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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계(逐界)-쫓겨난 이들의 세계-258화 (258/309)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축계 Pilot - 4. 지호의 비밀(3)

석호는 너무도 늙어버린 최 베드로의 얼굴을 보며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최 베드로는 석호에게 가볍게 눈인사만을 하고는 원장이 있는 자리 옆으로 옮겨 갔다.

원장은 자신이 앉았던 자리 옆으로 옮겼고, 최 베드로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옆에 앉았다.

그 둘이 자리에 앉자 석호 역시 몸을 돌려 자리에 앉았다. 석호가 자리에 앉자 무거운 침묵만이 그들을 감쌌다.

어느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꽤 시간이 흐른 후에 최 베드로는 낮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 자네의 말이 다 옳아. 맞아. 그렇지. 가르친 대로 아주 잘 하고 있어.

최 베드로는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른 채 혼잣말처럼 얘기를 하고 있었다.

- 자네를 처음 봤을 때가 생각나는구만.

최 베드로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석호는 그런 최 베드로를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입을 열고 말이 나올 때는 잠시 목이 메어왔다.

- 왜죠? 왜 그러셨죠?

석호의 뜬금없는 물음에 최 베드로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는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 이제 와 무슨 소용인가. 그 이유 따위가.

그러자 석호는 무겁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지금도 그 이유는 중요합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석호의 말에 최 베드로는 다시 눈을 감으며 혼잣말 하듯이 말했다.

- 자네는 그게 문제야. 언젠가 자네도 나같이 될 거라고. 내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는가. 나처럼은.... 나처럼은 되지 말아야 한다고.

최 베드로의 말에 석호는 입을 다문 채 그를 쳐다보았다. 최 베드로는 다시 살짝 눈을 뜨고 조용히 말했다.

- 음... 자네 표정을 보니 예전과 똑같군. 고집불통 표정. 나한테 많이 혼났지. 허허허.

최 베드로는 오랜만에 보는 제자의 모습에 흐뭇함이 묻어 나왔다. 하지만 석호는 그런 최 베드로의 모습을 보며 더욱 가슴이 아파왔다.

- ...

석호의 표정이 조금 일그러지자 최 베드로는 고개를 저으며 타박하듯이 말했다.

- 아까 원장하고 얘기할 때는 제법 배운 티를 내더니 나하고 만나니 다시 예전 같아지는구만.

최 베드로의 말에 석호는 마음을 다 잡고 단호하게 말했다.

- 저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알아야겠습니다. 왜 그러셨고... 왜 여기에 계신지...

석호의 말에 최 베드로는 입을 다물었다. 석호는 그런 최 베드로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입을 다물던 최 베드로는 옆의 원장에게 말을 했다.

- 우리 중요한 얘기를 할 텐데, 자리 좀 비워주겠나? 잠깐이면 되네.

최 베드로의 말에 원장은 사색이 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나 목소리는 매우 부드러웠다.

- 그건... 몸도 불편하신데, 이제 좀 쉬시지요.

원장이 최 베드로를 만류했지만, 최 베드로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 내 제자일세. 그리고 착한 녀석이지.

- 그래도...

- 허허.. 내가 모두 책임질 테니 걱정하지 말게나.

최 베드로의 말에 원장은 석호를 한 번 쳐다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네. 그럼 전 기도실에서 있겠습니다.

최 베드로는 원장의 말에 고개를 끄떡였다. 원장이 나가자 최 베드로는 잠시 과거의 상념에 젖은 듯이 눈을 감고 있다가 말했다.

- 여자애에게 있던 녀석이 지금 내 안에 있네.

최 베드로 신부의 말에 석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아닙니다. 그런 것은 원래 없었습니다.

석호는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강하게 부정을 했다.

- 아니네. 자네도 알고 있지 않은가. 그 녀석이 세상에 있다는 걸. 그리고 쉽게 사라질 녀석이 아니라는 걸.

석호는 최 베드로를 쳐다보며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 때... 그 때 신부님께서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 때 최 베드로 신부는 심하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눈이 빨개지며 석호를 노려보았다.

석호는 그런 최 베드로 신부를 보며 흠칫 놀랐지만, 자리에서 일어서지는 않았다. 최 베드로는 고개를 잠시 숙였다가 기침이 잦아들자 고개를 들고 말했다.

- 봤나? 그 녀석이지.

- 아닙니다. 그건 그 녀석이 아닙니다.

석호는 최 베드로의 말에 다시 고개를 강하게 저었다. 하지만 최 베드로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말했다.

- 아니. 들어왔네. 자네가 잘못 알았던 거지. 그들이 맞았어. 난 치료를 빙자해 간음을...

- 아닙니다.

석호는 탁자를 쾅하고 내려쳤다. 그리고는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최 베드로를 쳐다보았다. 자신의 마지막 믿음이 사라지지 않기를 하는 간절함으로 최 베드로를 쳐다보았다.

- 난 알고 있었어. 마르티노가 왜 그랬는지 말야. 나 역시 그 녀석처럼 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말야. 그렇게 파문을 당하고 난 다음 자네도 알다시피 그 때... 난 사실 좌절하고 있었지.

- 그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충분히 그렇지 않다는 걸 증명할 수 있었습니다.

석호는 마르티노 신부를 떠올렸다. 다른 사제들이 여자 아이라고 생각할 만큼 예쁘장하게 생긴 녀석이었다.

자신에게 감당이 되지 않는 엑소시즘 의식을 거행하다가 이틀 만에 미라처럼 변하여 죽은 녀석이었다.

- 내겐 자네만큼이나 소중한 녀석이었지.

- 알고 있습니다. 마르티노가 신부님을 유독 잘 따랐었죠.

- 허허. 그랬지. 자네처럼 날카로운 예지는 없어도 조용하면서도 날카로운 안목이 있었던 녀석이지.

최 베드로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석호는 그런 최 베드로를 보며 말했다.

- 그 친구의 죽음 때문에 그럼...

석호의 말에 최 베드로는 고개를 저었다.

- 그 녀석 때문에 파문을 받아들었냐는 말인가? 그건 아니야. 다만 그 녀석의 죽음이 나를 깨닫게 한 거지.

석호는 최 베드로의 말에 안타까운 말투로 얘기를 했다.

- 그래도 신부님은 파문을 받아들여서는 안 됐습니다.

최 베드로는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 내겐 파문 따위는 의미가 없다네. 내 소중한 놈들을 잃고 싶지 않았지.

최 베드로는 나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 그래서 다시 그 위험한 일을 하신 겁니까? 예가르사하두타...

석호의 말에 최 베드로는 대답은 하지 않고 빙긋이 웃었다. 그리고는 말을 했다.

- 내 안에 그 녀석을 내가 없애야 하지.

최 베드로의 뜬금없는 말에 석호가 주먹을 쥐며 말했다.

- 그런 건 없다는 걸...

석호의 말에 최 베드로가 말했다.

- 그럼 왜 사람이 미라가 되어 죽어나가는데 나마 멀쩡하지?

최 베드로의 말에 석호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 자네도 조사단의 일원이었으니까 알겠지만, 중국에서 일어난 건 약물 중독 때문이었지. 하지만 다들, 마르티노도 그렇게 변해 죽게 되었는데, 나는 왜 그대로일까?

최 베드로는 담담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말을 했다. 석호는 최 베드로의 말에 깊은 한숨을 쉬다가 말을 했다.

- 그런데 왜... 왜 저에게 연락을 안 하셨습니까?

석호의 질문에 최 베드로는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 자네는 나와는 다르게 살아야 하기에 그랬다네.

석호는 고개를 저으며 최 베드로를 쳐다보았다.

- 한국에서는요? 저에게 연락할 수도 있으시지 않았습니까?

- 자네마저 비명(非命)에 가게 하고 싶지는 않았네.

최 베드로 신부는 목소리를 낮춰 은밀하게 말했다.

- 그 녀석이 내게 얘기를 했거든. 나만... 아니 나하고 같이 가자고.

최 베드로의 말에 석호는 고개를 저었다.

-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최 베드로는 예의 깊은 미소를 띠며 말을 했다.

- 사실이건 아니건 그건 나만이 알 수 있는 일이네. 그리고 자네가 조사 위원회에서 나 때문에 많은 곤욕을 치른 건 알고 있네. 하지만 그들이 조사한 건 모두 사실이야. 단 한 가지만 빼고. 그들은 그 녀석의 존재를 몰라.

석호는 최 베드로의 말에 다시 깊은 한숨을 쉬다가 말을 했다.

- 그렇다면 파문이나 지금의 행적 모두 신부님께서 선택하신 것이란 건가요?

- 글쎄.. 하긴. 자넨 모를 일이지.

최 베드로의 알쏭달쏭한 말에 석호는 허리를 최 베드로 앞으로 숙이며 말했다.

- 그렇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제게는..

최 베드로는 크게 고개를 저으며 말을 했다.

- 자네에겐 더더욱 말할 수 없었지. 만약 그랬다면 자네도 지금 내 꼴이 되어 있을 테니까.

- 하지만...

최 베드로는 석호의 말을 끊고 아까와는 다르게 단호한 말투로 얘기를 했다.

- 자네는 이제 자네의 삶을 살게나. 난 이미 너무 많이 와버렸어.

석호는 고개를 저었다.

- 아닙니다. 지금이라도...

- 아니네. 이젠 돌아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다네.

석호는 최 베드로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여전히 그에 대한 죄책감과 절망감에 그의 얼굴을 일그러져 있었다.

석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최 베드로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런 얘기만 나누어서 미안하네.

최 베드로가 일어서자 석호는 같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석호가 일어서자 최 베드로는 가까이 다가섰다. 그리고 포옹을 청하듯 석호 앞으로 몸을 내밀었다.

석호는 최 베드로의 곁으로 다가가 최 베드로를 끌어안았다. 그런데 그 때 최 베드로는 석호의 귀에 입가를 가져다 대며 조그맣게 말을 했다.

- 이 일에서 손을 떼.

석호는 놀라 최 베드로를 쳐다보았으나 최 베드로는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다만 고개만 끄떡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을 누군가 보았다면 오랜만에 만난 반가운 제자와 헤어지는 것이 아쉬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많이 자란 제자에 대한 대견함을 느끼는 표정이었다.

석호는 입을 다물고 살짝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했다.

- 신부님은 저에게는 영원한 수도자이십니다.

석호는 이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이런 석호의 뒷모습을 보는 최 베드로의 눈에는 눈물이 살짝 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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