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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계(逐界)-쫓겨난 이들의 세계-284화 (284/309)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축계 Pilot - 10. 감춰진 음모(2)

석호는 성경을 가져다가 한장 한장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아무런 정보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최 베드로 신부가 준 성경은 그저 낡은 성경일 뿐이었다. 혹시 성경 구절에 정보가 있을까 하고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을 했지만, 아무런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다만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읽을 때마다 예전에 최 베드로가 자신을 가르치면서 얼마나 큰 깨달음을 주었는지를 깨달았다.

그간 석호는 바쁘다는 핑계로, 성경은 이미 지겹도록 읽었다는 핑계로, 그리고 성경은 모두 외우고 있다는 핑계로 성경을 읽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이 그간 외우느라 지겹다고 느꼈던 성경 구절이 하나하나 소중하게 느껴졌다. 특히 최 베드로의 따뜻한 손길이 느껴지는 성경을 보자 석호는 말할 수 없는 포근함에 사로잡혔다.

- 장 신부님. 요즘 들어 성경을 자주 읽으십니다.

석호가 성경을 읽을 때 수도사 한 명이 석호에게 말을 걸었다. 석호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 요새 들어 성경을 읽으면서 새로운 걸 많이 깨닫게 됩니다. 이런 게 불교에서 말하는 돈오인가 봅니다.

석호의 말에 수도사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 성경을 읽으시면서 불교에 귀의하시겠습니다. 하하하.

- 하하. 그런가요?

석호와 수도사 농담처럼 얘기를 나누다가 수도사가 한 마디를 했다.

- 낡은 성경인데 성경이라는 글씨는 깨끗하군요. 평소 '성경'을 많이 아끼셨나봅니다.

수도사의 농담 섞인 말에 석호는 책을 돌려 표지의 글자들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다른 글자보다 '성경'이라는 글자만 다른 것보다 약간 덜 닳았을 뿐이었다.

- 표지 갈이를...

석호는 그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그저 무심히 보았을 때는 손때 묻은 성경일 뿐이었지만, 책장들과 성경의 표지는 묘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 감사합니다.

석호의 뜬금없는 인사에 수도사는 어리둥절했지만, 부리나케 서둘러 석호가 가는 바람에 수도사는 아무런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석호는 자신의 사무실로 와서 표지 부분을 꼼꼼히 살폈다. 잘 살펴보니 표지 옆 부분에 미세한 흔적이 보였다.

그것은 세월의 흔적에 의해 낡은 것이 아니라 무언가 날카로운 것에 의해 잘렸다가 다시 붙인 흔적이었다. 석호는 성경을 들어 불빛에 비춰보았다.

그리고 서랍을 열어 칼을 꺼내 그 흔적을 따라 다시 그으려고 했다. 그 순간 석호는 자기가 평소에 들었던 성경보다 아주 조금 무겁다는 것을 느꼈다.

그냥 들기에는 큰 차이가 없었기에 석호와 같이 민감한 사람이라도 쉽게 알아차리기 힘들었던 것이다.

더욱이 성경을 읽어 보아야 한다는 생각만 했던 석호는 그 무게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표지를 자세히 살펴보고, 들어보면서 뭔가 조금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 것이었다. 석호는 칼을 멈췄다.

- 꼼꼼하신 분이로군.

석호는 그 순간 자신의 이마를 툭 쳤다. 만약 칼로 그 흔적을 그었다면 최 베드로 신부가 남겨준 유일한 증거를 날릴 뻔했던 것이다.

석호는 다시 책 표지를 잘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잘 살펴보면서 성경 안쪽에 박음질되어 있는 실밥을 하나씩 뜯기 시작했다.

미세하게 힘을 주어 자르다가 무언가 걸리는 것이 있어서 석호는 잠깐 멈추었다. 그리고 성경을 살짝 들었다. 그리고 플래시를 켜서 좁은 틈을 보았다.

성경 테두리로 얇은 유리관이 연결되어 있었다. 석호는 유리관이 테두리에만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칼을 들어 과감하게 가운데를 그었다.

그러자 얇은 알루미늄 판이 나왔다. 석호는 알루미늄 판을 다시 칼로 천천히 그었다.

그러자 알루미늄 판이 벗겨지더니 보통 명함 크기보다 작은 명함 한 장이 툭 떨어졌다. 석호는 그 명함을 들었다.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금박 명함이었다.

- 공인중개사 김동열?

석호는 휴대 전화를 꺼내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웬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 혹시 김동열 씨 핸드폰인가요?

- 네? 잘못 거셨습니다.

- 아! 죄송합니다.

석호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김동열이라는 사람이 그 번호를 썼다가 다른 번호를 쓰는 것인지, 아니면 원래 김동열의 전화번호가 아니었는지.

그가 최 베드로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는지 아니면 그들과 연결되어 있는지. 아무리 생각을 해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석호는 명함을 훑어보았다.

- 명함 한 번 튼튼하군.

석호는 명함을 들어 빛에 비춰보았다. 무지개 빛깔이 뒷면에서 보였다.

- 뭐 이렇게 명함에 공을 들였어.

그러면서 무지개 빛깔을 보면서 마치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가 석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는 구석에 놓인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는 명함 가운데에 구멍을 뚫어 CD롬에 꽂아 넣었다. CD롬을 밀어 넣자 윙하며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화면에 탐색기가 떴다.

그 안에는 놀랍게도 반라의 여자 사진과 포르노로 보이는 영상 파일만 보였다. 석호는 얼굴을 붉히며, 화면에서 고개를 돌렸다.

최 베드로 신부의 성경에서 발견한 것은 결국 여자 사진이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석호는 그게 전부는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그 분의 인격이라면 자신이 비난을 받더라도 더 큰 일을 위해 그런 희생쯤이야 감수할 것이라고 여겼다.

만약 이 성경을 입수한 누군가가 여기까지 알아냈더라도 다만 변태 같은 신부가 남들 모르게 이런 걸 감춰뒀으리라고 생각하게 하기 위해 그런 것이라고 석호는 믿었다.

그리고 여자 사진과 포르노를 뚫어지게 보았다. 그러나 그 안에서 역시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단지 이것을 자신에게 주기 위해 성경을 건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순간 석호는 피식 웃었다.

그 사진 중에서 한 여자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바티칸에서 한창 컴퓨터를 배울 때였다. 이런 저런 기본적인 것을 배웠지만, 이미 여러 책들을 통해 먼저 공부했던 석호는 따분할 뿐이었다.

바티칸에 있는 도서관에서 찾은 해킹 책들을 탐독한 석호는 친구들이 기본적인 것들을 공부할 때, 책에서 읽은 내용을 실험해 보곤 하였다.

그러다가 우연히 컴퓨터를 가르치는 수도사 컴퓨터 패스워드를 풀었다. 순간 석호는 가슴이 몹시 뛰었다.

책에서만 보던 것을 직접 해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항상 다른 사람들보다 컴퓨터는 더 많이 아는 것처럼 자랑하는 수도사의 컴퓨터의 암호를 풀었기 때문이었다.

석호는 수도사에게 들키지 않게 이 폴더, 저 폴더를 열람하다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다.

- 헉...

아이들에게 문서 작성 요령을 알려주던 수도사는 석호의 반응에 석호 쪽으로 다가왔다. 다른 친구들도 석호를 보다가 석호의 화면을 보고는 흠칫 놀랐다.

수도사는 석호 자리에 왔고, 석호의 화면을 보자 얼굴이 벌겋게 되면서 마구 소리쳤다.

- 여기서 나가! 개자식아!

석호는 화면에서 본 영상의 충격으로 인해 멍하니 있다가 수도사의 외침에 정신을 차리고 밖으로 나왔다.

석호가 밖으로 나오자 안에서는 컴퓨터를 마구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 영문을 모르는 아이들은 모두 석호가 수도사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포르노를 보았다는 것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석호는 자신의 방으로 가면서 자신이 저지른 일로 인해 쫓겨나지나 않을까 걱정을 했다. 그러나 그날 저녁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석호는 더욱 불안했다. 그러다가 석호는 이내 고개를 끄떡였다.

- 수도사님은 어쩌지 못할 거야. 본인 컴퓨터에서 나온 거니까.

석호는 마음 한 편으로 안심을 했다. 그러나 정작 일이 터진 건 며칠 후였다. 석호의 모니터를 본 몇 몇 학생들이 신부들에게 말을 하였고, 최 베드로는 그 말을 전해 듣자마자 석호를 방으로 불렀다.

- 너! 컴퓨터 시간에 포르노를 봤니?

그는 한국어로 석호에게 물었고, 석호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석호는 큰 죄를 지은 죄인처럼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 네.

최 베드로는 낮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했다.

- 지금 신부님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하다. 널 파문할 것인지, 아니면 젊은이의 실수인지를 판단하기 위해.

- 네. 죄송합니다.

- 그런데 하나만 묻자. 인터넷도 안 되는 컴퓨터에서 어떻게 본 거지?

사실 신부들 사이에서 말이 오가고 있는 것은 석호가 포르노를 봤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그것을 구할 수 있었는가였다. 컴퓨터실에 있는 컴퓨터는 모두 인터넷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 그게... 사실은...

석호는 그에게 솔직하게 대답을 했다. 최 베드로는 심각한 표정으로 석호의 말을 들었다. 그리고는 석호의 어깨를 한 번 두드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어찌 되었건, 넌 잘못된 일을 한 건 분명해. 포르노를 본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비밀을 훔쳐본 일은 아주 잘못된 행동이니까.

최 베드로가 그렇게 얘기를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석호는 최 베드로의 사무실에서 앉아 있었지만, 몸들 바를 몰랐다.

석호는 혼자 덩그러니 사무실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꽤 오랜 시간이 흘러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사위가 어두워졌지만 석호는 그 어두운 방에서 무얼 어떻게 할 지 몰라 우두커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어느새 사방이 어두워졌을 무렵 최 베드로의 방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들어왔다. 방에 들어온 최 베드로는 불을 켜자 바위마냥 멍하게 앉아있는 석호를 보고 깜짝 놀랐다.

- 너, 아직도 있었던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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