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Ep2 - 4. 황당한 사건(4)
한편 석호는 처음 마을에 들어섰을 때부터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마을의 장군목을 지나칠 때에도 장군목이 점점 고사(枯死)하고 있다는 걸 느꼈고, 더 나아가 마을 주변의 분위기가 보통의 마을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그냥 기분 탓이려니 생각하였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천석이 석호에게 어머니가 사라진 게 자신이 부정한 꿈을 꾸었는데 산삼을 캐서 그런 것이라고 얘기하고, 어쩌면 그것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했을 때, 석호는 왠지 그 곳에 꼭 가봐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천석의 어머니가 그 곳에 있으리라는 생각 때문이 아니라 막연히 무언가가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석호는 천석이 말한 그 곳을 향해 걸음을 옮기자 마을에서 느꼈던 것보다 더 음산한 기분이 들어 자신도 모르게 몸이 조금 떨렸다.
꼭 그 곳에서 뭔가 안 좋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 조금은 답답했다.
무언가가 뚜렷하게 느껴지지만 그 느낌만 뚜렷할 뿐 무엇이 그렇게 느끼게 하는가에 대해서는 막연했기 때문이었다.
석호는 이 깊은 산 속에서 그런 기운이 느껴지는 건 필시 무언가가 자신을 경고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여기서 발걸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단순히 여기서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 아니었다. 위험한 것 같지만 꼭 들어가야 할 것 같은 막연한 의무감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곳은 마치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공간과 같은 느낌이었기에 석호는 더욱 이상한 기운을 느끼며 발걸음을 옮겼다.
몇 발자국 안으로 걸어 들어가자 석호는 순간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낯설면서도 아늑한 느낌이었다.
석호는 알 수는 없지만 마치 자궁과 같다는 생각을 했다. 몹시 편안하고 온화한 무언가가 자신을 감싸는 느낌이었다. 석호는 그런 아득함에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런데 그 순간 잠이 엄청나게 쏟아졌다.
석호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하지만 석호의 노력에도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석호는 이를 악물고 나무를 향해 몸을 돌진했다. 쿵하는 소리와 함께 석호의 몸이 뒤로 나가떨어졌다.
석호는 흔들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금 전만 해도 엄청나게 쏟아지던 잠이 싹 달아났다. 석호는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아까와 다르게 옅은 운무가 가라앉아 있었다.
- 이게 뭐지?
석호는 옅은 운무에서 약한 물비린내가 나는 걸 느꼈다. 그 순간 잠시 머리가 아찔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심장이 두근거리며 몸이 조금 움찔거렸다.
- 이 냄새는?
석호는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반응에 조금 당혹스러웠다. 자연 상태에서 이런 강한 자극은 거의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운무 안에서 아까보다 조금 더 짙은 향이 났다. 무어라 말하기 힘들었지만 아까보다 물비린내가 조금 더 심해졌고 마치 자신을 취하게 만들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 도대체 뭐지?
석호는 운무를 손으로 헤치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운무는 아까보다 조금 더 심해졌고 석호는 손수건을 꺼내 입과 코를 막았다. 그리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자 앞에는 한 사람이 누울 만한 크기의 너럭바위가 하나 보였다. 석호는 천천히 그 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자신의 발부리에 걸리는 무언가를 느끼고 고개를 아래로 돌렸다.
석호는 아까보다 짙어진 운무로 인해 고개를 깊이 숙여야만 발에 걸린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석호는 허리를 싶게 숙이고는 발에 걸린 것을 보았다.
- 끈끈이주걱이잖아?
석호는 자신의 발보다 조금 작은 끈끈이주걱의 줄기가 자신의 발을 감고 있는 게 보였다. 석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 도대체 여긴...
석호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 공간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수풀 안이라 음습한 것이야 그렇다고 하더라도 바깥 날씨와는 사뭇 다른 운무며 사람을 흥분시키고 유혹하는 향과 마치 자신을 부여잡으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보이는 끈끈이주걱까지 도무지 이해가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마치 저 너럭바위까지 가는 걸 막기 위해 온 공간이 노력하는 것처럼 보였다. 석호는 발에 힘을 주어 줄기를 끊고 앞으로 나갔다. 그 순간 석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 이건 산삼이잖아?
너럭바위 앞까지의 길은 온통 산삼 밭이었다. 중구난방으로 자라고 있었지만 이 정도의 산삼 군락이라면 인위적인 손이 닿지 않는 한 불가능해 보였다.
석호는 고개를 저었다. 여긴 마치 산삼을 지키려고 하는 진처럼 느껴졌다. 석호는 산삼을 밟지 않으며 한 걸음씩 조심스럽게 발을 옮겼다. 그리고 너럭바위 앞에 닿자 석호는 주의 깊게 바위를 살폈다.
바위는 윗부분이 몹시 반들반들하였다. 석호는 눈을 돌려 바위 옆면을 살펴보았다. 잘려 나간 단면이 한 쪽은 자연적으로 그렇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층이 진 채로 매우 거칠어 보였고 다른 쪽은 그와 반대로 날카로운 무언가로 잘린 흔적이 보였다.
- 이상한데?
이런 곳에 이런 바위가 있다는 것도 이상했지만 그 바위의 형태도 그리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석호는 바위 밑을 보기 위래 쪼그려 앉았다. 그 순간 무언가가 자신의 뒤로 접근하는 것이 느껴져 몸을 바위 왼쪽으로 굴렀다.
그리고 돌아다보니 놀랍게도 올 때는 보이지 않았던 이상한 풀들이 자신의 뒤를 덮고 있었다. 석호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몹시 당황을 했다.
- 뭐.. 뭐야?
석호는 몸을 피하며 그곳에서 빠져나오려고 했다. 그러나 자기가 가고자 하는 앞길이 잡목으로 우거져 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왠지 지금 여기를 벗어나지 못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석호는 옷이 조금 찢기더라도 여기서 벗어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석호는 몸을 빨리 하며 수풀 안으로 들어갔다. 누가 뒤쫓는 것도 아닌데 석호는 최대한 속도를 내며 달려 나갔다.
얼마나 달렸는지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 석호의 머리가 갑자기 맑아지고, 눈앞이 탁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석호는 그 자리에서 멈춰 서서 자기가 빠져 나온 곳을 쳐다보았다. 다른 곳보다 잡목이나 잡풀이 조금 더 많이 자란 것 외에는 크게 이상할 게 없어 보였다.
- 이상한 곳이군. 위험하기도 하고...
석호는 그 곳에 서서 사방을 돌아보았다. 자신이 들어온 길이 아니라 엉뚱한 방향으로 나왔기에 방향이 가늠이 되지 않았다. 석호는 시계를 보았다.
- 오후 세 시라...
그리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 태양이 저 쪽 방향이군.
석호는 여름 우리나라는 태양이 북동쪽에서 떠서 북서쪽으로 진다는 걸 떠올리고 현재 시간에 대입하여 그 방향을 대강 가늠했다.
- 그럼 이쪽이 남쪽 방향인데... 내가 빠져 나온 곳에서 서쪽으로 왔으니까.. 저 아래로 가면 되겠군.
석호는 혼자서 방향을 가늠하며 산을 내려갔다. 얼마 후 석호가 산 아래에 있는 천석의 집으로 내려오자 철구와 세현이 반갑게 석호를 맞이 했다.
- 오랜만이에요. 신부님.
세현이 반갑게 인사를 하자 석호 역시 반가워하며 말했다.
- 네. 잘 지내셨죠?
- 그럼요.
석호는 철구를 보며 말했다.
- 잘 지내셨죠? 서울 가서 한 번 뵙는다는 게...
석호의 말에 철구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이렇게 보면 되죠. 뭐.
철구의 말에 석호는 멋쩍게 웃었다.
- 하하하. 그런가요?
세 사람은 거실에 모여 앉아 얘기를 시작했다. 마을에서 '미옥'이란 여자가 또 실종이 된 것과 하얀 가루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석호 역시 자신이 천석이 말한 곳을 갔을 때의 상황에 대해 얘기를 했다.
- 갑자기 잠이 쏟아졌다구요?
석호의 말에 세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석호는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 마치 누군가가 작정하고 재우려는 것처럼 엄청난 졸음이 쏟아졌어요. 혹시 신화에 나오는 히프노스가 찾아온 줄 알았어요.
세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이었다.
- 혹시 그 곳에서 이상한 것들은 못 봤나요?
세현의 말에 석호가 고개를 끄떡였다.
- 다 이상했죠. 우선 우리나라에서 보기 힘든 식물군들을 많이 봤어요. 그리고 이건 제가 그 상황에 취해서 환상을 본 건지 아니면 진짜인지 모르겠지만, 식물들이 움직여 제게로 다가온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석호의 말에 철구와 세현은 석호를 쳐다보았다. 석호가 허튼 소리를 하지는 않는 사람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 말은 믿기가 어려웠다. 세현이 석호에게 말했다.
- 아까 몹시 졸렸다고 했죠? 아마 그 때문에 그렇게 느끼지 않았을까요?
세현의 말을 들은 석호가 고개를 끄떡였다.
- 아마도 그런 것 같네요.
철구는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석호에게 말했다.
- 신부님 다른 게 아니라 혹시 이 마을에 대해 아시는 게 있나요?
철구의 질문에 석호가 어깨를 으쓱했다.
- 저도 사실은 이 마을은 처음입니다. 그런데 아침에 왔을 때도 그렇고 아까 내려올 때도 그렇고 저에 대해, 아니 어쩌면 우리 모두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뭐 이분들의 삶의 방식이 있으니까 이해는 하지만 그래도 보통의 마을보다는 더 배타적인 것 같이 느껴졌죠.
석호의 말에 철구가 말을 더했다.
- 아까 천석 씨가 마을 회의에 다녀와서 그러더라구요. 신부님을 마을에 둘 수는 없다고. 산삼을 캐는 마을에 부정이 탄다나 하면서요.
철구의 말에 석호는 이해한다는 눈빛을 보냈다.
- 아마 그럴 겁니다. 저도 같이 수색을 하고 싶지만 그것 말고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따로 있을 거에요. 저는 마을 아래에 보면 조그만 산림 경비원 초소가 있거든요. 여기서 걸어서 한 30분 거리인데, 평소에는 안 쓰는 곳인데, 제가 산림청에 문의를 해 보니까 숙소로 이용해도 된다고 하더라구요. 일단 저는 그 곳에 머물도록 할게요.
철구는 석호의 발 빠른 대처에 고개를 끄떡였다. 자신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기민하게 움직이는 신부님의 모습은 항상 철구의 생각 이상이었다.
- 아무튼 수시로 연락을 드릴게요.
- 네. 알겠습니다.
철구는 일단 미옥을 찾는 일에 집중을 하겠다고 석호와 세현에게 말을 했다. 석호 역시 실종 신고를 하고, 경찰과 함께 한 번 올라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산 아래로 내려갔다. 세현은 석호가 내려가자 철구에게 말을 했다.
- 신부님이 저희보다 더 감이 좋은 것 같은데요?
철구는 세현의 말에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 똑똑하신 분이니까 아마 우리보다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거야.
철구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 마을 사람들이 우리도 그리 좋게 보진 않으니까 혼자서 밖에 나다니지 마. 난 일단 미옥 씨의 동선을 파악해 볼 테니까.
철구의 말에 세현이 얼굴을 조금 찌푸리며 말했다.
- 이 좋은 산을 놔두고 집구석에만 있으라구요?
철구가 세현을 보며 말했다.
- 이 봐. 놀러 온 거 아니라고 했잖아. 그리고 두 명이나 실종된 이 마당에 어딜 간다고...
철구의 타박에 세현은 입을 삐쭉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 어휴.. 나이만 먹었지 정신은 아직 애야. 애..
철구는 그렇게 푸념을 하며 미옥의 동선을 따라 이 곳 저 곳을 돌아다녔다. 물론 철구는 누군가가 자신을 계속 쳐다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누가 마을 주민인지 아직 알 수 없었기에 그냥 놔뒀다.
신경이 조금 쓰이긴 했지만, 아직 철구 역시 결정적인 무언가를 찾지 못했고, 아직 기본적인 정보조차 없었기에 그냥 마을의 지리와 마을 어느 곳에 누가 사는지만 파악하면서 돌아다녔다.
- 대장이 정보를 보내줘야 알 수 있겠군.
철구는 천석의 집으로 돌아오면서 낮게 한숨을 쉬었다..
- 뭔가 있는데... 그게 뭔지 모르겠네.. 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