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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계(逐界)-쫓겨난 이들의 세계-259화 (259/309)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축계 Pilot - 4. 지호의 비밀(4)

- 아직 못 찾았다는 건가?

어둠 속에서 낮고 음침한 목소리가 들렸다. 희미한 불빛에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그 앞에는 머리를 숙인 채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의 이마에는 그리 덥지 않은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 갑자기 사라지는 바람에...

주눅이 든 목소리에 의자에 앉은 사람은 책상을 쾅 내리쳤다.

- 그 녀석이 없어진 지 오 일이나 지났어. 거기에 투자한 돈이 얼마인지 알아?

- 죄송합니다. 빨리 찾아내겠습니다.

머리를 숙이고 있는 남자가 당황하여 말을 하자 음침한 목소리는 단호하게 말했다.

- 조직의 최고 실력자인 녀석이 감시도 제대로 못하고, 흔적만 잔뜩 남기고 온 놈이 찾기는 어떻게 찾아!

그 목소리에 앞에 서 있던 남자는 두 다리에 힘이 빠진 듯 털썩 주저앉으며 벌벌 떨었다. 그리고는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 그 녀석이 지하실에서 그런 짓을 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리고... 경찰이 들이 닥치는 바람에... 제발... 한 번...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바로.. 바로 찾아내겠습니다.

- 우리에게 두 번은 없다.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런데 그 때 변조된 기계음이 들렸다.

- 한 번 더 기회를 주시지요.

그 목소리가 들리자 음침한 목소리는 잠시 침묵을 하다가 말을 했다.

- 살려 와라. 필요한 샘플이니.

주저앉았던 남자는 고개를 땅에 처박을 것처럼 숙이고는 말했다.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바로 잡아오겠습니다.

그러고는 뒤에 있는 문으로 재빨리 빠져나갔다. 그가 나가자 어둠 속에서 변조된 기계음이 들렸다.

- 어찌되었건 성공한 샘플은 하나밖에 없으니 우리에게는 꼭 필요한 것이지.

그러자 음침한 목소리가 말을 했다.

- 그런데 그 샘플은 베를링겐 박사가...

- 그 얘기는 잠시 접어두지.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샘플의 확보니까.

변조된 기계음은 차분한 목소리로 다음 말을 이었다.

- 톰슨 원장, 샘플을 찾건 못 찾건 M3는 처분하도록 하지.

그 목소리에 톰슨은 말을 했다.

- 알겠습니다.

변조된 기계음이 냉소적으로 말했다.

- 에릭 스미스(Eric Smith) 건은 어떻게 되었지?

기계음의 말에 톰슨 원장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말을 이었다.

- 어디 있는지 찾긴 했습니다만, 탈퇴자의 처리 문제는 슈뢰딩거 박사가 워낙 완고한 입장을 보여서 처리하기가...

톰슨의 말에 기계음이 말을 했다.

- 다른 사람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서라도 본보기를 보여줄 필요가 있지.

기계음의 말에 톰슨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그 분'의 말이어도 조직 내에서 슈뢰딩거의 위치나 발언권을 생각하면 함부로 처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톰슨이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자 기계음이 말을 했다.

- 자네는 조직을 누가 이끌어 간다고 생각하나?

기계음의 말에 톰슨은 잠시 당황하다가 자신이 생각한 것을 말했다.

- 물론... 당신입니다. 하지만 에릭 스미스를 처리하면 반발이 있을 텐데요.

톰슨의 말에 기계음이 말을 했다.

- 반발은 항상 존재할 수 있는 것이지. 하지만 그것이 무섭다고 내부 규율이 흔들린다면 더 큰 위험을 초래하지.

기계음의 말에 톰슨은 고개를 끄떡였다.

- 네. 알겠습니다.

톰슨이 발걸음을 돌리기 전에 기계음의 말이 다시 들렸다.

- '본보기'라고 했다. 저들은 모르지만, 우리는 모두 알고 있는 방법.

톰슨은 고개를 끄떡이고 밖으로 나갔다. 기계음은 톰슨이 나가자 어두운 방에서 혼자 중얼거렸다.

- 슈뢰딩거가 노발대발하겠군. 후후.

아니나 다를까 얼마 후 백발의 노인 하나가 몹시 화가 난 표정으로 어두운 방 안으로 들어왔다.

- 제가 그래서 처음부터 이 일을 반대하지 않았습니까!

슈뢰딩거는 방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다짜고짜 허공을 향해 소리를 쳤다. 기계음은 잠시 침묵을 하다가 말을 했다.

- 자네는 항상 내가 하는 일에 '반대'가 아닌가!

기계음의 말에 슈뢰딩거는 고개를 저으며 꼬장꼬장하게 말했다.

- 그런 일이 우리의 대업(大業)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슈뢰딩거의 말에 기계음이 대답을 했다.

- 음.. 어찌 보면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을 수도 있다네. 자네는 그냥 표면적인 내용만을 보고 화를 내겠지만, 사실 그 일로 인해 새로운 걸 알게 되었지.

슈뢰딩거는 기계음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 보고서는 다 보았습니다만 그렇게 해서 새로운 걸 알아낸다고 해서 도움이 될 것은 없습니다.

슈뢰딩거의 가시 돋친 말에도 기계음은 여유롭게 말을 했다.

- 의외의 결과가 새로운 것을 이끌 수 있다는 걸 자네도 잘 알지 않나.

- 그건 의외의 결과라기엔 희생이 너무 큽니다.

슈뢰딩거의 말에 기계음은 한숨을 쉬었다.

- 희생이라... 자네가 말하는 희생은 어쩌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네. 목적을 위해서 수단으로 희생되는 건 우리 모두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기계음의 말에 슈뢰딩거는 의자를 손으로 잡으며 말했다.

- 수단일 수는 있지만,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에 수단으로 이용될 만큼 사람의 목숨이 하찮은 것은 아닙니다.

기계음은 슈뢰딩거의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 하하하. 어처구니없는 일이라... 자네는 왜 항상 내가 계획하는 일을 그렇게 평가하지?

- 그건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기계음은 갑자기 정색을 하며 말을 했다.

- 자네 말을 따르면 항상 이 안에서 조용히 자네가 말하는 '그 날'을 기다리며 가만히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자네가 말하는 그 목적에 내가 수단으로 이용될 날만 기다리라는 말이지 않은가 말이야!

슈뢰딩거는 기계음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 아무도 당신을 수단으로 이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그레고리님께서 계획하신 일입니다. 물론 그 목적을 알고 계신 분도 당신 외에는 없지만 결코 이런 방식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슈뢰딩거의 단호한 말에 기계음은 지지 않고 말을 했다.

- 자네도 인정하듯이 나만 그레고리님의 계획을 알고 있지. 하지만 말야. 그 계획이 이번에 내가 했던 일처럼 엉뚱한 결론에 도달하면 어떻게 하지?

- 그럴 리 없습니다.

슈뢰딩거의 말에 기계음이 소리를 쳤다.

- 자네는 여전히 나를 인정하지 않아. 내가 자네에게 인정받으려고 애를 써도 자네는 항상 나를 평가하고 재보곤 하지.

슈뢰딩거는 기계음의 말에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 솔직히 아직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그 이유야 당신께서 더 잘 알고 계시겠지만.

- 어떻게 해야 자네에게 확신을 줄 수 있지?

기계음의 말에 슈뢰딩거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 글쎄요. 이런 식이면 어쩌면 영원히 저는 확신을 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슈뢰딩거의 말에 기계음은 잠시 침묵을 하다가 말을 했다.

- 그렇다면 조직에서 자네를 제거할 수도 있는데도?

슈뢰딩거는 기계음의 말에 웃음기를 띠며 말했다.

- 이 늙은 목숨에는 미련이 없습니다.

기계음은 슈뢰딩거의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 하하하. 그래. 내가 자네한테 이길 수 없는 유일한 건 바로 그것뿐이야. 죽음에 대해 초탈한 태도. 다시 태어날 것이라는 믿음도 없는데 죽음에 대해 아주 유연한 모습을 보이는 그 모습 말야.

- 저는 살만큼 살았으니까요.

기계음은 슈뢰딩거의 말에 낮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 알겠네. 자네 말대로 일단 그동안 실험은 보류하도록 하지.

슈뢰딩거는 기계음의 말에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 앞으로 가급적이면 어떤 일을 할 때 저와 상의를 하셨으면 합니다. 저 멍청한 톰슨과 진행하지 마시고.

슈뢰딩거의 말에 기계음은 이해한다는 듯이 말을 했다.

- 알겠네.

슈뢰딩거는 허공을 향해 가볍게 목례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기계음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이제 때가 되었나? 휴... 이건 어렵군.

기계음은 알 듯 모를 듯한 말을 혼자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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