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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계(逐界)-쫓겨난 이들의 세계-281화 (281/309)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축계 Pilot - 9. 추악한 복수(1)

9. 추악한 복수

철구는 원룸 앞에 차를 세웠다. 야심한 밤이라 그런지 원룸 앞으로 지나가는 사람이 드물었다.

더욱이 살인 사건일 일어난 곳이라는 소문 때문인지 원룸 곳곳에 불이 꺼져 있었다. 철구는 원룸을 올려다보다가 의자로 뒤로 젖히고 누웠다.

잠복근무가 일상이었던 시절을 떠올렸다. 박 형사와 함께 처음 살인 사건 용의자 집 앞에서 잠복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젠 그 때의 두근거림 따윈 없었다.

아니 어떤 위험한 일일지라도, 고통스러운 일일지라도 두려움 따위는 생기지 않았다. 다만 이 모든 일이 끝나기 전에 죽으면 안 된다는 사명감만이 있었다.

의자에 누워도 잠이 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차 옆 캐비닛을 열었다. 박 형사와 같이 찍은 사진이 보였다. 그리고 뒤에는 아내의 머리핀과 사진이 보였다. 철구는 조그맣게 말했다.

- 기다려. 다 처리하고 금방 갈게.

새벽이 되자 건물 주인은 아침 운동을 위해 밖으로 나갔다. 철구는 건물 주인이 밖으로 멀리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차에서 내려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는 주변을 한 번 두리번거리더니 아무렇지 않게 원룸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계단을 통해 가장 위층에 있는 건물 주인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갔던 철구는 밝아오는 태양빛이 커튼 사이로 비추는 사이에서 빙그레 웃었다.

- 빙고.

건물 주인은 투덜거리며 원룸 입구로 들어왔다. 그러더니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들으라는 듯이 크게 소리쳤다.

- 그 죽일 놈을 빨리 잡아야 이걸 떼던가 하지. 이런 젠장.

건물 주인은 옐로 테이프가 붙어 있는 쪽을 보다가 떨어진 테이프를 다시 제대로 붙이고는 손바닥으로 탁탁 쳤다. 그리고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던 건물 주인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 당신! 뭐야?

그러자 철구는 여유롭게 손짓을 하며 소파를 손으로 탁탁 쳤다.

- 우선 앉으시죠.

그러자 건물 주인은 버럭 화를 내며 소리 질렀다.

- 넌 지난 번 왔던 심부름센터? 왜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와서... 너! 경찰 부를 거야.

그러면서 전화기를 꺼냈다. 그러자 철구는 웃으며 말했다.

- 경찰은 나도 부를 거니까 그전에 좀 앉아보슈.

- 너 이 자식!!

건물 주인은 돌아서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뒤에서 툭 던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 아드님의 사고 소식을 들었을 때 충격이 크셨겠죠?

그러자 건물 주인은 흠칫 놀라며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 내.. 내 아들은 미국에 있어! 죽다니.. 뭔 개소리야?

- 후후. 앉아 보슈. 할 말이 많으니까. 들어보시고 판단하시죠. 없는 아들 팔지 말고.

건물 주인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철구를 쏘아보며 말했다.

- 어떤 개소리인지 들어나 보지

- 개소리인지 아닌지는 좀 있으면 알겠죠.

철구는 건물 주인이 자리에 앉자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 당신은 지하실 시체의 살해자입니다. 맞죠?

- 뭐라고? 이게 어디서 미친 소리야!

건물 주인은 벌떡 일어나며 철구의 멱살을 잡으려 했다. 철구는 그런 건물 주인의 손길을 가뿐히 물리치고 말을 이었다.

- 20XX년 7월 18일 경찰로부터 당신 아들이 사망했다는 통보를 받았죠. 처음에는 단순한 사고인줄 알았지만, 어떤 근거를 통해 뭔가 더 있다는 걸 알게 되었죠. 그리고는 사건에 대한 근거를 통해 가해자인 김효정 씨를 찾아냈죠.

넘어져 있던 건물 주인은 철구를 비웃으며 말했다.

- 젠장.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그런 걸 알 수 있겠어!

철구는 고개를 저었다.

- 당신은 충분히 알 수 있죠. 서울 지방 법원 조사관실에서 장기 근무하셨으니까. 그런 정보에 접근하기는 매우 수월하셨겠지요.

- 그냥 그것만 가지고 내가 범인이라고? 미친놈.

- 아뇨. 증거가 있습니다. 당신은 분명 피해자를 모른다고 하셨죠. 하지만, 피해자의 전화 통화 기록을 살펴보니 죽기 얼마 전에 당신과 통화한 적이 있더군요.

- 겨우 그걸로 나를 옭아 맬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우습군.

그런데 그 때 갑자기 스크린으로 영사기의 빛이 투사되었다. 챠르르하는 소리와 함께 벽에는 입에 재갈이 물린 채 전기톱에 의해 팔이 잘리고 있는 김효정의 모습이 보였다.

영사기에서 투사된 화면만 보일 뿐,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처참한 모습에 비명 소리가 여전히 귓가에 들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 내 짐작은 했었지. 당신 같은 사이코들은 살해 현장을 보존하려 노력하지. 그걸 보며 자신의 잘못을 되새기기보다 복수를 곱씹곤 하지. 당신 같은 인간을 난 여러 번 봐서 알고 있지. 이젠 빼도 박도 못하겠군.

건물 주인은 멍하니 화면을 쳐다보았다. 철구는 건물 주인을 매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 20XX년 8월 12일. 당신은 이 비디오를 김효정의 부모에게 보냈어. 그리고 김효정의 어머니는 자살을 했고, 그 아버지는 미쳐버렸지. 이게 무슨 소리인지 알아? 그건 니 놈이 악마란 거야!! 이 개새끼야!!!

멍하니 화면을 보던 건물 주인은 갑자기 파안대소(破顔大笑)를 했다.

- 이것 봐. 이 년이 다리 잘릴 때... 난 지금이.. 지금이 제일 좋아.

그러다가 갑자기 정색을 하면서 말했다.

- 내가 악마라고? 난 악마가 아니야. 난 아직도 내 손에 쥐었던 그 조그만 핏덩이의 느낌을 기억해. 그 년의 엄마가 자살했다고? 하하하. 당연하지. 내 마누라도.. 내 마누라도...

철구는 그런 건물 주인을 보면서 주먹을 쥐었다.

- 넌 해서는 안 될 짓을 한 살인마야!

- 나.. 나랑 마누라랑 살아가는 이유가 바로 내 아들 때문이었어. 첫째가 병으로 죽고... 그 아이 뿐이었어... 그 아이... 열일곱... 그 아이는 겨우 열일곱이었어!

건물 주인은 아들의 기억이 떠올랐는지 입술을 강하게 물었다. 그의 입술에서는 섬뜩한 붉은 빛의 피가 흘렀다. 건물 주인은 분노의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사고가 있다고 했지... 맨발로 달려갔어. 눈앞에 흰 천이... 그리고 바닥에... 그 피... 열일곱 살짜리 몸에서 나온... 그 조그만 놈에서 나온 피가 엄청났어. 그리고.... 구석에 버려진 우리 아가 손... 경찰들은 기차에 치어 죽었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 개새끼들...

건물 주인은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채 말을 이어갔다.

- 우리 애기가 산산조각 나 있었지. 경찰들이 붙잡는데... 나는 봐야 했어. 우리 아들을. 천을 들춰보니까... 덜렁 다리 두 개만... 그런데... 다리 아래에 긁혀 있는 상처가 보였지. 그래서 경찰한테... 이게 뭐냐.. 이 긁힌 상처가 뭐냐... 붙잡고 물었는데... 아무 말도 없더군... 그 애기가 조깅하다가 철도에 치어 죽을 만큼... 난 단순한 사고가 아니란 걸 알았지. 그건 내 아들이 자기의 복수를 기다렸다고 생각했지. 사고 장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나뭇가지 하나가 부러져 있더군. 그리고.. 그 뒤에 노란색 페인트가 묻어 있는 헤드라이트 파편을 하나 발견했지. 그 다음에 수소문해 보니까... 노란색 아반테.. 노란색 아반테는 얼마 없지. 맞아.. 당신 말대로 법원 직원이었던 나에게 사람 하나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지. 김효정. 그 년이었지. 그 년이 내 아들을 죽게 한 거였어...

철구는 건물 주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건물 주인은 또다시 분노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처음처럼 이성을 놓은 것이 아닌 냉정한 표정이었다. 그리고는 살짝 웃는 표정까지 지었다.

- 그 년을 알고 나니까 그 다음은 쉬웠지. 집 앞에서 납치하고, 자네가 보듯이 저렇게 되었지.

벽에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화면에 김효정은 눈물을 흘리며, 입으로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 용서해 주세요. 일부러 죽인 게 아니에요. 잘못했어요.

그 모습을 건물 주인과 철구가 쳐다보았다. 건물 주인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는 벽을 향해 달려들며 소리쳤다.

- 저 년은 용서할 수는 없었어. 그건 나의 의무였으니까. 사정한다고 봐 줄 수 있는 게 아니었지.

화면은 어느새 그가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톱을 꺼내드는 장면으로 바뀌었다. 눈이 커지며 자신의 몸이 잘려나가는 모습을 고통스럽게 보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 이 집 지하에 묻었지. 그리고 건물을 올렸어. 다 끝난 일이었는데..

- 왜 김효정 부모에게 이걸 보냈지?

철구의 말에 건물 주인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 정의란 말야. 상대적인 개념이지. 인간이 만든 최초의 정의가 뭔 줄 알아? 그건 바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거지. 바로 복수야. 내가 아파하고, 내 마누라가 목숨을 내던질 만큼 아팠으니까 그년 부모도 똑같이 겪어야 하지.

- 미친 새끼.

철구는 분노에 찬 눈으로 주인을 쳐다보았다.

- 날 악마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난 정의로운 사람인 거야.

- 완전 미친 놈이구만.

그러자 건물 주인은 철구를 비웃듯이 쳐다보았다.

- 맞아. 난 미친놈이지. 아들이 죽고 난 다음에 난 제 정신이 아니었으니까. 사실 그 때 정신병원에 있었지. 솔직히 내가 절대 잡히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잡히더라도 감방이 아닌 병원일거라 생각하고 있지.

철구는 냉정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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