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Ep2 - 7. 알고 싶은 비밀(2)
철구는 의자에 기댄 채 혼자 중얼거리다 눈을 감았다. 세현은 철구를 보며 말했다.
- 그런데 사실 이 성분들이 익숙한 것이긴 하지만 이렇게 단일 성분으로 소량씩 배합해서 흘리기도 힘들죠.
세현이 말하는 동안 철구는 의자에 기댄 채 잠이 들었다. 세현은 잠든 철구에게 혼자 말을 했다는 게 어이없었지만 철구가 얼마나 긴장을 했고 피곤했을지 생각을 하고선 그냥 그런 철구를 이해했다.
- 아래에서 자요.
세현은 조금은 불편한 자세로 잠든 철구에게 말했지만 철구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세현은 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꺼내 철구 위에 덮어 주었다. 그리고는 철구의 까칠한 얼굴을 한 번 보고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 참 불쌍하게도 사네. 에휴...
세현은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을 때 석호가 밖으로 나왔다.
- 철구 씨가 잠들었군요.
석호의 말에 세현이 대답했다.
- 이틀 밤을 꼬박 새운 것 같아요.
세현의 말에 석호가 철구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모니터를 보고 말했다.
- 웬 성분 분석표죠?
그러다가 갑자기 '아!'하고 탄성을 내뱉고는 말했다.
- 그 때 방에서 나온 것이로군요.
석호의 말에 세현이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 대단한 건 없더라구요. 그냥 무기물 덩어리였어요.
- 그렇군요.
석호는 세현의 말에 모니터를 잠깐 쳐다보았다. 그 때 모니터에서 대장이 타이핑 친 글이 나타났다.
'철구 아저씨가 빼낸 이장 핸드폰 정보를 분석했다.'
그러더니 파일들이 주르륵 나열이 되었다. 그리고는 다시 글자가 나왔다.
'특이점은 없다. 사진도 거의 의미 없는 것들이고 전화번호도 대부분 마을 사람들 번호다. 물론 그 중에 전화번호만 있는 것들을 찾았는데, 두 개를 제외하고는 회사나 대리운전 따위의 스팸 번호였다.'
석호가 모니터를 보며 말했다.
- 말로 하면 되지 왜 타이핑을 쳐요?
석호의 말에 다시 글자가 나왔다.
'철구 아저씨가 자서...'
석호는 자신도 모르게 빙그레 웃었다. 비록 사람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 대장이고, 무뚝뚝해 보이는 철구일지라도 그간 정이 쌓여서인지 대장 역시 철구에 대해 많은 배려를 하고 있었다.
- 그렇군요. 아무튼 그 전화번호 두 개는 뭐죠?
'하나는 읍내에 있는 복덕방 번호였다. 그런데 하나는 전화번호 검색이 안 되는 번호였다.'
대장의 말에 석호와 세현은 분명 그 전화번호에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물론 자세한 사항은 철구가 깨고 난 다음에 논의를 해야 되겠지만, 지금으로는 그게 가장 유력해 보였다.
- 아무튼 철구 씨가 일어나면 다시 얘기해 보죠.
석호의 말에 대장은 '알겠다.'는 글을 남기고 모니터 화면이 꺼졌다. 세현은 천석과 함께 식사를 준비했고, 석호는 동네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철구가 눈을 뜬 건 그로부터 두 시간 후였다.
- 음?
철구가 의자에서 일어나자 세현이 웃으며 말했다.
- 일어났네요.
철구가 기지개를 펴자 몸에서 우드득 소리가 났다. 철구는 아무리 긴장이 풀렸어도 이렇게까지 정신을 놓고 잠이 든 자신을 생각하자 순간 이 사람들에 대한 신뢰가 이 정도였나 싶었다.
아무리 피곤해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던 철구였지만, 아까 들어왔을 때는 자기도 모르게 긴장을 풀고 잠이 들었던 것이었다.
- 일단 밥을 먹고 얘기하죠.
밥상에는 여러 가지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철구는 천석이 자리에 없는 걸 보고 말했다.
- 할매가 다 한 건 아닐 테고.
철구의 말에 세현이 철구를 째려보며 말했다.
- 제가 다 한 거거든요. 뭐.. 맛은 보장할 수 없지만.
철구는 세현의 말에 어깨를 으쓱했다. 때마침 고추장을 푸러 갔던 천석이 들어왔고, 뒤이어 석호도 들어왔다.
- 어째 마을이 조용하네요. 뭐 평소에도 그랬겠지만.
석호의 말에 세현이 말을 했다.
- 뭔가 꾸미고 있는 거겠죠. 아무튼 밥 먹어요.
석호는 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보고는 세현을 쳐다보았다.
- 이런 밥상 오래간 만인데요?
석호가 자리에 앉자 철구도 같이 앉았다. 세현이 국을 퍼서 각자의 자리에 놓고는 같이 앉았다. 천석은 상추와 깻잎을 씻어 상 위에 올리고는 석호 옆에 앉았다.
- 이렇게 다 같이 밥 먹는 것도 오랜만이네요.
석호의 말에 세현이 고개를 끄떡였다.
- 그러니까요. 우린 밥 먹는 거에 너무 소홀한 것 같아요.
세현의 말에 갑자기 모니터가 켜지더니 대장의 기계음이 들렸다.
- 나.. 나도 배고프다.
대장의 말에 석호가 모니터를 보며 말했다.
- 서울에 올라가면 다 같이 밥 한 번 먹어요.
석호는 그렇게 얘기를 하고 철구를 보았다. 철구는 국에 밥을 말아 먹으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석호를 보고는 고개를 끄떡였다.
석호와 세현은 밥 먹기 전에 기도를 하였고, 천석은 밥을 먹고 있는 철구와 기도를 하는 석호와 세현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짧게 기도를 마치고는 밥을 먹는데 다들 배가 고팠는지 서로 말이 없었다. 석호가 제육볶음을 먹으며 말했다.
- 정말 맛있는데요?
석호의 말에 천석이 대답했다.
- 그라게유. 이렇게 맛나는 건 지두 츰이여유.
석호는 천석이 한 것으로 알고 말했는데, 의외로 천석이 그렇게 말을 하자 자연스럽게 시선이 세현 쪽으로 향했다.
- 안 해서 그렇지 저도 다 할 줄은 알아요.
세현의 말에 석호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 그러니까요. 정말 맛있네요.
식사가 끝나자 석호가 철구를 향해 말을 했다.
- 내일 오전에 읍내에 갔다 와야 할 것 같아요.
석호의 말에 철구가 고개를 끄떡였다.
- 볼 일도 있지만, 아까 대장이 이장 핸드폰 파일을 분석해서 알려줬는데, 거기에 이상한 번호가 있다고 해서요. 하나는 읍내 복덕방 번호였고, 다른 하나는 밝혀지지 않는 번호라더라구요.
석호의 말에 철구가 대답했다.
- 아마 이장에게 일을 지시하는 누군가의 번호일 겁니다. 제가 통화하는 걸 봤거든요.
철구의 말에 석호가 고개를 끄떡이고는 말했다.
- 일단 그 번호는 대장이 더 알아보기로 했고, 저는 복덕방에 한 번 가보려구요.
- 복덕방이라... 뭔가 냄새가 나는군요. 이장하고 복덕방 사람하고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르니까 조심하시구요.
철구의 말에 석호가 철구를 안심시키는 말을 했다.
- 내일은 사제복을 벗고 집 구하는 것처럼 하고 다녀야죠.
철구는 석호의 말에 고개를 끄떡였다.
- 아무튼 정보가 더 모아야죠. 신부님께서 고생 좀 해 주세요.
철구의 말에 석호가 웃으며 말했다.
- 고생이랄 게 있나요. 아무튼 뭔가 생각지 못한 게 있는 것 같아요.
석호의 말에 철구가 말했다.
- 뭔가 터질 것 같은 기분이군요.
철구의 말에 석호는 이미 많은 일을 겪은 자신들이기에 더 이상 힘든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더 불길한 느낌만 주시네. 후후.
다음날 읍내로 내려간 석호는 제일 먼저 읍내의 성당으로 갔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잠시 기도를 올리고는 사제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안에 있던 고 신부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석호를 맞이했다.
- 신부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해 놨습니다.
석호는 고 신부에게 인사를 했다.
- 번거롭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석호의 말에 고 신부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 번거롭다뇨. 장 신부님과 함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고 신부의 말에 석호는 얼굴을 붉혔다. 자신보다 연배가 더 높은 고 신부의 말에 몸 둘 바를 몰랐다.
-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석호는 서로 간의 인사치레를 길게 하기보다 중요한 일을 처리해야 했기에 그쯤에 끝내고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석호가 일을 하려는 걸 눈치 채고 고 신부가 말을 했다.
- 그럼 저는 잠깐 나가 보겠습니다.
석호는 고 신부를 돌아보며 말했다.
- 네. 감사합니다.
고 신부가 나가자 석호는 품에 품고 있던 USB 장치를 꺼냈다. 그리고 노트북에 그 USB 장치를 연결하자 자동으로 보안 메일 창이 열리고 메일을 수신했다.
슈테판 추기경에게 온 메일과 임 박사에게 온 메일이 한 통 있었다. 슈테판 추기경에게서 온 메일을 먼저 열었다. 안에는 일상적인 안부와 벨기에 사건 처리 결과가 있었다.
벨기에 사건은 신흥 종교 단체의 집단 자살 사건으로 석호가 한국으로 오기 전에 맡았던 사건이었다. 벨기에뿐만 아니라 유럽의 여러 유명인들과 연결되어 아주 복잡한 사건이었으나 결론은 아주 단순했다.
마약과 집단 무의식을 이용한 사교 집단이었던 것이었다. 마틸다 스캔들이라고 세간엔 퍼졌지만 그 사건에 유명 정치인과 가톨릭 사제까지 포함되어 있어서 유야무야 덮여버렸다. 석호는 메일을 지우고 임 박사가 보낸 메일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