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Ep3 - 1. 게임의 시작 (1)
Episode 3. 카타콤(Catacomb)
- 아이디를 입력하십시오.
눈앞에는 검은 창이 하나 떴다.
- 어? 나는 잠들어 있었는데, 갑자기 아이디를 입력하라니. 이게 뭐지?
재현의 물음과는 달리 머릿속에는 다시 말이 흘렀다.
- 아이디는 한 번 입력하면 다시는 바꿀 수가 없습니다. 신중하게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재현은 자신이 게임에 미쳐서 이젠 꿈에서도 게임을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재현이 우물쭈물하고 가만히 있으니까 또다시 화면에서는 아이디를 입력하라는 말이 나왔다.
- 아이디를 고르기 어려우시면 제가 랜덤으로 선택해 드립니다. '빅유즈'는 어떻습니까?
재현은 그 말에 혼자 중얼거렸다.
- 아니 아무리 꿈이어도 그렇지 다짜고짜 아이디를 입력하라고 하고, 촌스럽게 빅유즈가 뭐냐, 빅유즈가. 그리고 꿈인데 어떻게 입력하라는 건지 이거야 원.
재현은 도대체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재현은 '빅유즈'라는 말을 듣고 인상을 썼다.
그리고 '꿈'이니까 혹시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싫어'를 외쳤다. 그러자 정말 '싫어'라는 소리가 밖으로 울렸다.
- 어라? 생각하고 외치면 되는 거야?
재현이 대답을 하자 시스템은 다시 또 재현에게 질문을 했다.
- 아이디를 입력하십시오.
- 미라지 엑스(Mirage X)
- 미라지 엑스가 맞습니까?
- 응.
미라지는 신기루라는 의미이다. 엑스는 미지. 평소 재현이 게임 캐릭터나 닉네임을 정할 때면 항상 정하는 이름이었다.
물론 듣기에 따라서는 유치한 닉네임이었지만, 가상현실은 그저 신기루 같은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 그럼 다음 단계로 넘어가겠습니다. 성별은 남자이십니까, 여자이십니까?
- 당연히 남자...
그 순간 이건 어차피 꿈인데, 여자면 어때 하는 생각을 했다. 만약 현실이라면 친구들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쪽팔릴 일이지만, 꿈에서 깨어나면 자신만 아는 일인데 뭐 어때 하는 생각이었다.
- 흠흠.. 여.. 여자.
그러자 시스템은 잠시 고민을 하다가 말을 했다.
- 성별을 여자로 설정하실 수는 있습니다만, 현재의 외모 상태를 기준으로 캐릭터가 만들어지기 때문에 이상할 수 있습니다. 또한 강제로 성별을 바꾸실 경우에는 다양한 페널티와....
재현은 신기한 꿈이라고 생각했다. 정신이 없을 정도로 길게 뭐라 뭐라 떠들더니 '그래도 여자로 하시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자신의 꿈이지만 참 시스템 하나 거창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머릿속에 이렇게 정교하고 거창한 게임 시스템이 있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나중에 꿈에서 깨면 잊지 않아야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꿈의 목소리는 성별을 바꾸는 것에 불만이 많은지 또 다시 페널티 사항을 읊어댔다.
- ... 여자일 경우에는 다른 여성 캐릭터의 호감도보다 남성 캐릭터의 호감도가 높아 자칫 남성 캐릭터와 파티를 맺을 경우....
그 순간 멈칫했다. 아무리 꿈일지라도 남자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건 사실 자신과는 맞지 않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요약하자면 '내 얼굴을 바탕으로 여자 캐릭터가 만들어지니까 못생겼고, 호감도 역시 남자 캐릭터의 호감도만 높아진다.'는 것이었다.
- 젠장... 뭔 꿈이 이래. 됐어. 그냥 남자
그러자 꿈의 목소리는 다행이라는 듯이 '남자 맞습니까?'라는 확인도 없이 '남자'라는 것을 눈앞에 띄웠다.
- 직업을 고르십시오. 직업은 기사, 마법사, 궁수, 드워프, 오크, 상인, 농부, 대장장이, 궁중 악사, 작가, 바드....
꿈의 목소리는 재현이 알고 있는 거의 모든 직업을 말했다. 하지만 이건 꿈이었다. 재현은 평소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것을 선택했다.
- 다 필요 없고. 돈 많은 백수
재현은 꿈에서조차 싸우고, 일하고, 지키고 뭐 그러고 싶지 않았다. 돈 많은 백수. 얼마나 좋은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맘대로 할 수 있는 백수란 직업. 더군다나 돈까지 많으면 이 얼마나 좋은 일이냐 이거다. 그러자 꿈의 목소리가 이상해졌다.
- 그런 지이익어어업으으으으은 어어어어어어없스스스스스스습....
말소리가 점점 느려지더니 눈앞에 하얀 설원이 펼쳐져 있었다. 재현은 자신의 몸을 살펴보았다. 누더기만 입은 완전 상거지 꼴이었다.
- 이런 썅. 내가 백수랬지. 거지라고 그랬냐? 돈 많은 백수!
그 순간 몸이 으슬으슬 추웠다. 분명 꿈인데 마치 사실처럼 추웠다. 그도 그럴 것이 온통 설원인데, 누더기 하나만 걸치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 때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렸다.
- 이거 완전 개꿈이구만. 에에취...
아까 말소리가 들릴 때만 해도 자신이 상상한 대로 뭐든지 될 것만 같았는데, 이렇게 춥고 배고프고 누더기만 입은 거지 꿈일 줄은 몰랐다.
- 에에취... 근데 이 꿈은 언제 깨지? 이런 젠장... 방법을 모르잖아. 근데... 언제 꿈에서 깨어날 때 생각하고 깨어났나?
재현은 일단 꿈에서 깰 때까지 피할 곳을 찾았다. 어쩌면 이러다가 꿈에서 죽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괴로웠다.
지금이라도 꿈에서 깨어 따뜻한 방에 누워 있고 싶었다. 재현은 끝없이 펼쳐진 눈밭 위를 걷고 또 걸었다. 그러자 몸에서 열이 나며 추위가 좀 가시는 듯 했다. 그 때 눈앞에 메시지 창이 하나 떴다.
추위에 대한 내성 스킬인 방한(防寒) 스킬이 생성되었습니다. 추운 눈밭을 아무 장비 없이 한 시간 이상 걸었을 때 생기는 스킬입니다.
방한(Not Cold) : blv. 1
방한 스킬을 올리기 위해서는 더 강한 추위와 싸우시면 됩니다.
마스터 레벨 : mlv. 50
- 이게 뭐야? 이건 뭐 꿈이 아니라 게임이잖아. 뭔 이런 염병할 꿈이 다 있어.
재현은 그깟 레벨 따위엔 관심이 없었다. 다만 아까보다 추위가 좀 덜한 것만으로도 살만 했다. 그러나 추위가 조금 사라지자 무섭게 배고픔이 몰려왔다.
- 꼬르르르르르륵.
배에서 나는 소리 경연 대회였으면 1등이었으리라. 배가 너무 고프다 못해 속이 쓰렸다. 재현은 자신도 모르게 주머니를 뒤졌다.
신경을 쓰지 않았을 때는 몰랐는데, 주머니가 불룩했다. 혹시 먹을 것인가 하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차가운 무언가가 손끝에 닿았다.
- 이게 뭐지?
재현은 주머니에 있던 물건을 밖으로 꺼냈다. 그 물건을 보고 깜짝 놀랐으나 그 순간 욕이 터져 나왔다.
- 이런. 우라질. 이런 눈밭에서 주먹만 한 다이아몬드가 뭔 소용이야. 차라리 주먹밥이나 들어있지.
그리고는 다이아몬드를 눈 바닥에 던졌다. 그랬다가 얼른 달려가 다시 주웠다.
- 아. 현실에서 이런 다이아몬드 하나가 주머니에 있었다면야 이런 추위쯤은 견디고 갔을 텐데... 어차피 꿈이잖아. 에이 젠장. 꿈이라고는.
다이아몬드를 주머니에 넣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꿈일지라도 여기서 자신이 죽으면 나중에 자신을 발견한 놈은 엄청난 횡재를 놈일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투덜거렸다.
- 아... 배고파서 더는 못 가!
재현은 그 자리에 털썩 앉았다. 젠장, 눈 속에 먹을 게 있을 리 만무했다. 걸어오면서 목마를 때마다 눈을 안 움큼씩 먹어서 입 주변도 이미 얼얼하게 얼어 있었다.
재현은 그 자리에 누웠다. 하늘에는 내 머리 위로 쏟아질 것처럼 많은 별이 떠 있었다.
- 밤이어어?
입이 얼었는지 말이 이상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이상한 건 눈밭을 걸어오면서 한 번도 어둡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재현은 옆의 눈을 손으로 떠서 입에 넣었다. 차가운 얼음이 입 안으로 들어가자 스르르 녹아 물이 되어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재현은 이대로 꿈에서 깰 때까지 누워 있을 생각이었다.
띠링. 방한 레벨이 올랐습니다. 추위에 좀 더 강해집니다.
방한 레벨 : blv.2
재현은 아까부터 이 메시지 창이 몹시 신경 쓰였다. 도대체 꿈에 왜 메시지 창이 뜨는 것이냔 말이다. 재현은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그냥 허공에 외쳤다.
- 어이! 이게 뭐야? 꿈이면 이젠 그만 깨고.
아무 반응이 없었다.
- 내가 미쳐 가나? 꿈에서 이런 헛짓거리라니.
하고 입을 다물었다. 재현은 자리에 누운 채 곰곰이 생각을 했다.
'이게 게임일 리는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게임은 본 적이 없었으니까. 게임은 게임을 조종할 수 있는 기계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패드건 스틱이건 키보드건 마우스건 간에 말이다. 자신이 살아 움직이는 게임이라니. 이건 말이 안 된다.
앞으로 100년 후에나 가능한 일이지. 그리고 설혹 이게 게임이라면 하는 법이라도 알려줘야지. 그냥 눈밭에 사람을 내동댕이치는 게임이 세상에 어디 있느냔 말이다. 시작하자마자 죽으란 얘기잖아. 이래서 누가 게임을 하냐?'
머릿속으로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보았지만 결론은 이건 꿈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지독한 개꿈.
- 이건 개꿈일 거야. 악몽은 아니야. 아직 무서운 것들은 안 나왔으니까....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바닥이 쿵쿵 울리기 시작했다. 재현은 이건 또 뭔가 싶어 고개를 들었다. 흰 눈 사이로 뭔가 거대한 것이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 뭐지?
재현은 눈을 모아 최대한 멀리 보려고 했다. 그런데 자신의 눈에 보이는 건 거대한 기둥뿐이었다.
- 설마 저 기둥이 움직이는 건 아니겠지?
그러나 항상 설마는 사람을 잡는다. 그 기둥은 움직이는 것이었고, 그것도 곧장 재현이 누워 있는 자리 쪽으로 오는 것이었다.
- 으.. 으악
재현은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며 기둥 반대편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눈밭에 뒹굴게 되었다.
재현이 도망친 곳은 아까 힘겹게 오르던 언덕이었다. 그 언덕을 몇 번이나 미끄러져 내려오면서 포기하려도 했지만, 왠지 이 언덕을 넘어야 살 길이 생길 것 같아 이를 악물고 오른 언덕이었다.
그 언덕을 오르기 위해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싶어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사는 게 우선이었기에 언덕 아래로 내달렸다.
그러다가 발을 헛디뎠는지 그 자리에서 고꾸라져 언덕을 뒹굴며 내려왔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았다. 바닥을 마구 돌다가 어느 순간에 멈추자 만화처럼 재현의 몸은 눈 안에 갇혀 있었다. 그리고는 누군가의 장난처럼 메시지 창이 떴다.
눈사람 되기 스킬인 설인(Snow man) 스킬을 배웠습니다. 설인 스킬은 온몸이 눈에 뒤덮여 있으나 정신을 차리고 있을 때 생성됩니다.
설인(Snow Man) : blv.1
설인 스킬을 높이기 위해서는 더 그럴듯한 눈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마스터 레벨 : mlv. 50
- 이게 장난하나?
재현은 화가 나서 소리를 버럭 지르며 눈을 털어냈다. 뭐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다 있냐 싶었다. 그래서 화가 난 나머지 옆에 있는 나무를 한 번 걷어찼다.
- 이런 우라질.
그 순간 발이 몹시 아팠다. 그도 그럴 것이 눈에 꽁꽁 언 발로 겨울 나목을 걷어찼으니.
그런데 그 순간 겨울 나목이 움직였다. 재현은 그걸 보고는 순간 얼어붙었다. 이것은 아까 봤던 기둥.
'설마 내 발길질이 아프기야 하겠어.'하고 생각한 순간 기둥에서 초록색 액체가 흐르는 것이 보였다.
- 저게 뭐지?
하고 자신의 발을 보았을 때 재현은 깜짝 놀랐다. 발 앞에도 초록색 액체가 묻어 있었다.
- 이거 뭐... 뭐야? 피... 피는 아니지?
혼자 생각했을 때 갑자기 기둥 위에서 거대한 포효 소리가 들렸다. 재현은 귀를 막고 허리를 숙였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고막이 터지는 것 같았다. 그 순간 그 소리는 거대한 돌개바람이 되어 재현에게 날아왔고, 재현은 그 자리에서 한참을 날아갔다.
재현의 몸이 붕 뜨는 것처럼 느껴지더니 어느 순간 눈밭에 내팽개쳐져 있었다. 재현은 실눈을 뜨고 자신이 날아온 쪽을 보았다.
희뿌연 눈보라 사이에 거대한 무언가가 있었고, 그 사이에서 붉은 눈이 보였다. 순간 무서운 생각이 들었지만,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스르르 눈이 감겼다.
'꿈속에서 죽다니... 재수 더럽게 없네.'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재현은 의식을 잃었다.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연재 재개 공지 사항
안녕하세요. 글쟁이 구라도사입니다.
2016년 새해 인사를 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두 달이 훌쩍 지나버렸네요. 시간이 빠르다고는 하지만 요즘 같이 빨라서는 내일 일어나면 할아버지가 되어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답니다.
현재 에피소드 3의 집필이 90% 정도 완료되었습니다. 현재 챕터 10을 쓰고 있으니까요. 저는 약간 편집증적인 경향이 있는지 챕터는 꼭 10으로 끝내고 싶더라구요. 원래는 모든 챕터를 9에서 끝내고 싶었는데, 첫 단추를 10으로 끼워서 나머지도 그렇게 맞추고 있답니다.
아무튼 집필은 90% 정도 되었지만, 전혀 퇴고가 되지 않은 상태입니다.(물론 다른 글들도 퇴고를 한다고 했지만 오타와 비문은 여전히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지만요.) 조만간 에피소드 3 집필이 끝나겠죠. 제가 많이 게으르지만 않다면 말입니다.
연재는 3월부터라고 했는데, 2월 29일부터 시작할까 합니다. 2월 29일은 4년마다 한 번씩 오는, 100년을 살아도 스물다섯 번밖에 못 겪는 날이잖아요. 물론 그런 것에 의미 부여를 하기엔 저나 사회가 너무 타락하긴 했지만, 그래도 왠지 뭔가 있어 보이니까요. 하하하.
그리고 2월 29일을 기점으로 베스트리그에 저의 또다른 졸작 '닥터 프로이트 보고서'가 올라오거든요.
닥터 프로이트 보고서는 '자유 연재' 방식으로 연재할 수밖에 없는 소설이고(단편들이기 때문이죠.) 축계는 다시 '일일 연재' 방식으로 연재를 할 예정입니다
하나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놈이 두 개나 하려니 참 난감한 상황이랍니다. 이런 와중에 또다른 글을 쓰고 싶어서 기웃거리고 있다니 저란 놈은 정말 대책이 없어 보입니다.
각설하고 연재 재개일과 연재 방법은 가급적이면 꼭 지키려고 합니다. 독자님들과의 약속이기 이전에 저와의 약속이니까요.
모쪼록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리며, 요즘 독감이 유행이라는데 감기 조심하세요. 무엇보다 건강이 우선이니까요.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