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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계(逐界)-쫓겨난 이들의 세계-238화 (238/309)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Ep2 - 9. 끔찍한 상황(1)

9. 끔찍한 상황

석호는 의식을 잃어버린 유 씨의 상반신을 부여잡고 있었지만, 석호 역시 점점 의식이 흐려졌기에 유 씨의 상반신을 놓쳐버렸다. 그리고 점액질이 유 씨를 감싸며 몸을 녹이는 것을 보고는 석호 역시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 여기가 어디지?

석호는 분명 방금 전까지 집 안에서 유 씨를 끌어안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상한 공간 안에 자신이 있는 걸 알아채고는 의아해했다.

사방은 온통 흰색의 벽이었고, 빛이 어디서 오는지 가늠할 수 없지만 몹시 밝다고 느꼈다. 석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발걸음을 한 걸음 떼었다. 몸이 몹시 가뿐하고 기분이 몹시 좋았다.

- 뭐지?

석호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낯설고 아득한 공간감만 느껴질 뿐 여기가 어디인지 무엇을 하는 곳인지 알 수가 없었다.

- 아...

석호는 아늑한 기분에 저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환하고 밝은 기운이 온몸을 감싸고 있었기에 석호는 자신의 몸에서 나는 빛에 아름다움을 느꼈다.

그런데 그 순간 눈앞이 아득해지며 갑자기 몸이 빨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석호는 낭떠러지로 몸이 떨어지는 기분이 들어 몸을 허우적거렸다. 그리고는 바닥에 몸이 세게 부딪치는 느낌이 들었다.

- 윽...

하지만 석호는 자신의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음을 느꼈다. 살펴보고 그래서 안 것이 아니라 그냥 느낌으로 이상이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석호는 자신이 떨어진 자리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주변을 살폈다. 그 순간 석호의 눈이 커다래졌다.

- 여.. 여긴...

석호는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몹시 당황했다. 어두침침한 들판에서 나신의 남녀가 서로 마구 엉켜있는 모습이 끝이 없이 펼쳐져 있었다.

남자들은 마치 욕정이 채워지지 않는다는 듯이 눈이 벌건 채 자신의 아래에 있는 여자를 유린하고 있었다.

여자들은 여자들대로 남자와 마찬가지로 욕망에 사로잡혀 마구 허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한두 명이 그러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을 가득 채운 수만, 수십만의 사람들이 모두 육체의 탐닉에 빠져 있었다. 석호는 그 순간 두려움이 가득 찼다.

- 이건...

석호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단테의 신곡에서 나오는 지옥 제 2환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이들이 육욕에 빠져 채울 수 없는 욕망으로 죽을 수도 없는 쾌락을 추구하는 지옥. 석호는 고개를 저었다.

- 이... 이럴 수는...

석호는 자신이 지옥에 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단순히 사제이기 때문에 천국에 가야한다는 것이 아니라 단테가 정말 지옥을 겪고 온 것이 아니라면 이런 지옥은 그저 그의 상상에 불과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석호는 그리고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고 있지 않은 자신의 모습. 그리고 자신을 향해 뱀처럼 기어오는 나신의 여인들. 석호는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

- 이건 아니야..

석호는 뒤로 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저 앞에 펼쳐진 지옥을 벗어나기 위해 석호는 앞으로 내달렸다. 하지만 그것은 석호의 착각이었다.

자신이 그 지옥의 끝자락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한가운데 서 있었던 것이었다. 사방 어디로 도망을 가도 눈앞에는 끔찍한 육체의 탐닉만이 가득했다. 그 순간 들리지 않던 소리가 석호의 귀를 때렸다.

- 아아아..

- 으.. 으..

- 헉... 헉...

'철썩 철썩 철썩....'

동시에 이 공간을 가득 채운 소리는 색욕에 빠진 이들의 소리였다. 석호는 그 소리가 귀에 들리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귀를 틀어막고 주저앉았다.

- 으.. 으윽...

석호가 자리에 주저앉자 석호를 향해 기어오던 여자들이 석호의 몸을 자신의 몸으로 감싸기 시작했다.

몹시 부드러운 여성의 육체가 석호의 온몸에 들러붙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석호의 몸에 몸을 비벼 댔다.

일부는 석호의 몸에 자신의 성기를 부비며 신음소리를 흘렸다. 석호는 이질적인 느낌에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석호의 몸에 붙었던 여자들이 멀리 나가 떨어졌다. 석호는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을 향해 다시 달렸다.

발 아래로 누군가의 몸이 마구 밟혔지만, 석호는 이곳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이 달려가는 것이라 생각하고는 그런 감각을 무시한 채 마구 달렸다.

땀에 젖은 누군가의 등을 잘못 밟아 미끄러져 넘어졌지만 석호는 다시 벌떡 일어나 달렸다. 하지만 달려도 달려도 같은 모습들의 반복이었다.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 어떤 이유에서 이러고 있는지 따위를 떠올릴 여유조차 없었다. 석호가 숨이 차 자리에 멈춰 숨을 몰아쉴 때에는 어느 샌가 여자들이 석호를 향해 기어오고 있었다.

다들 가슴을 덜렁대고 엉덩이를 흔들며 석호를 유혹하듯 기어왔지만 석호는 그런 모습이 몹시도 역겹고 무서웠다.

석호는 어느 정도 숨이 돌아오자 다시 달렸다. 얼마를 달렸는지, 어디로 달렸는지 모를 정도로 한참을 달렸지만 석호는 그곳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숨이 턱에까지 차고,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였다. 석호는 그 순간 누군가의 허벅지를 비껴 밟으며 그 자리에서 뒹굴었다. 석호는 일어날 힘조차 없었다.

- 헉헉...

석호는 왜 이런 지옥에 자신이 빠져 있을까 고민하다 눈을 감았다. 자신의 죄로 이곳에 왔다면 벌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을 했다.

석호는 누워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먹구름이 잔뜩 끼어있는 하늘에는 간간이 번개가 치고 있었다. 그리고 어디서 불어오는 건지 모르지만 조금은 습하고 서늘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바람 안에도 욕망의 덩어리가 녹아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 누군가의 살이 자신의 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걸 느꼈다.

석호는 고개를 들어 자신의 다리 쪽을 쳐다보았다. 알지 못할 젊은 여자 하나가 자신의 발부터 시작해 무릎까지 혀로 핥고 있었다.

석호는 힘겹게 다리를 들어 여자를 제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건 의지일 뿐 몸은 그렇게 움직이지 않았다. 석호는 여전히 숨을 몰아쉬며 눈을 감았다.

- 이 환난의 지옥에서 제가 지은 죗값을 치르겠나이다.

석호는 조그맣게 입으로 중얼거렸다. 여인은 어느새 석호의 허벅지까지 올라와 석호의 허벅지를 핥고 있었다. 석호는 모든 것을 포기한 채 그냥 누워 있었다.

자신의 허벅지를 타고 오는 감각을 애써 무시하려고 했지만 자극적인 감각에 자신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석호는 그 자리에 누운 채 마음속으로 계속 기도를 올렸다.

- 당신의 죄 많은 아들이 지금 여기서 고난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당신께서 만드신 세상에서 한 줌의 소금이 되고자....

그런데 그 순간 석호는 아까와는 다른 이질적인 감각이 느껴졌다. 육체를 자극하는 감각이 아니라 자신을 감싸는 아늑한 기분이 들었다.

석호는 알 수는 없지만 엄마의 뱃속에 들어있는 기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석호는 자신도 모르게 한 마디를 흘렸다.

- 엄마...

석호는 그 아늑한 기분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몸이 한없이 편안해지고, 마음마저 한결 가벼워졌다. 석호는 이 아늑한 기분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방금 전 지옥과 같았던 상황은 까맣게 잊어버린 채 현재 자신을 감싸고 있는 이 기분만이 전부인 듯이 느껴졌다.

- 우리 아가. 힘들지?

먹먹한 목소리에 석호는 눈을 감을 채 고개를 들었다. 어디선가 들었던, 아니 너무 익숙해서 당연히 알고 있는 듯한 목소리였다. 석호는 가슴 속 깊이 울려오는 그 목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 힘... 힘들...

하지만 석호는 왠지 그 말을 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의지로 하지 않으려 하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우리 아기... 불쌍한 우리 아기.. 엄마가 미안해.

석호는 자신의 두 볼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음 속 깊이 숨겨져 있던 아련함과 그리움이 석호의 두 눈에서 눈물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석호는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 어... 엄마...

그 순간 석호는 가슴 속에 쌓았던 빗장이 풀리듯 그 동안 묻어두었던 그리움의 둑이 무너져 내렸다. 석호는 무언가를 손에 잡으려고 손을 허우적거렸다.

그리고 그 때 석호의 손에 부드럽고 따뜻한 누군가의 얼굴이 손에 부딪쳤다. 석호는 눈을 뜨고 그 얼굴을 보려고 했다. 하지만 두 눈은 여전히 떠지지 않았다.

석호는 맹인처럼 손으로 그 얼굴을 만졌다. 또렷한 콧날, 부드러운 눈매, 작은 입술... 자신과 아주 흡사한 얼굴이 손에 느껴졌다.

- 우리 아가. 일어나야지. 얼른.

석호는 손을 타고 울려오는 목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 이 순간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 아... 아뇨. 일어나기 싫어요.

그러자 아까보다 더 부드러운 목소리가 석호의 머릿속을 울렸다.

- 우리 아가. 힘들어도 일어나야 해요.

석호는 그 목소리에 다시 한 번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다시 일어났을 때는 이 기분이 사라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 엄마...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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