 마음도 무저갱 깊숙한 곳에 갇혀 있는 듯 답답했다.

사람을 죽일 때만이 정신이 맑아졌고 자기 자신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다.

‘······분명 그랬었을 터인데.’

추이는 피로 물든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살인을 하지 않을 때도 살인을 할 때처럼 마음이 고요하다.

단전 안에서 피어오르고 있는 마공의 씨앗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어떻게 된 거지? 마공이 억제되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공의 힘은 그대로 끌어다 쓸 수 있으나, 그의 부작용인 정신착란은 전혀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무공(武功)은 사라졌으되 무리(武理)는 남아 있기에, 추이는 이 변화가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금방 자각했다.

호흡.

부족 대대로 전승되어 내려왔던 묘족의 호흡법.

군에 입대한 뒤로 싹 잊어버렸던 어린 시절의 호흡법을 회귀한 직후의 몸은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소년 시절의 호흡법에 따라 숨을 쉬자 홍공에게 전수받았던 마기의 부작용이 서서히 옅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잊어버렸던 소년 시절의 추억이 청장년 시기의 폭주를 막을 수 있는 열쇠였을 줄이야.

참으로 기묘하고도 공교로운 우연이었다.

츠츠츠츠츠츠······

피부 위로 피어오르던 검붉은 증기가 서서히 몸속으로 갈무리된다.

창날에 얼굴을 비추어 보니 붉게 물들었던 눈동자가 어느덧 검은색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그런가. 힘은 그대로이면서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가. 그런 것이 가능했다니.”

추이는 헛웃음을 머금었다.

마공을 십 성 대성하기 전까지는 절대 맨정신으로 돌아올 수 없다고 장담하던 홍공의 얼굴이 벌써부터 흐릿하다.

만약 이 호흡법을 알았다면, 홍공은 그렇게 허무하게 죽지 않을 수 있었을까?

추이는 피 묻은 창을 내려놓고 또 다시 생각에 잠겼다.

바로 그때.

“······소협.”

뒤에서 추이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추이는 상념에서 깨어나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검은 피풍의를 걸친 여자 한 명이 포권 자세를 취해 보이고 있었다.

“위급한 순간에 도움을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그녀의 뒤에는 같은 복장의 남자 십수 명이 마찬가지로 포권을 취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이번 난전에서 살아남은 호질표국의 표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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