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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계(逐界)-쫓겨난 이들의 세계-222화 (222/309)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Ep2 - 6. 죽음의 위기(1)

6. 죽음의 위기

하늘이 유난히 어두웠다. 하지만 어두운 하늘보다 더욱 음산하게 느껴지는 건 새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적막함 때문이었다.

모든 것이 지워진 듯한 완벽한 무의 상태가 펼쳐져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저 어두운 공간과 느끼지 못할 시간, 그리고 그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적막. 바람조차 미동도 하지 않았고, 그 흔한 풀벌레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저 눅눅한 습기와 발바닥으로 느껴지는 알지 못할 미끄러움. 죽음보다 거한 공포가 온몸을 사로잡았다. 어둠이 주는 공포, 미지가 주는 두려움, 그리고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베일 뒤의 미래.

차라리 곧 죽을 목숨이라는 걸 안다면 무서움은 덜 할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깜짝 놀라게 무언가라도 툭 튀어 나왔으면 하는 어처구니없는 바람까지 생겼다. 그러나 꽤 긴 시간이 흘렀지만 이 상황을 반전시킬 만한 무언가는 없었다.

그저 지루하게만 흘러가는 시간과 어찌될 줄 모르는 상황만이 온몸과 신경을 감싸고 있었다. 철구는 살면서 처음으로 두렵다는 느낌을 받았다.

죽음의 위기나 정체절명의 상황은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모든 것을 놔도 된다는 생각으로 그 상황을 맞이했기에 더 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죽을 위기나 긴박한 상황이 아님에도 철구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두려움이 피어올랐다.

-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철구는 혼자 중얼거렸다. 하지만 누구도, 하다못해 자기 자신마저도 대답할 수 없었다.

- 침착해야 해.

철구는 다짐하듯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던 철구였지만 디금 상황만큼은 철구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철구는 뭔가 도움이 될 만한 게 없나 싶어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온 몸이 물에 젖은 듯 주머니 안에서는 물기가 느껴졌다.

물에 젖은 담뱃갑과 스위스 아미 나이프, 그리고 축축한 라이터가 손에 잡혔다. 주머니 안에서 라이터를 꺼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왜 자신이 여기에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천석의 집 앞을 감시하는 누군가를 뒤쫓다가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진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여기는 분명 낭떠러지 아래 어딘가가 분명한데 자신이 어떻게 살아 있는가가 궁금했다. 몸이 물에 젖은 걸 보면 분명 물에 떨어진 것이 분명한데 떨어진 이후에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 기절했었나보군.

철구는 자신이 낭떠러지에서 떨어진 것조차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자신을 보며 피식 웃었다. 라이터의 물기를 빼내기 위해 마구 흔들었지만 라이터는 켜지지 않았다.

이대로 움직이자니 갈피를 못 잡을 것 같아 철구는 이 자리에 머무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섣불리 움직였다가 어두운 곳에서 더 험한 꼴을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밤이야, 낮이야?

철구는 그렇게 투덜거리며 땅바닥에 철퍼덕 앉았다. 아까는 몰랐는데 엉덩이로 쭈그려 앉아보니 땅에 이끼가 가득 끼어 있다는 걸 알았다.

- 죽지 않을 공간이라는 건데...

철구는 이끼가 끼어 있는 곳은 독성이나 신체에 해를 입힐 만한 무언가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아까보다는 조금 더 편하게 앉았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 건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이 범인이라면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가 있어야 했다. 그 놈들은 단순한 사이코패스들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본인의 이익이 없다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족속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노인을 납치했다는 게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았다.

- 도대체 뭐지?

철구는 앉아서 혼자 중얼거렸다.

- 또 걱정으로 하늘이 무너지겠군.

한편 세현은 철구가 사라진 장소에 도착해서는 철구를 불렀다.

- 철구 씨! 강철구 씨!

사방을 두리번대다가 철구가 사라진 산 아래를 내려다보며 소리를 질렀다.

- 철구 씨! 강철구 씨!

그러나 산 아래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 철구 씨! 철구 씨!

세현은 목이 터지게 외쳤지만 여전히 산 아래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 뭐... 뭐야...

세현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덜덜 떨었다. 철구가 사라지다니. 아니 어쩌면 철구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세현은 더욱 몸이 떨려왔다.

한 번도 철구가 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 세현으로서는 본인의 죽음보다 더욱 처절하게 느껴졌다.

- 철구 씨... 흑흑...

세현은 철구가 사라진 곳을 뜨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어디선가 철구가 나타나 '할매, 왜 울고 난리야? 누가 죽었어?' 할 것만 같았다.

세현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래가 어두운 것이 몹시 높아 보였다. 상식적으로 이곳에 떨어지면 즉사(卽死)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세현은 고개를 크게 저었다. 철구는 이보다 더한 상황에서도 살아 돌아오지 않았던가.

- 아냐. 살아 있을 거야. 이렇게 쉽게 죽지 않아.

세현은 눈물을 닦고 다시 아래로 소리쳤다. 너무 높아 감히 내려갈 엄두가 나지 않았기에 세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래를 보며 소리를 치는 것 외에는 없었다. 세현이 한참을 아래를 향해 소리를 질렀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 때 산 아래에서 누군가가 빠르게 올라왔다. 세현은 그 사람을 보더니 자리에 일어나 가까이 다가갔다.

- 무슨 일이세요?

세현은 그 사람의 손을 잡고 이끌며 말했다.

- 신부님.. 철구 씨가.. 이 아래로...

세현의 말에 석호는 놀라서 외쳤다.

- 네? 이 아래로 떨어졌다구요?

석호의 말에 세현이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끄떡였다. 세현은 눈물이 터져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으며 말했다.

- 천석 씨 집을 누군가 감시하고 있다면서 이 위로 올라왔는데... 제가 뒤에 따라오다가 철구 씨가 이 아래로...

다급한 마음에 말을 하느라 세현답지 않게 앞뒤가 맞지 않았지만 석호는 알았다는 듯이 세현의 등을 토닥였다.

- 너무 걱정 마세요. 철구 씨 같은 강인한 분이 여기서 떨어졌다고 해서 크게 잘못 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석호는 아래를 한참을 쳐다 보다 말을 했다.

- 아래.. 물소리가 들리는군요.

석호의 말에 세현이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아까는 당황해서 들리지 않던 물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 저기 물로 떨어졌다면...

석호는 다음 말을 생략한 채 전화기를 꺼냈다. 석호는 핸드폰 아래에 전파 증폭기가 달려 있어 몹시 크게 느껴졌다.

- 대장, 지금 이 전파가 잡히는 지역 자세한 지도가 필요해요. 중요한 일이니까 빨리 처리해줘요.

석호의 다급한 말에 대장은 반문하지 않고 지도를 석호 핸드폰으로 전송했다.

- 국방부에서 인공위성을 통해 만든 것이다. 우리나라에게 가장 정확하다.

석호는 받은 지도를 확대했다. GPS를 통해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한 후 그 자리로 지도를 옮겼다.

약간의 오차는 있었지만 아주 세밀한 지도가 나왔다. 조그만 오솔길까지 다 나온 것을 보고 석호는 지도를 더욱 확대했다.

- 이 부근인데...

석호는 확대했던 지도를 축소했다 다시 확대하면서 정확한 위치를 찾았다.

- 여기군요.

석호는 지도를 확대했다. 지도에는 그저 산등성이와 그 아래 지형처럼 보였지만 석호는 그것이 이 낭떠러지임을 알았다.

- 아래 계곡이 흐르는군요. 이 계곡은 저 아래쪽으로 연결되고...

석호는 지도 화면을 끄고 세현에게 말했다.

- 혼자 여기 있으면 위험하니까 천석 씨 집안에 들어가 있어요. 마을 사람들도 우리를 좋게 보지 않고 있는데 혼자 이렇게 있으면 더 위험할 수 있으니까요.

석호는 전화기를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 철구 씨가 낭떠러지에서 떨어졌습니다.

그러자 전화기 너머에서는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 선배님이요? 그 녀석들인가요?

- 아직 모릅니다. 다만 응급 치료가 필요할 수도 있는 상황인데, 아시다시피....

석호의 말에 성준이 말을 했다.

- 그건 제 선에서 해결할 수 있으니까 걱정 마세요. 많이 다쳤습니까?

- 아직 모릅니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졌거든요. 서울로 가시는 길인데 번거롭게 해서 죄송합니다.

석호의 말에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는 소리가 들리며 성준의 말소리가 들렸다.

- 그깟 서울이 문젠가요. 제가 119에 연락을 하고 그 쪽으로 바로 가겠습니다.

성준의 말에 석호가 말을 했다.

- 그럼... 찾는 즉시 연락드릴 테니까 산 아래서 기다려 주십시오.

- 네. 알겠습니다.

석호는 시계를 보았다. 시간은 이미 오후 네 시가 넘어갔다. 산 속에서의 경험상 해가 지려면 고작 한 시간정도밖에 남지 않았기에 석호는 마음이 급했다.

- 일단 제가 아래로 내려갔다 올 테니까 세현 씨는 집 안으로 피해 있어요. 여기를 보니까 일부러 바닥을 뭉개 놓은 것 같아요. 그리고 철구 씨를 이쪽으로 유인하고. 아무래도 마을 사람들이 우리를 많이 좋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석호의 말에 세현은 고개를 끄떡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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