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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계(逐界)-쫓겨난 이들의 세계-251화 (251/309)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축계 Pilot - 2. 그들과 만나다.(3)

지호가 말을 걸자 세현은 무언가 생각하는 표정을 풀고 지호를 지긋이 쳐다보았다. 지호가 보기에 세현은 무척 젊고 예뻤다.

그런데 철구라는 사람은 세현을 할매라고 불렀고, 세현 역시 그것에 대해 기분 나빠하기는 하지만 부정하지 않는 모습이 이상했다.

- 왜 저분이 선생님을 할매라고 그래요?

지호의 말에 세현은 눈매를 찌푸리며 말했다.

- 알 필요 없네요.

사무실 밖으로 나가던 세현은 지호를 보며 말했다.

- 일단 검사 먼저 해 봐야겠어요.

세현의 말에 지호는 고개를 끄떡이며 세현의 뒤를 따랐다. 얼마 후 MRI실에서 지호가 나오자 세현은 그의 머리에 붙어 있던 검사기를 떼어주었다.

아직까지 MRI 공명 소리 때문에 울렁거리는지 지호는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 좀 있으면 괜찮아질 거예요.

세현의 말에 지호는 고개를 끄떡이다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 와. 대단하네요. 조그만 병원 같은데 MRI기도 있잖아요.

- 후후. 아는 게 많네요.

세현의 말에 지호는 부끄러운 듯이 웃었다.

- 미국에서 수술할 때 MRI 촬영 많이 했거든요.

- 촬영을 많이 했다고요?

- 네. 거의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요.

세현은 그의 말에 잠시 충격을 받았다. 특히 지호와 같은 뇌 MRI 촬영은 조영제를 투입해야 하기 때문에 일주일에 한 번씩 촬영한다면 환자에게 큰 무리가 갈 수 있었다. 세현은 고개를 끄떡이다가 말을 이었다.

- 수술한 다음에 이상한 점은 없었어요?

- 이상한 점이요? 글쎄요. 다른 건 모르겠고, 한동안 정말 편하게 잤어요. 그러고 보니 좀 피곤하네요. 조금 자도 돼요?

- 네. 자도 돼요.

지호가 침대에 눕자 세현은 병실 밖으로 나와 진료실로 들어가 MRI 사진을 보았다.

MRI 사진 중에서 머리 부분을 확대하였다. 그리고는 빨간색 펜으로 동그라미를 치며 말했다.

- 시신경.... 시신경이라... 시신경.

세현은 MRI에서 이상한 것을 발견하고 그것에 대해 찾아보다가 책상에 엎드린 채로 잠이 들었다.

여러 논문들을 뒤져 보았으나 지호와 같은 임상 사례는 찾을 수가 없었다. 전날에도 깊이 잠들지 못했던 세현은 논문들과 지호의 뇌 사진에 파묻혀 잠이 들었다.

그런데 세현은 뒤에서 기척이 들려 순간 눈을 떴다. 누군가가 다가오는 느낌이 들었고, 언뜻 반짝이는 금속성 물체가 그녀의 모니터 화면에 스쳤다.

세현은 자신이 무언가를 잘못 본 것이라 생각했는지 다시 실눈을 뜨고 모니터에 비친 상을 확인하였다.

분명 자신의 뒤에 누군가가 반짝이는 물건을 손에 들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세현은 화들짝 놀라 의자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지호의 손에 칼이 들려 있는 모습을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물러났다.

- 너... 너...

지호는 세현의 반응에 놀라 한걸음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 저.. 배가 고파서요. 냉장고에 보니까 사과가 있길래.... 죄송해요. 먹으면 안 되는 건가요?

지호의 반응에 세현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실소하고 말했다. 그의 심리 상태가 불안정하고 사이코패스와 같은 기질이 조금 있다는 사실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지호의 행동에 자신도 모르게 지레 겁을 먹은 자신이 우스웠다.

- 아뇨. 머.. 먹어도 돼요.

두 사람은 소파에 앉아서 같이 사과를 깎아 먹었다. 지호는 예쁜 모양으로 사과를 깎으며 말했다.

- 그런데 왜 그렇게 놀라셨어요?

지호의 말에 세현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 놀라긴요. 그냥 잠에서 덜 깨서.

- 아... 제가 놀라게 한 것 같아서 죄송해요.

지호는 사과를 깎으며 미안해했다. 세현은 지호가 깎은 사과를 쳐다보며 말했다.

- 아니. 그런데 사과를 참 예쁘게 잘 깎네요.

- 알바 경험이 많아서요. 히히히.

- 알바 경험?

- 네. 예전에 제가 나이트클럽 주방에서 일한 적이 있거든요.

- 하! 그래요?

- 그 때 어깨 너머로 배운 것들이죠.

지호는 신나서 자신이 나이트클럽 아르바이트를 할 때 얘기를 꺼냈다. 그러다가 문득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이내 표정을 바꾸더니 말을 꺼냈다.

- 사실 이번 일 말고 전에도 이상한 일이 하나 있었어요. 전에 클럽에서 화장실이 급해서 갔는데, 소변기가 다 막혀서 대변기 쪽으로 갔거든요.

사과를 한 입 베어 물던 세현은 약간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러한 것을 모르는지 지호는 계속 자신의 말을 이어서 갔다.

- 그런데 제가 들어간 대변기 옆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어요. 그 시끄러운 음악 소리를 뚫고요.

지호의 말에 세현은 흥미가 생기는지 지호를 쳐다보았다.

- 수술 전에?

세현의 말에 지호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아뇨. 수술 하고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였어요. 놀라서 밖으로 나와서 매니저한테 말했죠. 근데 화장실에 들어갔던 매니저가 짜증을 내면서 저한테 아무도 없다고 했어요. 근데 이상한 건 제가 그 칸에 들어가면 옆 칸에서 계속 들렸어요.

지호의 말에 세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 그런데 지난번엔 그런 일이 없다고 했잖아요.

세현의 말에 지호가 사과를 하나 입에 넣고는 말했다.

- 그게.. 아까는 아무 것도 생각이 안 났는데.. 방금 아르바이트 했던 때를 생각하다보니까 떠올라서요.

지호의 말에 세현은 고개를 끄떡였다.

- 그런데 소리가 들린 거예요?

세현의 말에 지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그게... 귀로 들린다기 보다 그냥 느낌 같은 거였어요. 소리가 들린다는 느낌.

- 느낌?

세현은 지호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청각으로 감지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느낌으로 감지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 예. 뭔가가 들린다는 느낌.

지호의 말에 세현은 여전히 의아한 표정으로 지호에게 물었다.

- 그럼 지하실로 내려간 것도 그 느낌 때문이었어요?

- 예. 아마도 그런 것 같아요. 전에도 뭔가가 있다고는 느껴졌는데... 그래서 항상 뭔가 확인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니까...

- 그러니까?

세현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호를 쳐다보았다. 지호는 민망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 그게.. 뭐 그런 거 있잖아요. 그냥 아무 표시도 안 된 상자 같은 거요. 뭔가 있을 것 같다. 확인해 보고 싶다는 거. 그러다가 결국 상자를 열게 되잖아요.

지호의 뜬금없는 말에 세현은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문했다.

- 상자를 여는 거? 그게 무슨 말이죠?

- 그게... 상자를 여는 것처럼 무언가 있을 것 같아서 지하실로 내려갔는데... 거기서 정말로 그런 걸 볼 줄은 몰랐어요. 지금도 생각하면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예요.

지호의 말에 세현은 고개를 끄떡이다가 궁금한 걸 물었다.

- 그런데 왜 도망가지 않았지요? 귀신을 봤다면 누구나 놀라서 도망가는 게 먼저 아닌가요?

세현의 말에 지호는 다시 쑥스러운 듯이 머리를 긁었다.

- 사실 그게요. 제 친구 하나가 예전에 그랬어요. 호기심이 널 죽일 거라고... 그 때 전 그냥 확인해보고 싶었거든요.

세현은 그런 지호의 태도에 더 궁금증이 생겼다.

- 거기서 뭘 확인해 보고 싶었던 거죠?

지호는 세현의 말에 자신감이 붙은 듯이 말을 이었다.

- 음.. 내가 남들하고 다른 것들을 보는 게 그냥 단지 환영이라는 거요. 전에 수술을 받을 때 의사가 말했어요. 수술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고.

- 부작용이요?

- 네. 퇴원할 때 거기 의사 선생님이 환청이나 환상이 보일 수도 있다고 이야기 했어요. 뇌의 혹을 제거하면서 인지하는 능력이 있는 뇌의 일부분을 같이 제거했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제가 봤던 그 여자도 단순히 환상일 거라 생각했어요.

지호의 말에 세현은 곰곰이 생각을 정리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술을 한 의사가 지호에게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더욱이 그 병원이 톰슨 병원이라면. 세현은 지호의 말을 계속 들었다.

- 그래서 땅을 파보았죠. 날 무섭게 하는 이 느낌이 단지 환영일 뿐일 거야하고 생각하면서요. 그런데... 그런데 진짜 시체가 나왔죠.

- 음...

세현은 지호의 말에 신음성을 냈다. 그러자 지호는 조용히 세현을 부르며 물었다.

- 저 의사 선생님이시죠?

- 네.

지호는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 제가 미친 걸까요?

세현은 환하게 웃어주며 말을 했다.

- 글쎄요. 그렇진 않아 보이는데요.

세현의 말에 지호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 그럼... 정말.. 정말 제가 귀신을 봤던 걸까요?

지호의 질문에 세현은 아무 말 없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다음 날 아침 석호는 지난 밤 지호가 말했던 섬김 고아원을 찾아갔다. 고아원은 천주교 단체가 운영하는 곳이어서 그런지 석호에게는 낯선 풍경이 아니었다.

사제복을 입은 석호가 고아원 안으로 들어서자 놀이터에서 놀던 아이들이 모두 석호 쪽을 쳐다보았다.

- 와! 신부님이다.

- 근데 신부님이 너무 잘 생겼다.

- 히히히. 이번에 새로 오시는 신부님인가?

- 할아버지 신부님은 그럼 다른 데로 가는 거야?

- 저 신부님이 왔으면 좋겠다.

석호가 놀이터를 지날 때 아이들은 석호를 보며 저마다 한마디씩을 했다. 석호는 구김살 없어 보이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빙긋이 웃으며 건물 내부로 들어갔다.

그리고 복도 가운데 있는 원장실 문을 노크하자 안에서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 들어오세요.

석호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안에 있던 고아원장이 일어섰다.

- 실례합니다.

- 누구시죠?

- 안녕하세요. 저는 명동 교구에 있는 장석호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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