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축계 Pilot - 7. 한밤의 추격전(2)
세현은 지호를 차에 태웠다.
- 어디로 가는 거죠?
세현은 조용히 있다가 전화기를 꺼내 정태에게 전화를 걸었다.
- 응. 나야. 어제 말한... 응? 아니. 검사는 필요 없고... 알았어.
세현은 전화를 끊고 마음을 굳힌 듯이 말했다.
- 여기 있는 것보다 그 곳이 더 안전할 거예요.
세현의 말에 지호는 고개를 끄떡였다. 차 안에서 세현과 지호는 둘 다 침묵에 빠졌다.
두 사람 모두 어떤 공통의 적이 그들의 신변을 위협하고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침묵하다가 먼저 입을 연 쪽은 지호였다.
- 그런데... 실험체가 뭐죠?
지호의 말에 세현은 잠시 한숨을 내쉬다가 말했다.
- 실험체란 건요. 저쪽, 그러니까 톰슨 병원에서 만드는 일종의 실험의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어요. 다시 말해서 생체 실험의 결과로 어떤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을 실험체라고 하죠.
세현의 말에 지호는 말도 안 된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그런 건 불법이잖아요.
세현은 지호의 반응에 피식 웃으며 말햇다.
- 물론 '드러나면' 불법이죠. 하지만 그들은 교묘하게 위장을 하죠. 그리고 그들은 표면으로는 톰슨 병원이라는 회사로 나타나지만, 그 안에는 무엇이 얼마나 존재하는지 가늠하기 힘들죠. 톰슨 병원 같은 세계적인 병원들이 그 시술을 하고 있다면 그들의 영향력은 상상 이상이죠.
세현의 말에 지호는 침묵을 했다. 그러다가 한 마디 했다.
- 그런데 그들이 누구죠?
지호의 말에 세현은 피식 웃었다.
- 글쎄요. 그건 저도 잘은 몰라요.
세현의 말에 지호는 고개를 끄떡였다.
- 네...
그리고는 다시 둘은 침묵을 했다. 그러다가 다시 입을 연 것은 세현이었다.
- 사실 저도 실험체에요.
그녀의 말에 지호는 깜짝 놀라 세현을 보았다. 세현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말을 이었다.
- 지호 씨는 다행히도 치료법을 아는 실험체지만, 저는 아직 치료법을 모르는 실험체죠. 더군다나 저는... 후후..
세현의 담담한 말에 지호는 무겁게 고개를 끄떡였다. 지호는 사실 자신이 실험체라는 말을 듣고는 자기 스스로를 괴물처럼 생각했었다.
그리고 자신은 남들과 같은 인생을 살 수 없을 것처럼 느꼈다. 그러나 그가 본 세현은 항상 자신의 일에 충실하고, 전혀 괴물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아니 어쩌면 자신이 본 그 누구보다 강인하고 냉철했다. 그런 그녀가 실험체라는 말에 지호는 그녀를 다시 돌아다보았다.
- 제가 알고 있는 것은 여기까지 에요. 아직 저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고 알지 못하는 부분이 많죠. 지호 씨는 제가 볼 때 충분히 강한 사람이에요.
세현의 말에 지호는 고개를 들었다.
- 아니에요. 저는 저를 괴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 누구나 그 상황에서는 자신을 괴물이라고 생각할 거예요. 저 역시도 그랬죠. 그런데 그 상황을 어떻게 이겨내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능력을 갖춘 사람이 되거나 괴물이 되거나 하는 거죠.
세현의 말에 지호는 크게 고개를 끄떡였다. 그리고 다시 두 사람 사이에는 말이 끊겼다.
한 시간정도 차로 이동하자 탁 트인 들판이 펼쳐진 길이 보였다. 길을 따라 가로수가 멋지게 서 있었고, 한적한 도로에는 차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우리나라에 이런 길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멋진 길이었다.
- 멋진 길이네요.
지호는 창밖을 보며 말했다. 세현은 빙긋이 웃으며 말을 했다.
- 그렇죠? 여기서부터 병원이라면 믿어지세요?
- 네? 여기가 병원 안이라구요?
지호는 놀랍다는 듯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 네. 제가 아는 의사가 있는 병원이지요.
- 저기 호수도 보이네요.
- 저 호수도 병원 소유죠.
- 저.. 이런 곳 처음 와 봐요. 그냥 유원지에 놀러온 것 같아요.
지호가 어린 아이처럼 좋아하며 말하자 세현은 웃으며 말했다.
- 나중에 더 좋은 곳으로 놀러 가면 되죠.
지호는 세현의 말이 귀에 안 들어오는지 창밖으로 보며 연신 감탄을 했다. 그 길을 따라 한 10분 정도 달리자 멋진 별장 같은 건물이 나타났다.
그 앞에 차를 세운 세현은 전화를 걸었다.
- 응. 도착했어.
세현이 짧게 전화를 끝내자 얼마 후 안에서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나왔다. 차 안에 있던 세현과 지호는 차에서 내렸다.
흰 가운을 입은 남자는 환하게 웃으며 세현을 한 번 안았다. 그리고는 지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 잘 오셨어요. 우리 고양이가 이런 부탁은 잘 안하는데...
지호는 '우리 고양이'라는 말에 자신도 모르게 풋하고 웃었다. 세현은 그 말이 부끄러웠는지 흰 가운을 입은 남자의 팔을 꼬집으며 말했다.
- 말 가려서 해!
그러자 흰 가운을 입은 남자는 몸을 뒤로 빼며 말했다.
- 하하하. 알았어.
그러고는 지호를 향해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 들어가요. 들어가서 얘기하죠.
흰 가운을 입은 남자는 지호와 함께 앞서 걸었다. 세현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고는 살짝 눈을 흘기다가 뒤따라서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안 로비는 병원이라기보다는 어느 부잣집의 거실 같아 보였다. 지호는 눈이 휘둥그레져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호가 주위를 둘러보자 흰 가운의 의사는 지호가 둘러볼 수 있게 놔두고 세현 쪽으로 몸을 돌렸다.
- 저 사람이야?
- 응. 한 3일이면 돼.
그러자 흰 가운 의사는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 우리 병원은 병원비가 비싼데.
- 비용 청구해.
세현이 딱 잘라 말하자 흰 가운의 의사는 못 이기겠다는 듯이 말했다.
- 뭐 이리 딱딱해? 장난 좀 친 걸 가지고.
그러자 세현은 인상을 풀며 말했다.
- 긴장해서 그런가 봐. 미안. 사무실을 누가 뒤지고 갔어.
그러자 흰 가운 의사는 놀라서 물었다.
- 누가? 다치진 않았어?
- 나 없을 때 뒤지고 갔어.
- 이제 사무실 접고 이리로 오는 게 어때? 나랑 같이 있다가 그냥 결혼하면...
세현은 그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 정태 씨도 까먹을 텐데.
그러자 흰 가운의 의사, 정태는 다소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 이건 비밀인데... 자기 상태가 점점 좋아지고 있어.
세현은 피식 웃었다.
- 내 주치의가 너무 환자한테 희망을 심어주는 거 아냐?
- 아냐. 이따 말해 주려고 했는데, 세포 분열이 전보다 많이 느려졌어.
정태의 말에 세현은 고개를 끄떡였다.
- 그것보다 저 사람 잘 봐줘.
- 알았어. 아니 온 김에 아예 전에 말했던 수술을 할까?
- 아니. 아직. 좀 더 확인할 일이 있어서.
- 그래.
지호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세현과 정태가 심각한 표정으로 얘기하는 모습을 보았다. 자신이 남들에게 짐이 된다는 사실이 못 견디게 서글펐다.
고아원을 나온 후에는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고 살려고 했기에 그런 서글픔은 더 컸다. 세현이 지호의 곁으로 다가오자 지호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 여기.. 병원비가 비싸겠죠? 제가 통장에...
지호가 머뭇거리며 말을 하자 세현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 그런 거 걱정 말고, 잘 쉬고 있어요. 저기 저 멍청해 보이는 의사가 다 알아서 해 줄 거니까요.
세현의 말에 지호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 여기서 편하게 있어요.
지호가 눈만 깜빡이고는 세현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그 때 뒤에 있던 정태가 크게 말하며 다가왔다.
- 객실로 안내해야죠. 자! 이쪽으로 오시죠!
지호와 세현은 정태가 소리치는 방향으로 몸을 돌리고 그의 뒤를 따라갔다. 지호가 머물 병실은 1인실이었다.
한눈에 보아도 대단히 좋은 병실이었다. 병실이 5층에 있었고, 큰 창문이 달려 있어서 커튼만 열면 주변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지호는 마치 좋은 방을 구한 것처럼 마음이 조금 설랬다. 지호와 세현을 방으로 안내한 정태의 주머니에서 삐삐하는 소리가 들렸다.
정태는 주머니에서 페이저를 꺼내 보더니 말했다.
- 난 호출 때문에 잠깐 가봐야 하는데, 자기는 여기 있을 거야?
정태의 말에 세현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자 정태는 살짝 고개를 끄떡이고는 지호에게 말했다.
- 호출할 일 있으면 저 버튼을 누르면 되요. 그리고 식사는 움직일 수 있으니까 1층에 있는 식당으로 오면 되구요. 이따 저녁 시간에 봐요.
그러고는 세현을 보며 말했다.
- 갈 때 사무실로 왔다 가. 할 말도 있고.
- 알았어.
정태가 방을 나가자 지호는 세현을 가느스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 애인이에요?
- 그런 셈이죠.
- 저 분도 실험체란 걸 알고 계세요?
지호의 말에 세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 제 주치의에요.
- 아!
지호의 반응에 세현은 쓰게 웃었다.
- 전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이틀이나 사흘 정도만 참으면 될 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