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Ep2 - 6. 죽음의 위기(2)
- 아마 철구 씨가 없다는 걸 알고 해코지를 하러 올 지도 몰라요. 천석 씨도 그렇고.
석호는 세현을 아래로 내려 보내고 자신은 핸드폰에 나온 맵을 보고 산등성이 아래로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조금 아래로 내려오자 나무가 휘어지듯 자라 있었다. 석호는 휘어진 나무의 가지를 잡았다. 그리고 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 꽤 높군.
석호는 세현에게 철구의 안위에 대해 무사할 거라고 자신 있게 얘기는 했지만 정작 본인이 몹시 불안했다.
- 이놈들 가만 안 두겠어.
석호는 철구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다. 비록 자신이 사제의 몸이라지만 철구의 한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철구가 이렇게 비명에 간다면 자신도 편히 살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물론 철구가 이리 쉽게 죽을 것이라고 생각지는 않았지만 산비탈을 내려오는 석호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가슴을 졸였다.
석호는 아래에 자란 나무에 발을 걸치고 다음 나무로 손을 뻗었다. 아래는 조금 가파른 비탈이어서 만약 나무를 놓치면 자신도 철구처럼 아래로 떨어질 것처럼 보였다.
석호는 마음이 다급했지만 자신마저 떨어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 최대한 조심하면서 아래로 내려갔다.
- 저 쪽 나무까지 가면 되겠군.
석호는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나무둥치가 튼튼해 보이는 나무쪽을 보며 비탈 위로 미끄러졌다. 가파른 비탈에서 미끄러지며 내려가자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그러다 자신이 눈으로 봐둔 나무에 발이 닿자 재빨리 손을 뻗어 나뭇가지를 잡았다.
- 휴...
석호는 한숨을 한 반 내쉬고 다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있는 것 아래쪽으로 작은 나무들이 나란히 자라고 있었고 그 아래로는 계곡물로 곧바로 떨어지는 낭떠러지였다.
석호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자신이 있는 곳보다는 그나마 덜 가파른, 그러나 그곳조차도 미끄러지면 바로 계곡 아래로 떨어질 만한 경사였다.
석호는 일단 내려갈 만한 곳이라 생각하고 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석호는 몸을 최대한 바닥에 밀착시키고 그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경사가 몹시 가팔라 석호의 몸이 저절로 밀렸다.
석호는 최대한 몸을 우측으로 돌리고 나무쪽으로 손을 뻗었다. 손가락 몇 마디만큼 손끝이 모자랐다. 석호는 이렇게 있다간 계속 미끄러져 내려갈 것 같아 조금 무리해서라도 나무쪽으로 가야할 것 같았다.
석호는 다리에 힘을 주고 몸을 조금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아까보다 조금 빨리 아래로 미끄러졌다. 석호는 더 미끄러지기 전에 나뭇가지를 잡아야 된다는 생각으로 몸을 나무쪽으로 손을 뻗었다.
몸이 아래쪽으로 확 쏠렸지만 석호는 그 순간 나뭇가지를 붙잡았다. 석호의 몸 때문에 흙들이 아래로 우수수 떨어졌다. 석호는 힘겹게 나뭇가지를 붙잡고 섰다. 그라고 아래쪽을 쳐다보았다.
- 이 정도면 미끄러져 내려 갈만 하군.
석호는 마음을 잡고 심호흡을 했다. 아래 끊긴 부분에서 정확하게 내닫기만 하면 아래까지 금방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석호는 아래를 응시하면서 나뭇가지에서 손을 떼었다. 석호의 몸이 비탈을 따라 조금 미끄러졌다. 석호는 속도를 조절하기 위해 사제복 안으로 손을 집어넣고 바닥에 손을 대었다.
작은 돌멩이들과 흙의 마찰로 인해 손바닥이 조금 아렸지만 신발로 지탱할 때보다는 속도가 조금 줄었다. 석호는 다음 몇 초가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온 신경을 발에 집중했다.
미끄러지는 속도가 생각보다 빨랐지만 이정도면 충분히 도약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몇 초 후 석호는 무릎에 힘을 주어 자리에서 벌떡 섰다. 그러자 아래로 내려가는 가속에 몸이 앞으로 휘청했다.
석호는 그 순간 발에 힘을 주어 가속을 받아 그 자리에서 도약했다. 석호의 몸이 순간적으로 하늘로 붕 떴고 석호는 몸을 최대한 웅크리며 앞에 보이는 나무를 향해 몸을 움직였다.
- 퍼벅.. 파박..
나무 잔가지에 석호의 몸이 부딪쳤고 석호는 몸을 웅크리고 있었기에 몸에 오는 충격이 예상보다 덜했다.
석호는 나무에 부딪친 이후에도 한참을 아래로 굴렀다. 그러나 최대한 몸을 웅크렸기에 등과 목에 상처를 입은 것 외에는 큰 부상은 없는 듯했다.
석호는 속도가 줄자 바닥을 짚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자기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푹 쉬었다.
자기와 불과 몇 미터 앞에 매우 거칠고 뾰족한 바위 하나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석호는 신앙인의 외침이 아니라 안도의 말로 "하느님 감사합니다."하고 외쳤다.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보자 바위 아래로 계곡이 보였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자기가 내려온 길을 보았다. 한 30미터는 족히 되어 보였다.
석호는 눈을 내려 계곡을 보았고 이 정도 높이에 그 계곡으로 떨어졌다면 분명 의식을 잃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물의 흐름을 따라 아래로 걸음을 옮겼다.
물을 따라 내려가자 물을 가르는 커다란 바위가 보였다. 한 쪽은 계곡 아래로 내려갔고 다른 쪽은 산 사이의 천연 동굴 쪽으로 흘렀다.
석호는 바위 가까이로 뛰어 옮겼다. 그리고는 아래로 흐르는 물의 흐름을 잘 살폈다. 의식이 없는 상태로 떠내려갔다면 아무래도 물살이 빠른 쪽으로 몸이 움직였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석호는 바위가 동굴 쪽으로 더 많이 깎인 것을 보았다. 그리고는 동굴 안쪽을 쳐다보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그 안은 몹시 어두워보였다.
석호는 동굴 안쪽으로 귀를 기울여 보았다. 안에서는 별다른 소리가 들리진 않았다. 석호는 자신의 주머니 안에 있는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플래시를 켜고 동굴 안을 비춰 보았다.
안쪽은 양 옆에 약간을 제외하고는 전부 물이 흐르고 있었다. 석호는 차가운 물에 몸을 담갔다.
물에 흘러갔다면 분명 이곳으로 왔을 테고, 동굴이 점점 넓어지는 것으로 보아 이곳의 수심은 점점 얕아질 테니 분명 이 부근에서 철구가 멈추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석호는 안쪽으로 조금씩 움직였다.
카메라 플래시를 켜고 물을 헤치며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은 생각보다 무척 깊었다. 그리고 밖에서 보았을 때와 다르게 안으로 갈수록 폭이 좁아졌고, 물살은 더 빨라졌다.
- 음.. 안 되겠는데...
석호는 가슴 안으로 손을 넣었다. 그리고 안주머니에 있던 성경책을 꺼냈다. 석호는 잠시 성경책을 응시했다.
- 최베드로 신부님께서는 잘 계실까?
석호는 빛바랜 성경책을 슬픈 눈으로 바라다보았다. 자신의 스승이자 아버지와 같았던 최베드로 신부가 남겨준 마지막 선물이었기에 석호에게는 무엇보다도 소중한 물건이었다. 석호는 성경을 잠시 응시하다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이런 상황에서 몇 장 찢어도 안 혼내시겠지 뭐.
석호는 성경의 뒷부분 네 장을 찢었다. 그리고 핸드폰을 감쌌다. 모서리 부분은 돌돌 말아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핸드폰을 보았다.
아까보다 빛이 많이 약해보였다. 석호는 핸드폰을 갑자기 물 안에 넣었다 뺐다. 그런데 놀랍게도 핸드폰을 감싼 성경책은 물에 하나도 젖지 않았다.
- 최베드로 신부님도 참 대단하신 분이야.
석호는 성경책 한 장 한 장에 기름을 먹여 물에 젖지 않게 만든 최베드로 신부를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 이럴 때가 아니지.
석호는 다시 성경책을 가슴에 품고 핸드폰을 들고 앞으로 나갔다. 동굴 물길은 석호의 예상대로 점점 깊어졌고, 나중에는 석호가 헤엄을 쳐야 할 정도였다.
석호는 성경의 책장으로 감싼 핸드폰을 손에 꽉 쥐고 물살을 헤쳐 나갔다. 한참을 앞으로 나갔더니 폭은 넓지만 그리 높지 않은 폭포가 보였다.
만약 동굴 구경을 왔다면 장관(壯觀)이라며 감탄했겠지만, 철구가 물에 휩쓸려 간 상황에서 이런 폭포는 그 높이가 아무리 낮다고 하더라도 위험한 것임에 분명했다.
석호는 다급하게 그 폭포를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석호가 폭포 아래로 내려가자 깊은 연못이 있었고, 그 아래로는 다시 수심이 낮아졌다.
- 여기쯤일 텐데...
석호가 좌우를 돌아보며 무언가를 확인할 때였다.
- 휙...
석호는 무언가가 자신을 덮쳐오는 느낌이 들어 재빨리 몸을 피했다. 그러나 놈이 더 빨랐다. 석호는 비록 낮은 물이지만 쓰러지며 물속에 처박혔다.
- 이 새끼. 죽었는지 확인하러 왔냐?
석호는 뒤에서 들리는 낯익은 목소리에 외쳤다.
- 저... 저에요..
물을 먹어가며 소리를 치자 뒤에 남자는 놀란 듯이 석호를 일으켜 세웠다.
- 신부님, 여긴 어떻게...
석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농담처럼 얘기했다.
- 우린 어두운 곳에서 만나면 싸우는 처지인가 보네요. 켁켁..
철구는 석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지하 연구실에서도 무턱대고 싸우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 아, 죄송해요. 저는 제가 죽었는지 확인하러 온 놈들인 줄 알았어요.
석호는 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말했다.
- 제가 그들보다 빨리 왔나 보네요. 그리고...
석호가 흐린 플래시 불빛으로 철구를 비추며 말했다.
- 안 다치신 것 같아 다행이네요.
석호의 말에 철구가 고개를 끄떡였다.
- 놈들 뒤 쫓다가 갑자기 발이 푹 꺼지길래 뭔가 있는 걸 알았죠. 그래서 최대한 몸을 웅크리고 구르다가 아래에서 물소리가 들려서 그리로 뛰어내렸죠. 물론 물에 빠지면서 정신을 잃어서 여기까지 왔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