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축계 Pilot - 5. 실마리(5)
정신병원은 일반 병원과는 다르게 꾸며져 있었다. 뜻밖에도 세현은 이 병원을 잘 알고 있었다.
세현은 너무 자연스럽게 병원 안으로 들어가더니 원장실 쪽으로 걸어갔다. 석호는 그런 세현의 뒤를 따를 뿐이었다.
세현은 원장실 문을 한두 번 두드리더니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책상에 앉아 있던 원장은 누군가하고 고개를 들었다가 세현을 보고는 환하게 웃으며 걸어 나왔다. 머리가 하얗고, 몸집이 커다란 원장은 인자한 표정이었다.
- 어이구.. 닥터 최. 이게 얼마만입니까?
그러자 세현도 웃으며 원장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 작년 세미나에서 뵈었었죠.
원장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너스레를 떨었다.
- 그렇게나 오래 되었나요? 전 닥터 최를 논문이나 방송에서 하도 자주 봐서 그런지 얼마 안 된 줄 알았습니다. 허허.
- 최 원장님도 참. 별말씀을. 아, 그리고 이쪽은 장석호 신부님이십니다.
세현은 원장에게 석호를 소개했다.
- 안녕하십니까. 신부님.
최 원장은 석호를 보며 허리를 숙이며 악수를 청했다. 석호 역시 허리를 숙이고 악수를 했다.
- 예. 안녕하십니까.
최 원장은 두 사람을 앞의 소파에 앉게 하고는 말을 했다.
- 제 방에는 커피밖에 마실 게 없어서...
두 사람은 손사래를 쳤지만, 최 원장은 두 사람을 앉혀 놓고 구석으로 가서 커피를 타며 물었다.
- 닥터 최는 아직도 그 무언가를 찾고 있나요?
아무렇지도 않게 물은 말이었지만, 세현과 석호는 그 말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세현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 인간 본성에 대한 것은 항상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이지요.
커피를 타서 들고 오는 최 원장은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 그렇죠. 닥터 최의 주제는 항상 인간의 본성에 대한 것이었으니까요. 그 열정이 부러워요.
최 원장은 지그시 눈을 감으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 아! 닥터 최를 보고 반가워서 내 얘기만 했군. 그런데 무슨 일로 저희 병원에 오셨는지...
그 말에 석호가 말을 받았다.
- 저흰 인간 본성에 관한 연구 중입니다. 여기에 적절한 케이스가 있다고 해서요.
석호의 말에 원장은 의아하다는 듯이 석호를 쳐다보며 말했다.
- 여긴 본성에 충실한 사람들도, 아니면 극단적으로 거부하는 사람도 많지요. 신부님께서도 의학적인 것에 관심이 많으신가 보군요.
원장의 말에 세현이 웃으며 답했다.
- 신부님이셔도 제네바 대학에서 생명공학부문 연구프로그램 회원이시죠.
세현의 말에 원장은 놀란 듯이 세현과 석호를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 아. 그러시군요. 그래 어떤 환자분이신지?
그 말에 세현이 서류를 한 장 꺼내서 최 원장에게 내밀었다. 최 원장은 안경을 한 번 올려 쓰더니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다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다가 곧 원장은 서류를 내려놓고 고개를 끄떡이고는 웃으며 말했다.
- 어려운 환자로군요. 아무튼 저를 따라 오시죠.
병원 휴게실에는 다양한 환자들이 있었다. 흰 가운을 입은 사람들도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벽에 기대어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사람, 손가락을 똑바로 세었다가 다시 반대로 세며 좋아하는 소년, 입을 반쯤 벌린 채 아무 생각 없이 침을 줄줄 흘리며 걷는 사람 등등 다양한 사람들이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가끔 간호사의 부름과 삐삐 호출 소리가 들렸다. 뭔가 복잡한 것 같으면서도 그 안에는 질서가 있었고, 조용하진 않았지만 왁자지껄한 분위기도 아니었다.
복도를 걸어가며 원장은 세현에게 말했다.
- 연구에 필요한 임상 사례라 하시니 별 말씀은 안 드리겠지만, 그 분이 과연 연구에 도움이 될는지는 모르겠습니다.
- 어쩌면 아주 특별한 사례가 될는지도 모르지요.
원장은 세현과 석호를 이끌고 그런 복도를 지나 휴게실 바닥에 엎드려 있는 환자에게 데리고 갔다. 그 환자는 스케치북에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 저 환자입니다.
세현은 최 원장을 보며 물었다.
- 격리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요.
그러자 최 원장은 고개를 저었다.
- 그럴 필요가 없더군요. 전혀 폭력성을 보이지 않는 환자입니다. 벌레 한 마리 죽이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벌레가 나타나면 나갈 때까지 조용히 있더라구요.
- 증상은 어떻습니까?
세현의 말에 원장은 차트를 펼쳐보며 말했다.
- 딸은 실종되고, 부인은 자살했습니다. 전형적인 '충격에 의한 자폐증상'을 보이는 환자지요. 하루 일과 내내 이상한 그림을 그린다거나, 뭔가를 중얼거린다던가 하면서 보냅니다.
원장의 말에 세현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자 원장은 차트 뒤에 꽂혀 있던 그림을 빼서 세현에게 건네주었다.
- 이게 저 남자가 매일 그리는 그림입니다.
원장이 건네준 종이에는 검은 크레파스로 그린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세현이 그 그림을 보고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자 원장은 세현을 보며 말했다.
- 닥터 최. 이따 갈 때 들렀다 가요. 난 회진이 있어서 가봐야 될 것 같으니까.
원장은 일이 있다며 자리를 뜨자 세현과 석호는 그 남자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세현과 석호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의 옆에 석호는 쪼그려 앉아서 그에게 알은 체를 했다.
- 안녕하세요.
그러나 그는 석호 쪽을 보지도 않은 채 그림에만 집중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알 듯 모를 듯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석호는 다시 그를 불렀다.
- 저.. 김원효 씨. 실례하겠습니다.
그러나 남자는 여전히 석호를 돌아보지 않았다. 석호는 그래도 옆에서 계속 말을 걸었다.
- 아버님... 아버님... 따님에 대해 여쭤보려고 왔습니다.
그러자 크레파스를 쥐고 있는 손이 멈췄다. 그러고는 석호 쪽을 보며 홀린 듯이 말했다.
- 일부로 죽인 게 아니야. 일부로 죽인 게 아니야...
그는 손을 벌벌 떨면서 이 말만 반복해서 말했다. 석호는 그를 보며 다시 물었다.
- 아버님. 뭔가를 아시면 말씀해 주실 수 있으세요?
그러자 사내의 눈이 조금은 또렷해지면서 슬픈 눈으로 석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 그 아이 죽었어...
석호는 그 눈빛을 놓치지 않기 위해 그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 압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무심한 듯이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 김원효 씨? 김원효 씨?
그러나 그는 다시 석호를 돌아보지 않았다. 세현은 석호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 소용없을 거예요.
석호가 일어나자 세현은 그가 그리고 있는 그림을 보았다. 전과 같은 그림이었다.
- 아까부터 궁금한 것이었는데 저 머리 긴 사람은 여자일 테고. 다른 저 사람은 누굴까요?
석호의 질문에 세현은 다시 그림을 쳐다보며 말했다.
- 저 사람은 적어도 두 사람의 죽음을 인지하고 있다는 것이겠죠.
세현의 말에 석호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말을 했다.
- 두 사람이라... 그럼 사지가 잘린 또 다른 사람이 있다는 말인가요?
석호의 말에 세현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말했다.
- 어쩌면 다른 희생자가 있을지도 모르죠. 다만 이 사람한테 듣기는 힘들겠죠?
세현은 그렇게 말을 하고 다시 그림을 보았다. 온통 검은 색으로 칠했지만, 그건 분명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머리가 긴 여성은 몸통과 머리만 있을 뿐이었고, 다른 하나는 검은 색으로 뭉개듯이 그렸지만 마찬가지로 사지가 절단된 모습의 남자 그림이었다.
세현은 그림을 자세히 보며 말했다.
- 그림을 발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여자의 그림은 구체적으로 자세히 묘사되어 있어요. 사지 절단면의 부위, 형태까지 각각 다르게 나타나고 있어요. 그 절단 부위가 우리가 봤던 부검 서류와 거의 일치해요.
세현의 말에 석호는 못 믿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 그 말은.... 설마...
세현은 석호에게 고개를 끄떡이며 말을 이었다.
- 이 사람은 딸의 죽음을, 사지를 잘리는 장면을 봤다는 거죠. 그런데 문제는 남자의 사지 절단은 조금 모호해요. 그저 팔이 잘려 있고, 다리가 잘려 있을 뿐이죠.
- 그럼 남자의 경우는 보지 못한 것이겠군요.
세현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했다.
- 남자는 죽었다는 것. 아니 절단되어 죽은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지만, 정확하게 어떻게 죽은 지는 모르는 거예요. 그저.. 자신의 생각 속에서 유추하는 것 같아 보여요.
석호는 이제야 납득이 간다는 표정으로 말을 했다.
- 그렇다면 그녀의 모친이 자살한 이유도...
- 저 같아도 내 딸이 산 채로 사지가 잘리는 것을 보면 못 버텼을 거예요.
세현의 말에 석호가 깊은 신음 소리를 흘렸다. 그건 너무나도 끔찍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석호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말을 꺼냈다.
- 그럼 저 남자는 혹시 김효정 씨에 의해 피해를 본 사람이 아닐까요?
석호의 말에 세현은 고개를 끄떡였다.
- 제 생각도 그래요. 그리고 김원효 씨도 그 사고를 같이 목격했을 거예요.
세현의 말에 석호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지금까지의 정황만 봐서는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인지 모호했다.
누군가를 죽인 이를 다른 누군가가 죽이고, 그 죽이는 것을 본 누군가는 자살을 하고, 누군가는 미치고...
석호는 이 불길하고도 끔찍한 연쇄적 고리에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가 쳐졌다.
- 주여. 모두에게 마음의 평화가 깃들도록 해주시옵소서... 아멘..
석호는 잠시 눈을 감고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는 세현을 보며 말했다.
- 이번 일은 철구 씨 말대로 보복 살인 같아보이네요.
석호의 말에 세현 역시 고개를 끄떡였다. 두 사람은 여전히 공책에 검은색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는 원효를 두고 발걸음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