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축계 Pilot - 7. 한밤의 추격전(3)
세현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지호는 세현을 물끄러미 보며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세현이 나가자 지호는 불안한 마음에 문을 잠갔다. 병실에 혼자 덩그러니 남으니 왠지 조금 무서웠다.
단지 자신이 지하실에서 발견된 시체의 살인범이라는 누명을 벗어볼까 하는 마음으로 그들에게 연락을 했는데, 엉뚱하게도 자신이 거대한 조직의 실험체임을 알게 되자 지호는 마음이 복잡하였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지호는 생각을 가다듬었다.
- 나를 감시했다고? 수술은 실험체가 되기 위한 것이고. 도대체 왜? 내가 뭐길래?
지호는 도저히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 에이 모르겠다. 잠이나 자자.
지호는 오랜만에 푹신한 침대에 눕자 스르르 잠이 왔다. 방에서 나온 세현은 정태에게로 갔다.
정태는 사무실에서 뭔가 심각하게 전화를 받다가 세현이 들어오자 세현에게 눈짓으로 의자에 앉게 했다.
- 네. 한 번 확인해서 다시 연락 주십시오.
정태가 전화를 끊자 세현이 입을 열었다.
- 고마워. 무리한 부탁 들어줘서.
세현의 말에 정태는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는 세현의 손을 잡았다.
- 고맙긴. 아! 그리고 보여줄 게 있어.
정태는 의학 잡지책을 펼쳤다. 세현에게도 배달되어 왔지만, 세현은 그동안 여러 일이 겹치는 바람에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 읽어봤어?
정태의 말에 세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정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잡지책을 펼쳤다.
거기에는 정태가 메모를 해 놓았는지 꼼꼼하게 밑줄이 쳐져 있었다.
- 이게 뭐지?
'Stop cell division ? The Secret of ageing'
세현은 제목을 보는 순간 눈이 커졌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정태를 보았다.
- 빙고! 러시아의 세르게이 박사 논문이야.
- 세르게이 박사? 그 세포 복제 전문가?
- 응. 아주 흥미로운 내용이야. 기존에 네크로호르몬(necrohormone : 살아 있는 세포에 유사분열을 일으키는 죽은 세포에서 유래한 물질)에 반하는 물질에 대한 연구야.
세현은 정태의 말에 잠시 침묵했다. 세르게이 박사는 최근에 대장이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실험체 연구 기관인 '러시아 헥토르 연구소' 소속의 박사였다.
세현은 정태에게 그런 내색을 하지 않은 채 물었다.
- 연구 진행 상황은 어때?
- 아직 실험 중인가 봐. 일차 논문이 나왔으니 조만간 가시적인 성과가 보이겠지.
- 음.
- 걱정 마. 아까 세르게이 박사와 같이 연구하고 있는 박사님과 전화한 거였어.
- 내 얘기를 한 거야?
- 설마!
- 그런데...
정태가 말을 끌었다. 세현은 그런 정태를 보며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 나중에 얘기하려고 했는데, 나온 김에 얘기하지. 뭐.
- 뭔데?
- 나 조만간 러시아로 갈 거야.
- 러시아? 왜? 그 연구소로?
- 응.
세현은 정태의 말을 듣고 화들짝 놀랐다.
- 자기 상태를 고쳐주려면 좀 더 연구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세현은 자신 때문에 병원을 그만 두고 러시아로 가서 세르게이와 같이 연구를 한다는 말에 고마운 한편, 그 연구소의 정체가 실험체를 연구하는 곳임을 알기에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 나 때문에 그러지 않아도 돼.
세현은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말을 했다. 그러자 정태는 손을 한 번 내 저으며 말했다.
- 아직 병원장한테는 얘기 안 했는데, 조만간 얘기해야지. 그리고 나 같은 사람은 환자 보면서 진료하는 것보다 그 쪽이 더 어울려.
- 그래도...
그러자 정태는 자랑스럽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가슴을 한 번 툭 치면서 말했다.
- 내가 고쳐준다고 했잖아. 좀만 기다려 봐. 그리고 당장 가는 거 아니니까.
세현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정태에게 말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 정태 씨. 내 얘기 좀 들어봐.
그러나 정태는 고개를 저었다.
- 벌써 마음먹은 일이고, 세르게이 박사한테는 연락을 했어.
- 그런 게 아니고, 중요한 일이야.
- 중요한 일?
그 때 정태의 핸드폰이 울렸다. 정태는 핸드폰을 슬쩍 보더니 표정이 살짝 굳었다.
- 자기야. 이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하자.
정태는 핸드폰을 들고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 내일 저녁에 시간 되지? 자기 사무실 앞 벨로체에서 보자. 응?
그러더니 세현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혼자 남은 세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정태는 전화를 받으며 빠르게 복도 끝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세현은 그런 정태의 뒷모습을 보고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내일은 꼭 사실을 말하고 붙잡으리라 마음먹었다.
한동안 잠이 들었던 지호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떴다.
사방은 어두웠고, 지호는 자신이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자고 있었던 것을 알았다.
- 이거야 원. 완전히 나이롱 환자구만.
지호는 어둠 속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불을 켜려고 스위치를 찾으려고 했지만 아직 눈이 어둠에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잘 보이지 않았다.
지호는 할 수 없이 그냥 자리에서 일어나서 문 쪽으로 더듬더듬 걸어갔다. 그리고 문을 열자 조그맣게 딸깍하는 소리가 들렸다.
지호는 어두운 복도를 둘러보다가 멀리에 불이 켜져 있는 곳을 발견하고는 그 곳으로 걸었다.
한밤중에 불이 켜진 곳은 간호사실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지호는 푹신하게 깔려있는 카펫 때문에 왠지 몸이 붕붕 뜨는 것처럼 느껴졌다.
- 비싼 병원이라 다르군.
지호가 혼자 중얼거리며 복도 구석 간호사실 쪽으로 다가가자 말소리가 들려왔다.
- 아직 자고 있다고?
- 네. 아까 가서 확인해 보니까 문을 잠그고 자고 있었습니다.
- 음. 그래? 알았어.
지호가 그 말을 들었지만, 별 생각 없이 간호사실로 가기 위해 오른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 때 지호의 눈앞에는 간호사와 몇몇의 사람이 보였다.
자기가 아는 사람이 없자 지호는 몸을 돌려 병실로 가려고 했다. 그 때 간호사실 앞에 서 있던 의사가 지호의 뒷모습을 보고는 소리쳤다.
- 오지호 환자?
지호는 의사의 말에 뒤를 돌아 의사를 보았다. 의사는 지호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 아, 아까 닥터 리한테 얘기는 들었어요.
지호는 그 의사가 말하는 사람이 낮에 봤던 세현의 애인이라던 의사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지호는 미소를 지으며 의사 앞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그 때 그 의사 옆에 서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지호는 그 사람의 눈을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전구를 켜 놓은 듯한 눈이었다. 그 순간 직감적으로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 잠깐 검사할 게 있어서 그런데...
의사가 웃으며 지호에게 말을 걸었다. 지호 역시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생각과는 달리 전구 불빛이 나는 남자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몸을 돌려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의사와 옆에 있던 남자가 지호의 뒤를 따라 뛰기 시작했다.
- 거기 서!
하지만 지호는 그 말에 더욱 힘을 내서 달렸다. 어디가 어딘지 전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숨을 만한 곳을 찾기도 힘들었다.
지호는 본능적으로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는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분명 아까 들어온 길이 맞는 것 같았는데 전혀 엉뚱한 곳이었다.
그 때 멀리서 외침 소리가 들렸다.
- 조용히 따라와라. 해치진 않아.
지호는 침을 꿀꺽 삼키며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 너한테 돈이 얼마나 많이 들었는데 널 죽이겠어?
그러면서 지호가 있는 쪽으로 발소리가 들렸다. 지호는 본능적으로 발소리와 반대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앞으로 몇 걸음 가자 누군가와 부딪혔다. 지호는 단단한 벽과 같은 사람과 부딪히자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 찾았다!
그리고는 지호의 목덜미를 잡아 일으켰다. 지호는 괴로움이 몸부림을 쳤지만, 엄청나게 강한 힘이 그를 옥죄고 있어서 몸을 바로 하기 힘들었다.
지호는 몸부림을 지는 와중에 자신의 목덜미를 쥐고 있는 사람의 눈을 보았다. 그리고 그는 눈에 전구 빛이 보였다.
지호는 그 사람의 손아귀에서 대롱거리며 복도 중간으로 갔다.
- 어떻게 할까요?
그 남자의 말에 의사는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 중요한 실험체니까 손상 없이 운반하라고 했어. 잠깐 붙잡고 있어.
의사는 몸을 돌려 간호사실 쪽으로 향해 갔다가 왔다.
- 잠깐 더 자면 돼. 진작 더 자고 있었으면 될 걸 왜 깨서 고생을 해.
의사는 주머니에서 앰플 하나와 주사기를 꺼내더니 주사기에 앰플 속 주사약을 넣었다.
그리고는 지호의 팔뚝 쪽으로 주사기를 가져갔다. 지호는 목덜미를 붙잡혀 있어 저절로 팔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 이 봐. 아프지 않으니까 팔에 힘을 빼라고.
그 말에 지호는 한마디 했다.
- 목을 누르고 있는데 몸에 힘을 어떻게 빼요?
의사는 남자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손아귀의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지호가 허리를 조금 펴자 의사가 말했다.
- 이제 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