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축계 Pilot - 8. 악몽의 끝(5)
석호는 헉헉거리며 일어났다. 이대로 가다가는 자신이 먼저 지칠 것 같았다. 남자 역시 대충 그런 눈초리로 석호를 보았다.
체력에 있어선 남자가 석호보다 우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 지쳤군. 당신 같은 실력자라면 내가 이 일이 끝나는 대로 추천을 해 주지.
남자는 석호의 실력에 나름 감탄을 하며 석호에게 제안을 하였다. 그는 석호가 신부인 줄은 모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 나도 나름대로 할 일이 많아서.
하지만 석호 역시 그의 말에 지지 않고 대꾸를 하였다.
- 우습군.
석호는 그 남자를 쳐다보다가 먼저 공격하였다. 석호의 공격에 남자는 비웃으며 몸을 피했다.
이번에도 석호가 자신의 목덜미를 노리듯이 달려들었기 때문에 남자는 목을 뒤로 빼고 주먹을 날렸다.
석호는 갑자기 몸을 틀어 주먹으로 인중을 가격했다. 남자는 급작스러운 공격에 얼굴을 피하려했지만, 석호의 주먹을 피할 수 없었다.
남자는 인중에 석호의 주먹을 맞고 정신을 살짝 잃듯 비틀거렸다.
- 윽.
석호는 비틀거리는 남자의 옆으로 다가가 석호는 목덜미를 내려쳤다. 그러자 그 남자는 놀란 표정으로 석호를 쳐다보았다. 석호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 나도 바쁘다니까.
남자가 쓰러져 기절하였다. 석호는 남자의 주머니를 뒤져보았다. 안에서 휴대폰과 같이 생긴 무전기가 나왔다. 그리고 키홀더 하나가 있었다.
석호는 키홀더를 보며 이거다 싶었다. 석호는 앞에 쓰러져 있는 오토바이로 가서 오토바이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열쇠를 꽂고 시동을 걸었다.
'부르릉'
석호는 뒤에 쓰러져 있는 남자를 놔두고 오토바이에 올라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이정표를 보며 서울 방향을 향해 나갔다.
그때 석호가 들고 있는 무전기에서 소리가 들렸다.
- 감마. 상황 보고.
- 추적 중. 시그마가 근접 거리에서 추적하고 있음.
- 시그마. 상황 보고.
석호는 자신의 무전기로 들리는 소리를 듣고만 있었다. 오토바이 운전에 서툰 석호는 무전기로 얘기할 여력이 없었다.
- 시그마. 상황 보고.
무전기에서 얘기가 들렸지만, 석호는 그대로 놔두었다.
- 델타, 감마. 시그마 위치 추적하여 그 곳으로 가길 바람. 5분 이내로 보고 바람.
- 굿.
- 굿.
그런 후 무전기가 조용해졌다. 석호는 계속 속도를 내며 달렸다. 그러다가 한 5분쯤 지나자 무선으로 얘기가 들렸다.
- 여기는 델타. 시그마 당함.
- 뭐야?
상대방은 그 말에 당황한 것 같았다. 그리고는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 마에스트로! 퍼핏(puppet) 추적 멈추고, 시그마 장비 추적 요망!
그러자 마에스트로라 불린 사람의 목소리가 기계음으로 들려왔다.
- 굿!
석호는 '퍼핏'이라는 말에 깜짝 놀랐다.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자신은 대장의 해커명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에스트로라고 불리는 사람이 추적하고 있는 것은 '대장'이었다. 한시바삐 대장에게 알려야 했다. 석호가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소리가 들려왔다.
- 과천 초등학교 근처
석호는 달리던 중 주위를 돌아보았다. 앞에 초등학교 하나가 보였다.
- 이런...
석호는 그 말을 듣고 오토바이의 방향을 틀었다.
- 우회전 중. 부림교 사거리 방향.
그렇게 방향을 알려주다가 갑자기 석호에게 말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 그렇게 열심히 달려봤자 소용없다! 난 널 위에서 다 보고 있으니까.
석호는 무전기에서 나는 소리를 듣다가 오토바이를 세웠다. 그리고는 무전기에 비웃으며 말했다.
- 좋은 정보 고맙다!
석호는 그 말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오토바이를 끌고 근처의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오토바이를 세우고 무전기를 그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잰걸음으로 아파트 단지 밖을 빠져나왔다. 마에스트로는 시그마의 장비에 있는 GPS를 이용하여 자신을 파악하고 있음을 알았다.
석호는 전에 왔던 기억을 되살려 근처에 '과천 성당'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석호는 그들이 신속하게 행동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과천 성당까지 재빨리 뛰었다. 그리고 사제관 쪽으로 갔다.
- 박 신부님!
석호가 흰머리가 성성한 신부 하나를 부르자 그는 고개를 돌려 석호를 보았다.
- 오! 장 신부. 그런데 모습이...
석호는 겸연쩍은 듯이 머리를 긁었다.
- 일단 안으로 드시게. 자네가 하는 일이야 나도 얘기를 들어서 알고 있지만, 고생이 많구만.
박 신부는 석호를 사제관 안으로 들게 했다. 평소 철저한 금욕 생활을 하는 박 신부의 사제관은 소박하기 그지없었다.
안으로 들어가 오래된 소파에 앉아 박 신부는 차를 한 잔 내왔다.
- 그래. 여긴 어쩐 일로...
석호는 박 신부에게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을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다. 더욱이 최 베드로 신부에 대한 얘기는 더더욱 할 수는 없었다.
이미 노령인 박 신부은 최 베드로 신부와 오랜 친구 관계였다. 서로 나이 차이가 스무 살 이상 났지만, 박 신부는 여전히 최 베드로 신부를 존경했고, 그를 여전히 최고의 사제로 여기고 있었다.
또한 그런 신부 밑에서 수학(受學)했던 석호에게도 호감을 갖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최 베드로의 죽음, 더 나아가 그것이 '타살'이었음을 말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 죄송합니다. 바티칸에서 받은 일이라..
석호는 대충 그렇게 얼버무렸다. 그러자 박 신부는 천천히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 그렇지. 자네나 최 신부는 바티칸에서 일을 하지. 최 신부는 어디서 뭐하고 있는지 아나?
최 베드로 신부가 파문당한 것을 박 신부 역시 알고 있었다. 박 신부 역시 최 베드로의 행적을 찾고자 노력했으나, 교구에 매인 몸이라 그를 찾아 돌아다닐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최 베드로의 제자인 석호만큼은 그의 소식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기에 그에게 물은 것이었다.
- 저도 잘은 모릅니다. 저도 하루 빨리 찾고 싶습니다.
- 그래. 그렇겠지. 누구보다 자네가 더 찾고 싶겠지.
그러다가 박 신부는 낮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 하느님 품으로 가기 전에 한 번만 보고 싶구만...
박 신부의 말에 석호는 감정이 격해졌다. 그러나 박 신부 앞에서 티를 낼 수 없었다. 석호는 이를 악물고 그 슬픔을 참았다.
- 아 참! 바쁜 사람을 붙잡고 내가 묻고 싶은 것만 물었네.
박 신부는 천천히 고개를 끄떡이다가 석호에게 맑은 눈을 들어 물었다.
- 나를 보러 오신 건 아닐 테고... 무슨 일이신가?
- 사제복이 필요합니다.
- 사제복?
- 네.
박 신부는 옷장으로 가서 사제복을 보았다.
- 다 낡은 것밖에는 없는데...
- 괜찮습니다.
그러자 그 중 가장 상태가 나은 사제복을 하나 꺼내 석호에게 주었다. 석호는 깊이 허리를 숙이며 옷을 받았다.
- 잘 입고 돌려드리겠습니다.
박 신부는 석호의 등을 한 번 툭툭 치며 말했다.
- 안 가져다 줘도 된다네. 내가 앞으로 옷을 입으면 얼마나 입을 테고, 자네같이 바쁜 사람을 사제복 하나 때문에 오라 가라하는 것도 안 될 일이고.
석호는 그 말에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석호의 인사에 박 신부는 인자한 할아버지의 미소를 띠며 말했다.
- 그저 몸조심하게나.
- 네. 알겠습니다.
석호는 박 신부가 준 낡은 사제복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최 베드로 신부가 준 성경을 옆구리에 꼈다.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박 신부는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 자네가 옷 갈아입는 동안 자매님 한 분이 들어오시면서 하는 말씀을 들었네.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양재천 근처에 많이 있다고.
석호는 그 말에 놀라 박 신부를 보았다. 그러나 박 신부는 여전히 할아버지 같은 미소만을 띤 채 말했다.
- 내가 자네랑 좀 더 있으라는 하느님의 선물인가 보네. 내 자매님께는 말씀드려놨으니까 앞에 있는 차를 타고 가면 되네. 나랑 같이 갔다가 올 때는 내가 오면 되니까.
- 그.. 그래도 저 때문에 번거롭게...
- 하느님의 안배라네. 아멘.
박 신부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석호는 박 신부와 함께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시동을 걸고 출발하여 도로로 빠져 나오자 양복을 입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경찰들도 양재천 근처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도로 앞에는 경찰들이 차를 세워가며 검문을 하고 있었다. 석호는 순간 당황했다. 그러나 박 신부는 느긋한 표정으로 말했다.
-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자네는 가만히 있게.
앞에 있는 경찰 하나가 차를 세웠다. 석호가 창문을 내리자 경찰 하나가 다가와 경례를 하며 말했다.
- 도주자를 찾고 있습니다. 잠시 협조 부탁드립니다.
그러다가 옆에 앉은 박 신부를 보더니 경찰이 꾸벅 인사를 했다.
- 신부님, 어디 가십니까?
- 아! 조 순경이구만. 응. 오늘 명동 성당에 일이 있어서 가네만.
박 신부는 인자한 표정으로 경찰을 향해 눈인사를 했다.
- 그러시군요. 옆에 계신 분은..
- 아! 명동 성당에서 나오신 신부님이라네. 내가 나이도 많고 해서 배려를 해 주셔서.
- 아! 그럼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경찰은 깍듯하게 박 신부에게 인사를 하고 차를 보냈다. 박 신부는 차가 떠나자 조그맣게 기도를 하고는 석호에게 말했다.
- 나도 30년만 젊었으면 자네처럼 멋지게 다녔을 텐데...
석호는 자신 때문에 거짓말을 한 박 신부에게 죄송스러웠다. 박 신부는 그런 석호가 죄책감이 들지 않게 농담처럼 말을 한 것이었다.
- 고맙습니다.
- 고맙긴. 자네가 사람을 죽였다고 해도 난 자네를, 아니 어쩌면 자네의 스승인 최 베드로를 믿기 때문에 어떤 일이라도 감수할 것이라네.
박 신부는 그러더니 스르르 눈을 감고 조용하게 말했다.
- 이 나이가 되면 인생을 정리해 본다네. 정말 중요한 게 무엇인가를.
그러더니 한참을 침묵을 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 자네는 나나 다른 늙은 사람들처럼 후회하는 삶을 살지는 말게나.
그리고는 다시 입을 다물고 잠이 든 것처럼 생각에 잠겼다. 석호는 운전을 하는 동안 박 신부의 말을 곰곰이 곱씹어보았다.
자신이 보았을 때는 훌륭한 사제의 삶을 살아온 박 신부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온다는 것이 이상했다. 석호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자신에게 중요한 일은 이곳에서 벗어나는 것과 그들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는 것, 그리고 대장에게 추적당하고 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석호는 그 생각에 액셀러레이터를 좀 더 세게 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