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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계(逐界)-쫓겨난 이들의 세계-211화 (211/309)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Ep2 - 3. 현장에 도착하다.(5)

철구는 무언가를 얘기하려고 했지만 입마저 열리지 않았다. 여자의 얼굴은 흥분으로 인해 몹시 벌게졌고 여자는 철구를 끌어 침대로 눕혔다.

자신이 그렇게 발버둥을 치며 움직이려고 해도 움직이지 않던 몸이 그녀가 살짝 끌어당기자 무너지듯 침대 위로 쓰러졌다. 철구는 여자의 행동에 한계에 도달했지만 어떻게든 끝까지 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그것은 혜민에 대한 배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육체는 어차피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철구는 자신의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극도의 쾌감이 뇌를 자극하는 순간 한계점을 넘어버렸다. 여자는 만족한 얼굴로 자신의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올렸다.

- 어? 왜.. 왜...

철구는 여자의 얼굴을 보자 경악에 찼다.

- 세.. 세현 씨...

철구의 허리 위에서 빙긋이 웃고 있는 여자는 세현이었다. 철구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세현을 쳐다보았고 세현은 분홍색으로 피어오른 얼굴에 땀에 젖은 몸을 한 채 철구를 보며 미소만 짓고 있었다.

- 이. 이건 말도 안 돼...

철구가 고개를 젓자 세현은 허리를 숙여 철구의 입술이 입맞춤을 하고 일어났다. 철구는 자신의 몸에 속박이 풀린 기분이 들었지만 일어날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자신과 세현이 이런 짓을 벌이다니. 철구는 눈을 감고 입술을 깨물었다.

- 젠장.

철구는 주먹을 쥐고 침대 위로 내려쳤다.

- 젠장.. 젠장...

철구는 세현이 나간 쪽을 쳐다보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주변을 돌아보자 처음 봤던 공간이 아니었다. 철구는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낯선 이질감.

- 뭐지?

그 순간 철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주변을 살폈다. 자신의 옆에는 세현이 낮은 신음 소리를 내고 있었다. 얼굴이 빨개진 채 다리를 꼬고 있었다. 철구는 자신의 얼굴에 손을 대었다. 분명한 살 느낌이 났다.

- 꿈이었군.

철구는 문득 자신의 아랫도리를 보았다. 민망하게도 바지 앞섶이 젖어 있었다.

- 내가 미친놈이지. 이런 꿈을 꾸고.

철구는 세현이 자고 있다는 걸 확인하고는 이불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천천히 거실을 지나 현관문을 열었다. 새벽의 찬 공기가 철구의 흐리멍덩한 정신을 깨웠다. 철구는 밖으로 나가 앞에 있는 수돗가에서 물을 틀었다. 그리고는 호스를 들어 자신의 몸에 뿌렸다. 차가운 물의 냉기가 철구의 몸에 쫙 퍼졌다.

철구는 자신의 바지 앞섶에 물을 잔뜩 뿌렸다. 몹시 추웠지만 철구는 바지 앞섶이며 팬티 속까지 물을 뿌려 흔적들을 지웠다. 그리고 집과 한참 떨어진 곳까지 가서 옷을 벗어 물기를 짜냈다. 그리고 축축하게 젖은 옷을 다시 입고 집 안으로 걸었다.

사방이 칠흑같이 어두웠지만 철구는 올바른 방향으로 집을 찾았다. 그러다가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어 집 앞에서 집 전체를 쳐다보았다.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집이 왠지 꺼림칙하게 느껴졌다. 철구는 기분 탓이려니 생각을 하고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세현이 잠들어 있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축축한 옷을 말리기 위해 방 한 쪽 구석이 앉았다.

세현은 여전히 조금 상기된 얼굴로 몸을 꼬았다. 처음에는 피곤해서 그런가보다 싶었는데 세현의 행동이 점점 이상해졌다. 이불을 가랑이 사이에 끼고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졌다. 비음이 섞인 신음 소리까지 희미하게 흘렸다.

- 세현 씨도?

철구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석호에게 들은 얘기도 있었고 자신의 꿈도 있지만 둘은 남자였다. 한 사람은 노총각이었고 자신은 상당 기간 동안 홀아비였기에 그간 쌓인 욕정이 꿈을 통해 배출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현은 달랐다. 단순히 여자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세현은 육체적 관계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기에 이런 꿈을 꾸는 것이 그녀에겐 분명 악몽일 텐데 지금의 모습은 완전히 욕정에 사로잡힌 여자의 모습이었다.

- 뭔가 있어...

철구는 한동안 구석에 앉아 곰곰이 생각을 했다. 자신이 그렇게 잠에 빠진 것도 그렇고 꿈을 꾼 것도 모두 이상하기 느껴졌다. 평소의 철구라면 아무리 피곤하다 하더라도 이렇게 쉽게, 그리고 깊이 잠에 빠질 리가 없었다.

이보다 더 피곤하고 고된 일이 있어도 늘 신경을 곤두세웠기에 철구는 더욱 이상함을 느꼈다. 두 시간 정도 흐르자 몸의 열기와 방의 온기로 옷이 조금 말랐다. 철구는 자신이 깬 채로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면 세현이 민망할까봐 세현의 옆에 누웠다.

철구는 여러 가지 가능성들을 생각해 보았지만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설마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자신들을 위해 최음제나 흥분제를 탔을 리도 없었다. 그리고 그런 약이 들었다면 자신이나 세현이 알아차렸을 것이었다.

무미무취의 약품이라면 모를까 이런 상태로 만들려면 상당한 양이 필요했을 것이었다. 단순히 욕실에서 났던 향기 때문에 이런 꿈을 꿨다고 생각지는 않았다. 노부부의 눈치가 조금 이상했던 것이 이것이었나 싶었다.

아마도 자신들과 같은 꿈을 꿀 것이라는 생각. 철구는 누워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그 때 옆에서 자던 세현의 신음소리가 아까보다 조금 더 커졌다. 그리고 세현의 손이 자신의 가슴을 더듬기 시작했고, 한 손이 두 다리 사이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이거 돌겠군.'

철구는 세현을 위해서라도 자는 척을 해야 했지만, 그 순간 세현이 자신의 큰 신음 소리에 놀라 잠에서 벌떡 깨었다. 그리고는 순간적으로 옆에 누운 철구를 쳐다보았다. 철구는 죽은 척 누워 있었지만, 세현은 얼굴이 빨개지며 고개를 저었다.

'이.. 이게 뭐야... 왜... 철구 씨가...'

세현은 아무리 자신이 아까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임신과 꿈에 대한 상담을 했다고 하더라도 이런 꿈을 꾼다는 것 자체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상담을 할 때는 이보다 더한 얘기들도 많았지만,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던 세현이었기에 더욱 당혹스러웠다. 더욱이 그 꿈에 등장한 남자가 철구라니... 자신의 애인인 정태가 아닌 철구가 등장하여 이상한 꿈을 꾸었다는 것에 세현은 몹시 가슴이 뛰었다.

'도대체 뭐지?'

세현은 자신이 이런 꿈을 꿀만한 무언가가 있었나 곰곰이 생각했다.

'철구 씨한테 업혀 온 것, 노부부와 상담... 향기... 향기!'

세현은 오늘 하루 동안 산을 오르며 자신이 철구에게 많은 의지를 했고, 또 노부부의 임신 상담을 하면서 이상야릇한 꿈 얘기를 들었고, 욕실에서 맡았던 향기가 자신을 부추겨 이런 꿈을 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향기.. 뭐지?'

세현은 자리에 앉은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가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자 옆으로 돌아누워 있는 철구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 순간 꿈에서 본 철구의 탄탄한 몸과 커다란 그곳이 떠오르며 순간 얼굴이 확 붉어졌다.

'내가 미쳤나 봐.. 어머... 어머..'

세현은 자리에 누워 이불을 끌어 머리까지 덮었다. 그런 세현의 움직임을 철구는 숨죽이며 지켜보았다.

'똑같이 꿈을 꿨나 보군. 할매도 참...'

철구는 자신과 세현이 동시에 그런 꿈을 꿨다는 것이 몹시 이상했다. 하지만 입 밖으로 세현에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세현을 밤새 지켜봤다는 걸 세현에게 말하는 꼴이기에 철구는 벙어리 냉가슴 앓듯 입을 닫았다.

'참나.. 할머니가 임신한 이유를 알겠군.'

철구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눈을 감았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땐 이미 해가 많이 떠 있었다. 철구는 자기도 모르게 얼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세현은 여전히 잠이 든 상태였다. 철구는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거실에는 된장찌개를 끓이는 냄새가 났다.

- 일어났나?

할머니의 목소리에 철구는 멋쩍은 듯이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 아. 네... 너무 늦게 일어났네요.

철구는 살면서 처음으로 늦잠을 잤다.

'이상하군... 이런 적이 없었는데...'

철구는 오히려 긴장을 하고 자야하는 상황에서 더 긴장이 풀려 잠을 자 버린 자신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 어제 피곤해서 그렇지 뭐. 산길 걷는 게 서울 사람들한텐 만만치 않거든. 나도 처음 여기 왔을 땐 하루 종일 잠만 잤거든.

할머니의 말에 철구는 고개를 끄떡이고 말했다.

- 할아버님은 어디 나가셨나 보네요.

철구의 말에 할머니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얘기를 했다.

- 요즘 우리 마을이 조금 시끄러워서 말야. 아래 마을 회관에 갔어. 동네 총각 어머니가 사라졌는데....

철구는 그 말에 눈빛이 반짝 빛났다.

- 아! 그렇군요.

철구는 할머니에게 아무 얘기도 하지 않은 채 방으로 들어왔다. 방으로 들어오는 소리에 세현이 깼는지 철구를 쳐다보았다.

- 잘 잤어요?

철구는 세현을 보며 말했다.

- 조금 서둘러야겠어.

그러고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 마을 회의라.. 할머니 실종으로 인한..

철구의 중얼거림에 세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철구를 보며 물었다.

- 무슨 일 있어요?

철구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 어제만큼 큰일은 아닐지도 몰라.

철구가 '어제만큼'이라고 말을 하자 세현은 갑자기 지난밤 꿈 생각이 났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 일단 천석 씨 집으로 가야할 것 같아. 뭔가 냄새가 나.

철구의 말에 세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거실로 나와 할머니에게 인사를 하고는 욕실로 들어가 세수를 했다. 세현이 밖으로 나오자 할머니와 철구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 다 차린 밥이니까 먹고 가요.

할머니의 말에 철구는 손사래를 쳤다.

- 저희 때문에 쉬셔야 하는데 번거롭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저희가 일이 있어서요.

하지만 할머니의 고집도 만만치 않았다.

- 밥 한술 뜨는 데 얼마나 걸린다고. 얼른 와서 잡숫고 가요.

철구는 난감한 듯이 세현을 쳐다보았다. 세현은 빙긋이 웃으며 할머니에게 말했다.

- 감사하게 잘 먹을게요.

세현은 철구에게 눈치를 주며 자리에 앉혔다. 철구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세현을 쳐다보았다. 세현은 목소리를 낮춰 철구에게 말했다.

- 할머니는 지금 임신 중이에요. 그러니까 가급적이면 말씀 들어주는 게 좋아요.

세현의 말에 철구는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잘 먹겠습니다.'하고 외치고는 게눈 감추듯이 밥을 먹어치웠다. 할머니는 밥을 더 퍼 주려고 했지만 철구는 배가 부르다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마 후 세현 역시 밥을 다 먹었는지 집 밖으로 나왔다. 철구는 세현이 밖으로 나오자 할머니에게 인사를 했다.

- 고맙습니다. 저흰 이만 가보겠습니다.

철구의 말에 할머니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 조금 있으면 할아범 올 텐데.. 보구 가지 그래요?

철구가 난감해 하자 세현이 말을 했다.

- 아, 저희 오늘 떠나는 게 아니구요. 조금 있다가 떠날 거예요. 이 마을에 사는 천석 씨라고 있잖아요. 그 분 만나러 왔어요.

세현의 말에 할머니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그러나 지난밤 일도 있고 해서 그런지 할머니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 그... 그래요? 그럼 또.. 또 보겠네요..

할머니가 갑자기 말을 더듬자 세현이 이상하다는 듯이 할머니를 쳐다보았다. 철구는 뭔가 느껴지는지 재빨리 할머니에게 인사를 하였다.

- 할머니, 안녕히 계세요. 조만간 또 뵙겠습니다.

철구는 할머니에게 인사를 하고 세현의 손을 끌었다. 세현은 철구한테 끌려가며 할머니에게 외쳤다.

- 지금은 임신 초기라 무리하시면 안 돼요!

할머니는 세현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고는 문을 닫았다. 세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철구를 쳐다보았다. 철구는 얼굴을 굳히며 앞서 걸었다.

- 일단 천석 씨를 먼저 만나야겠어. 뭔가 이상해.

철구의 표정이 굳는 것을 본 세현 역시 고개를 끄떡이고는 철구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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