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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계(逐界)-쫓겨난 이들의 세계-241화 (241/309)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Ep2 - 9. 끔찍한 상황(4)

- 그기... 엄청 똑같았슈. 츰에 들어오실 때 반바지 입으셨잖아유. 그 때 무릎 위의 점... 그것..

천석의 말에 세현을 보며 말했다.

- 산삼을 점지해 준 여인이라... 뭐 행운의 여신 정도로 생각하면 되지.

세현은 철구를 째려보았다. 철구는 세현의 시선을 피하고는 시계를 보았다. 그 때 세현의 핸드폰이 울렸다.

- 네.. 잠시만요.

세현은 전화를 받고 철구에게 전화를 넘겼다.

- 성준 씨에요.

철구는 세현의 전화기를 받았다.

- 뭐? 복덕방이 통째로 없어졌다고? 뭐 그런...

철구는 성준이 읍내 경찰서에서 전해들은 얘기를 그대로 전했다. 경찰관 두 명이 최고 복덕방을 찾아갔는데, 문이 굳게 잠겨 있어서 강제로 열고 들어갔더니 안이 텅 비어 있더라는 것이었다.

- 음.. 넌 어디쯤이냐?

철구는 전화를 끊고 세현에게 전화기를 넘겨주며 말했다.

- 조금 있으면 도착한다니까 준비하고 있어.

그리고 천석을 보며 말했다.

- 세현 씨가 잘 도와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철구의 말에 천석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 고맙구먼유... 지가 혀드린 것두 읎는디...

철구는 천석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 아니에요. 일단 서울로 가서 장례 잘 치르구요. 저도 금방 올라갈 테니까. 천석 씨한테 줄 것도 있고 해서요.

얼마 후에 밖에서 차 소리가 들렸다.

- 왔나 보네.

철구가 밖으로 나오자 멀리서 걸어오는 성준이 보였다. 철구는 성준에게 다가가 현재 상황을 간단히 말을 하고 차를 빌렸다. 성준은 차 키를 세현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 조심해서 올라가세요. 오다 보니까 읍내에서 나가는 길이 조금 어둡더라구요.

성준의 말을 듣고 세현은 철구와 성준에게 인사를 했다.

- 조금만 고생해요. 서울에 와서 봐요.

세현이 인사를 하자 철구는 그냥 뚱한 표정으로 고개만 끄떡였다. 천석은 허리를 굽혀가며 철구에게 인사를 했고, 철구는 그런 천석을 막으며 차에 태워 서울로 보냈다. 두 사람이 떠나자 철구는 성준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 그게 말이 돼요? 집이 사람을 잡아먹다니..

- 그러니까. 도대체 왜 이따위 실험을 했는지 모르겠어. 더욱이 그 이장이란 작자가 미군하고 연결이 되어 있다고 하던데... 미군이 왜 이런 실험을 했을까?

철구의 말에 성준이 고개를 저었다.

- 글쎄요. 저도 도무지 알 수가 없네요.

철구는 성준과 함께 초소 안으로 들어와서 어떻게 하면 마을 사람들을 빨리 이곳에서 내보낼 수 있을까 생각을 했다. 한참동안 궁리를 했지만 마땅한 수가 보이지 않았다.

- 젠장, 그냥 막무가내로 내쫓는 방법밖에 없나?

그런데 그 순간 육중한 헬기 소리가 들렸다. 이런 산골에 헬기 소리가 들리자 철구가 의아한 듯이 성준을 보며 물었다.

- 뭐지? 웬 헬기 소리야?

철구의 물음에 성준이 어깨를 으쓱했다. 철구는 초소 밖으로 나왔다. 하늘에는 10대는 되어 보이는 군용 헬기가 날아가고 있었다.

- 이거 뭐 하자는 거지?

철구는 헬기가 날아가는 방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헬기 소리가 소란스럽기도 했지만, 더 소란스러운 소리가 마을 안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철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을 주민들이 무언가에 쫓기듯 마을 아래로 뛰어내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뒤에서 군복을 입은 누군가가 마을 사람들을 잡아채서는 데려가는 것이었다.

- 저 새끼들 뭐야!

철구는 마을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성준 역시 철구의 뒤를 따라 달렸다. 한참을 달리다가 철구가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철구가 멈춰 서는 것을 본 성준 역시 그 자리에 멈췄다.

- 무전 소리야.

철구는 희미하게 무어라고 들리는 무전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 ...

철구는 무슨 말인지 자세히 들으려고 했지만 무슨 말인지 잘 들리지 않았다. 그 순간 성준이 말했다.

- 암구호에요.

- 암구호?

- 영어로 얘기하고 있는데... 델타(Delta).. 오프셋(Offset)... 리빙(living)...

성준이 희미한 무전 소리를 들으며 말했지만, 도무지 무슨 내용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건 성준 역시 마찬가지였다.

- 딜리트(Delete)..

성준이 철구 옆으로 다가와 말했다.

- 일단 몸을 숨겨야 돼요.

성준의 말에 철구가 성준을 쳐다보았다. 성준은 그 무전 소리에 여전히 귀를 기울이며 조그맣게 말했다.

- '딜리트'는 공병에서 흔적을 지우라는 의미로 사용돼요.

- 흔적을 지우라고?

- 그게 사람이 되었건, 기지가 되었건 없애는 거죠. 정보과에 있을 때 미군과 같이 일한 적이 있거든요.

성준의 말에 철구는 성준과 함께 길옆에 있는 풀숲으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몇 명의 미군이 그 길을 따라 내려왔다.

- 미군이 왜?

그런데 그 순간 자신들이 나온 초소 쪽을 향해 미군 한 명이 뭐라고 소리치더니 아무 반응이 없자 화염방사기로 불을 뿜어댔다.

그러자 순식간에 초소가 불에 타올랐다. 그리고 몇 명의 미군은 초소 쪽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철구는 그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 저 새끼들 우리를 죽이려고 온 거야?

성준은 철구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죽이려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일단 사람이 있는지 확인을 하고 불을 지르는 것으로 봐서는...

그런데 그 순간 산 위 쪽에서 엄청난 불길이 치솟았다. 철구와 성준은 어마어마하게 피어오르는 불길에 넋을 잃었다.

미군 몇 명이 서둘러 산으로 다시 뛰어올라갔다. 철구는 비탈을 타고 조금 위로 올라갔다. 그러자 마을 안의 상황이 조금 더 명확하게 보였다.

방호복을 입은 사람들이 마을에 있는 집을 향해 화염방사기로 불길을 쏘아대고 있었다. 집을 빠른 시간 내에 전소(全燒)시키고 있었다. 그건 마을 전체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 마을을 지우고 있어.

철구의 말에 성준 역시 고개를 끄떡였다.

- 이 새끼들...

철구가 밖으로 뛰어나가려 했지만, 성준이 철구를 가로막았다.

- 가면 우리도 마을 주민들처럼 잡혀갈 거에요. 일단은 여기서 상황을 지켜봐야 돼요.

철구는 성준의 말에 이성을 찾고 그 자리에 숨어서 불타는 마을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마을이 모두 불에 타 버리자 미군들과 방호복을 입은 사람들은 일사분란하게 산 위로 올라갔고, 얼마 후 헬기 소리가 들렸다.

마을이 모두 불타고 매캐한 연기만이 마을이 있던 자리에 가득 차 있었다. 사방이 조용해지자 철구와 성준이 밖으로 나와 마을이 있던 자리를 보았다.

모두 불타버린 곳. 이곳이 집터였다는 걸 알아볼 수 있는 흔적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벽을 쌓았던 벽돌과 시멘트마저 모두 강한 화염에 녹아버렸던 것이었다.

- 이게 뭐야. 이 새끼들.. 마을 사람들은 어디로 데리고 간 거야?

철구의 부질없는 외침에 아무도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철구는 분노에 찬 눈으로 하늘을 노려 보았다. 사람이 깃드는 곳은 편안함과 안심이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외부가 주는 불안함과 두려움, 추위와 더위를 피하고 안정과 휴식을 위해 집에 깃든다.

그런데 집이 이러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언제든지 이 안에서 살아질 수 있다는 불안이 커지면 더 이상 그곳에 머물 수 없게 된다.

그건 외부의 막연한 공포보다 더 두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과 더불어 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인간의 기본적인 생존권을 침해한 가장 악질적인 범죄를 저지른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것으로 인해 생명을 잃은 사람도 있기에 용서할 수 없는 범죄였다. 하지만 그것을 증명할 수도, 그들에게 따져 물을 수도 없었다.

이런 무기력한 현실에 철구는 마음이 아팠다. 분명 눈앞에 존재하는 불의한 세력이 있는데,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원망스러웠다.

- 개새끼들.

철구는 그저 하늘을 향해 욕을 해대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철구는 한참동안 매캐한 연기 사이에서 하늘을 노려보다가 성준과 함께 마을에서 내려와 서울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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