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Ep3 - 1. 게임의 시작 (4)
그녀의 퉁명스런 말투에 재현은 살짝 기분이 나빴다. 더군다나 아직 새벽이 아닌가?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자신을 고깝게 생각하는 그녀에 대해 기분이 나빴지만 경황이 없어 기분 나쁜 것을 느끼지 못하다가 좀 여유가 생기자 그녀의 태도를 확인하고는 기분이 나빠진 게 맞으리라.
- 알겠어.
재현 역시 그녀에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문을 쿵 닫았다. 그러자 그녀는 다시 문을 쿵쿵 두드리며 소리쳤다.
- 야! 촌장님이 부르신다고.
- 알겠다고.
재현은 그렇게 대답을 하고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는 침대에 눕느라 벗어놓았던 신발을 신었다.
신발을 신으며 자세히 보니 먼지와 때가 끼어 있을 뿐 안쪽은 깨끗했다. 그리고 그렇게 눈밭을 뒹굴고, 흙 밭을 걸었어도 흠난 곳이 하나도 없었다.
더욱이 그 눈밭을 걸으면서도 물 한 방울 새지 않았고, 한기 한 번 느끼지 않았었다.
- 이 신발 뭐지?
그 순간 신발이며, 재현이 두르고 있는 헝겊 가죽 같은 옷이며, 벨트 모두 이상하게 느껴졌다. 아니 자신한테 딱 맞는 것이라기보다 마치 원래 몸과 하나인 것처럼 느껴졌다.
- 뭐 해! 안 나오고?
- 나간다고!
밖에서 들리는 여자 아이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재현 역시 크게 소리를 쳤다.
'누군 소리 지를 줄 모르나.'
아까 느꼈던 고까움이 점점 커지면서 그녀의 말투며, 목소리가 모두 듣기 싫었다.
신발을 신은 재현은 문을 벌컥 열었다. 재현이 문을 열고 나오자 여자 아이는 깜짝 놀라 한 걸음 물러났다.
- 가자! 촌장님한테!
재현은 그녀에게 그렇게 말하고 앞장을 섰다. 그런데 재현이 촌장의 집을 아나? 아니나 다를까 뒤에서 한숨을 푹 쉬며 그녀가 말했다.
- 그 쪽 아니거든!
재현은 그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몸을 틀어 그녀의 뒤를 따랐다. 재현이 거주하는 집과 촌장의 집은 멀지 않았다.
촌장의 집이라고 해서 유별날 건 없었다. 다만 깃발이 하나 꽂혀 있을 뿐이었다.
- 할아버지, 데려왔어요.
- 응. 그래.
그리고 촌장에게 재현이 인사를 하려할 때 여자 아이가 먼저 선수를 치며 말했다.
- 할아버지! 앞으로 저 녀석 데려오는 일은 다른 사람 시키세요.
그렇게 꽥 소리를 치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촌장은 너털웃음을 웃으며 재현에게 말했다.
- 하이네가 성격이 괄괄해서 그렇지 나쁜 아이는 아니란다.
- 네.
하고 대답하는 순간, '하이네'란 이름을 어디선가 들은 듯 했다.
- 하이네라구요?
- 그래. 하이네. 무슨 문제라도 있나?
- 아니 어디선가 들은 것 같은 이름이라서요. 이 마을에 처음 왔는데...
- 아! 그루퍼에게 들었겠구만. 자네 식량 배급은 하이네가 해 줄 거라네.
이럴 수가. 자신의 의식주중 가장 중요한 '식'을 저 왈가닥에게 받아와야 하다니. 이건 어쩌면 이 마을 생활에서 가장 큰 시련일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 아까 자네의 대답은 우리 마을뿐만 아니라 우리 왕국에 아주 중요한 대답이었네.
'아니 그렇게 중요한 대답을 해 준 사람에게 고작 이런 대우야?'
- 자네는 드래건과 함께 생활을 하다 내려온 사람이라 마을 적응이 쉽진 않을 걸세. 그래서 내 한 가지 제안을 하겠네만. 들어주겠나?
- 촌장의 제안으로 직업을 바꿀 수 있습니다.
현재의 직업은 ???입니다. 바꾸시겠습니까?
메시지 창이 또 떴다.
'직업이 ???라고? 돈 많은 백수가 아니고?'
재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촌장에게 물었다.
- 꼭 바꿔야 하는 건가요?
- 그건 아닐세. 자네의 마음에 드는 직업이 있으면 그걸 선택하면 된다네.
- 그럼 한 번 들어나 보죠.
재현의 대답에 촌장이 내놓은 직업은 재현이 전혀 선택하고 싶지 않은 직업이었다.
- 우리 마을에는 저 동토를 개간하는 농부와 북쪽 얼음집에서 드래건의 활동을 감시하는 파수꾼, 그리고 마을의 경계를 지키는 경비병이 있다네. 농부는 땅과 함께 평생 지내며, 단란한 가족을 꾸리며 살 수 있고, 파수꾼은 드래건이 활동만 하지 않으면 편한 직업이라네. 다만 조금 추울 뿐이지. 그리고 마을 경계를 지키는 경비병은 말 그대로 경비병이기 때문에 훈련과 전투의 과정을 겪어야 하지. 어떻나?
재현은 생각할 것도 없이 'No'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그것 말고 다른 직업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다시 질문을 했다.
- 그 직업 말고 다른 직업은 없나요?
그러자 촌장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 허허허. 역시 드래건과 함께 생활하던 사람이라 생각이 다르군.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우리 마을을 거점으로 북쪽을 탐험하는 탐험가도 있고, 마을에 물건을 수송해 오는 상인도 있다네. 아니면 이런 저런 물건을 만드는 제작자도 있다네. 물론 이런 것들은 힘이 들고 보상은 적다네.
재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거야 원 직업이라고 온통 몸 쓰는 것들뿐이니. 자신의 천성과는 결코 맞지 않는 것들이었다.
- 음... 생각해 보니 지금 제 직업이 좋습니다.
재현의 말에 촌장은 몹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 자네 직업이 좋다고? 자네 직업이 무언가?
재현은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 순간 재현은 촌장에게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 백수가 바로 제 직업입니다.
- 백수? 백수가 뭔가?
아니. 백수를 모르다니. 이놈의 동네는 그럼 모두 일을 한단 말인가?
- 백수란 말입니다. 일정한 틀에 얽매이지 않은 채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프리랜서를 의미하죠.
- 프... 프리랜서?
- 이런저런 일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죠.
그 말에 촌장을 크게 웃었다.
- 결국은 아무 일도 안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군.
-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는 것이죠.
재현의 말에 촌장은 웃으며 말했다.
- 그런 직업이 딱 하나 있긴 하지. 바로 거지라네.
- 네? 거지라뇨? 제가 어딜 봐서 거지입니까?
- 허허허. 자네는 재현이 집을 주기 전까지 집도 없고, 돈도 없고, 먹을 것도 없고, 입은 것은 누더기였네. 더군다나 드래건과 살다 왔으니 기댈 가족도, 친구도 없지 않은가?
촌장의 말을 들으니 사실 거지와 다름 없었다. 처음 시작할 때 자신의 꼬라지를 보고 거지같다고 느꼈는데 아니나 다를까 다른 이들도 재현을 거지로 본 것이었다.
- 촌장님. 제가 여기서는 거지같아 보이지만 원래 살던 세상에선 우리 아버지가 중요한 일을 하고 계시거든요. 그러니까...
- 원래 살던 곳이라... 전에 말했던 대한민국인가 하는 나라 말인가?
- 네. 바로 거기죠.
- 왕실 정보국에 연락을 해 봤지만, 그런 나라는 없다네. 자네는 드래건에 의해 환상을 경험한 것이라네.
재현은 속으로 '풋...'하고 웃었다. 자신의 꿈속에서 자신의 환상으로 인해 만들어진 것들이 자신을 환상 속에 살았다고 떠들다니.
재현이 웃음을 참느라 인상이 일그러지자 촌장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 허허. 어쩔꼬. 하이네가 드래건 때문에 약간 바보가 된 것 같다더니만 진짜로구만.
그 순간 재현은 손사래를 쳤다. 촌장까지 자기를 미친놈으로 본다면 이 마을에서 쫓겨나 결국 저 눈밭을 또 걸어야 할 것이다. 그것만은 절대 안 된다.
- 아.. 아니에요. 저는 다만 왕실 정보국의 정보 수집이 아직 초보라고 생각해서 웃은 것이죠.
그러면서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 이건 촌장님께만 말씀드리는 건데요. 드래건은 지금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차원의 세계를 오갈 수 있답니다.
재현의 말에 촌장의 눈은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촌장 역시 그냥 한 마을에서 오래 살아 촌장이 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젊은 시절 왕실 정보국에서 드래건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던 사람이었다.
- 자... 자네가 그걸 어떻게...
재현은 순간 쾌재를 불렀다. 뭐 이 따위 세계에서 드래건이야 알고 있는 상식 수준일 테니까.
아니 자신의 꿈인데, 자신이 아는 범위에서 다 일어나는 일이 아닌가? 자신이 드래건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고, 저렇다면 저런 것이겠지.
- 보세요. 제가 미쳐 보이시나요?
- 아니네. 자네 당분간은 아무에게도 이 말을 하지 말게나. 그리고 다음 달에 내가 왕궁에 갈 때 나랑 같이 가세. 이... 이건... 자네가 알고 있는 것이 더 있을 테지만, 나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일일 테니 더 이상 말을 말게나.
재현은 촌장이 그 말 한마디에 놀라는 것을 보고는 '드래건'이 이 세계에서는 중요한 존재임을 알았다.
'앞으로 많이 우려먹어야겠군.'
속으로 음흉하게 생각을 하며 대답을 했다.
- 네. 알겠습니다.
- 그래. 가.. 가보게.
- 촌장의 신뢰도가 500% 상승하였습니다.
오호라. 이건 뭐지? 그 순간 재현은 촌장을 돌아보며 말했다.
- 혹시...
재현의 말에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촌장은 화들짝 놀라며 재현을 보며 물었다.
- 무... 무슨 일인가?
- 혹시 촌장님도 눈앞에 무슨 글자 같은 게 보입니까?
- 그게 무슨 말인가?
'쩝. 그러면 그렇지. 이건 내 꿈인데, 저 사람에게도 나랑 똑같은 게 나타나지는 않겠지.'
- 아닙니다.
하고 인사를 하며 돌아 설 때, 촌장의 머리 위에 책이 몇 권 보였다. 재현은 다시 생각에 잠긴 촌장에게 말을 걸었다.
- 저 자꾸 죄송한데요...
- 아닐세. 말해 보게나.
- 저 위에 있는 책 좀 빌려갈 수 있을까요?
- 책?
하며 촌장은 돌아보며 말했다.
- 음.. 저 책은 원래 저기 있던 것인데, 아무튼 필요하면 빌려가게나.
재현은 속으로 '원래 저기 있던 책?'하고 반문했지만, 더 이상 촌장에게 말을 걸었다간 촌장이 곧 '드래건같이' 화를 낼 것 같아 책만 받아서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에서 책의 제목을 보니 가관이었다.
- 기본 매뉴얼
- 요리의 보고
- 가상현실의 역할
이게 뭐야? 촌장의 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었다. 더군다나 꿈 속 세계에서 '가상현실의 역할'이라니.
자신의 꿈이 이렇게나 정교하고, 이론적이고, 엄청났나 싶었다.
'혹시 난 천재가 아닐까? 꿈에서 깨면 아빠한테 졸라서 이런 게임을 만들어봐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