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Ep2 - 1. 사라진 어머니(2)
천석은 수풀 안쪽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그리고 잡목을 헤치고 앞으로 조금씩 걸어 나갔다. 그러다가 문득 자신이 꿈에서 보았던 커다란 나무를 보았다. 천석은 이 장소가 꿈에 나온 장소임을 확신하고 앞으로 더 나갔다. 잡목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가자 마치 꿈길을 걷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자신의 시야를 가리던 나뭇잎을 헤치자 꿈에서 보았던 작은 공터가 나타났다.
- 여그여.. 여그..
천석은 놀란 마음에 앞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정신없이 잠이 쏟아졌다.
- 아함... 왜.. 왜 졸린댜..
천석은 한 발자국을 떼어 앞으로 내딛고는 그대로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자기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들게 된 것이었다. 지난밤에 푹 자 둬서 잠이 모자란 것도 아니었는데 갑자기 막 졸음이 쏟아지더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풀밭 위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잠들면 안 된다고 이성은 소리쳤지만 눈꺼풀은 억만 근의 추를 달아놓은 것처럼 무거웠다.
천석은 잠이 들자 지난 밤 꾸었던 꿈을 이어서 꿨다. 의식적으로 그러고 싶어 그런 것이 아니라 마치 꿈이 그를 조종하듯 그는 같은 꿈속으로 빠져 들었다.
천석은 꿈에서 또다시 그 풀숲에 서 있었다. 천석은 또다시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산삼을 캐러 왔으면서 이런 불경한 꿈을 꾼다는 게 상서롭지 못한 징조였기도 했지만 천석은 나신으로 누워서 신음성을 내뱉는 여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게 더욱 두려웠다.
그녀의 얼굴은 선홍빛으로 발그레했고 눈가에는 눈물이 조금 젖어 있었다. 천석은 그런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으려고 손을 뻗었다. 그러자 여인은 슬픈 눈으로 천석을 쳐다보았다. 천석의 손이 여인의 얼굴에 닿으려고 할 찰나에 여인은 순식간에 천석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아니 땅 속으로 스며든 것처럼 바닥으로 꺼졌다.
천석의 손은 여인의 볼이 아닌 허공에서 맴돌았다. 천석은 조금은 허탈한 심정으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 워... 워디 간겨?
천석이 혼자 중얼거리다가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는 뭔가에 데인 사람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 뭐... 뭐여?
천석은 왠지 축축한 자신의 아랫도리를 보았다. 팬티는 물론이고 바지까지 젖을 만큼 흥건하게 젖어있었다.
- 모... 몽정을 한겨?
천석은 당황스러운 마음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분명 평소와 같은 꿈이었다. 천석은 조금 찝찝했지만 바지를 벗고 다닐 수 없기에 그냥 입은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주변을 살폈다.
산삼을 캐러 온 심마니가 이런 망령된 꿈을 꿨다는 게 왠지 부정해보였다. 산신령님이 노한다든가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런 망령된 꿈에 자꾸 빠져들어 오히려 현실이 무감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천석은 축축한 땅을 밟으며 다시 앞으로 나갔다. 그러다가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자신이 꿈에서 본 길을 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천석은 조심스럽게 나무를 헤치며 앞으로 나갔다. 그러다가 순간 우뚝 멈춰 섰다.
마치 누군가 왔다 간 것처럼 나뭇가지가 잘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잘린 나뭇가지 사이로 좁은 공터가 하나 보였다. 그곳은 꿈에서 여인이 누워있던 자리였다.
천석은 무언가에 이끌리듯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다가 문득 자신의 발부리에 돌이 걸리는 걸 느꼈다. 천석은 눈을 내려 돌부리를 쳐다보았다.
- 이... 이거이... 다...
천석은 그 자리에 자라나 있는 초록 이파리들을 넋을 놓고 쳐다보았다. 천석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한 눈에 보기에도 엄청난 것들이었다.
- 사... 산삼...?
천석은 축축한 바지는 신경을 쓰지 않은 채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손으로 조심스럽게 산삼의 이파리를 들어보았다. 줄기가 무려 여섯 개나 되었다. 적어도 200년 이상은 족히 넘은 것들이었다. 그런 산삼이 적어도 서너 개는 되어 보였다. 천석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 시... 심봤다....
천석은 뿌리가 다치지 않게 손으로 주변의 흙을 파기 시작했다. 그 때를 맞춰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물이 고여 도랑을 이루어 흙을 파내기 힘들었지만, 천석은 그런 것에 굴하지 않고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등에서는 허연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고, 천석이 파내는 자리를 제외하고는 이미 비에 젖어 축축해졌다. 손톱에 흙이 끼고 손끝이 아렸지만, 그런 것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천석은 조심스럽게 손끝으로 흙을 파서는 뿌리가 다치지 않게 파냈다. 그리고 파낸 산삼을 담기 위해 자신의 윗옷을 벗었다. 그리고 옷 위에 산삼 뿌리를 담았다. 다 캐고 보니 무려 네 뿌리나 되었다.
양분이 충분했는지 산삼이 몹시 실했다. 천석은 옷을 잘 접어 산삼을 쌌다. 조만간 동네 심마니들이 산에 오를 것이라는 걸 안 천석은 재빨리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부정 탔다고 산에 오르지 않겠다고 해 놓고선 혼자 와서 산삼을 캤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누구든지 마을 공동분을 내놓지 않으려고 그랬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천석은 심마니들이 다니지 않는 길을 따라 걸었다. 평소보다 내려오는 길은 더뎠지만, 산삼을 가슴에 품은 천석의 발걸음은 몹시 가벼웠다.
사람들에게는 나중에 혼자 산행을 갔을 때 캤다고 하면 되기 때문에 지금은 빨리 내려가는 것이 중요했다. 며칠만 잘 가지고 있으면 이걸 팔아서 어머니 병도 치료할 수 있고, 자신도 한몫 잡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천석은 한 번도 쉬지 않고 산 아래로 내려왔다. 저 아래로 자신의 집 지붕이 보이자 천석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쉬지 않고 한 시간을 넘게 조심스럽게 내려와서 그런지 발바닥이 몹시 아팠다. 산삼을 품에 안고 조심하느라 허리를 숙이고 와서 그런지 허리도 조금 아팠다.
- 좀만 내려가믄 되겄구먼.
천석은 숨이 골라지자 다시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났다. 천석은 좀 더 힘을 내어 집 앞에 도착하였다. 잠겨 있던 집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부엌으로 들어가 산삼을 캐면 담아두려고 했던 상자를 하나 꺼냈다. 그리고 자신의 품 안에 있는 산삼을 조심스럽게 꺼내어 상자 안에 담았다.
구석에 있던 노란 보자기로 상자를 감싸 부엌 싱크대 아래 판을 열고 거기에 넣어 놓았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천석은 몹시 마음이 불안했다. 잘 숨겨 놓은 후에 천석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 엄니가 주무시나?
평소와 다르게 집에 몹시 조용하다고 생각한 천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어머니의 방문을 열었다. 방 안에는 어머니가 먹던 밥상이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벗어놓은 것인지 어머니의 옷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 워디를 가신겨. 몸도 안 좋으신 분이.
천석은 방문을 닫고 다른 방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자신이 집 문을 잠그고 나갔다는 걸 떠올렸다.
- 문도 잠겼는디... 엄니가 워디로...
천석은 그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천석은 집안 구석구석을 다 뒤졌다. 장롱 문도 열어보고 심지어는 자신의 방 뒤로 난 조그만 구멍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 워쩐댜... 워디로 가신겨..
천석은 집 밖으로 뛰쳐나왔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치매에 걸린 노인이 잠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는 건. 하지만 천석은 집안에서 어머니를 찾을 수가 없었기에 밖으로 나왔으리라 생각했다. 천석은 자신의 집에서 가장 가까운 최 씨 부부 집으로 달려갔다.
- 헉헉... 호... 혹시 저희 엄니 못 보셨슈?
천석이 숨을 몰아쉬며 최 씨네 아줌마에게 물었다. 마당에서 나물을 펼치고 있던 최 씨네 아줌마는 혼자 '소나기가 지나갔나?'하고 중얼거리다가 천석의 말소리에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 아이구 깜짝이야.
천석은 여전히 숨을 몰아쉬며 아줌마에게 물었다.
- 혹시 저희 엄니 못 보셨나유?
천석의 말에 최 씨네 아줌마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못 봤는데. 왜 집에 안 계셔? 몸도 안 좋으신 분이 어디를 가셨데?
천석은 아줌마에게 인사를 하고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자신이 집을 비운 시간이 서너 시간 쯤 되었기에 나갔다면 어디로 갔을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다만 집의 윗길은 산으로 들어가는 길이었기에 몹시 험해서 그리로 가지는 않았으리라 짐작을 하고 아래쪽으로 내달린 것이었다.
천석은 다시 한참을 달렸다. 다행히도 갈라진 길이 없었기에 천석은 외길을 따라 쭉 달려왔다. 오는 길이 그리 험하지 않았기에 어머니가 실족을 했거나 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을 하고 앞으로 내달리다가 얼마 전에 이사를 온 천안 과부댁 앞을 지나쳤다. 평소 내외를 하느라 얘기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천석은 다급한 마음에 천안댁을 보고 물었다.
- 헉헉... 혹... 혹시 저희 엄니... 엄니 못 보셨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