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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계(逐界)-쫓겨난 이들의 세계-194화 (194/309)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Ep1 - 10. 허무한 결과(1)

10. 허무한 결과

전쟁 같은 아니 전쟁보다 더한 아비규환이 끝나자 철구는 몸을 잔뜩 얻어맞은 것처럼 온몸이 쑤셨다. 하지만 몸이 지치고 아픈 것과는 다르게 정신은 예전보다 더 날카로워졌다.

- 도대체 몇 사람이나 죽은 거야?

세현의 푸념 섞인 말에 철구가 혼잣말처럼 대답했다.

- 차라리 죽는 게 편할 때가 있어. 살아도 죽는 것보다 더한 고통을 받는다면 말이지.

철구의 말에 세현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떡였다. 철구의 말이 비정하게 들리긴 했지만 맞는 말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옆에서 조용히 두 사람의 얘기를 듣던 석호가 말을 꺼냈다.

- 고통스러운 삶이나 원치 않는 죽음이냐의 문제로군요.

석호의 철학적인 말에 대장이 삐삐거렸다.

- 어렵다. 하지만 살아야 무언가 할 수 있다.

대장의 말에 철구가 손바닥을 탁 치며 말했다.

- 옳은 소리! 살아야 복수를 하건 진실을 파건 하지.

그러면서 세현을 보며 말했다.

- 대장한테 어른들이 한 방 먹었군.

철구의 말에 석호도 피식 웃으며 말했다.

- 그렇군요. 단순한 진리로군요.

세현이 그런 철구와 석호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가장 어렵고 복잡한 일을 하는 두 사람이 가장 단순한 결론에 동의를 하자 세현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 아무튼 이번 일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었어요.

세현의 말에 철구가 의자에 기대어 앉은 채 말을 했다.

- 알 수 없는 일이라... 어쩌면 '우리만' 알 수 없는 일이었는지 모르지. 아직 우리가 미흡해서일 수도 있고, 아니면 저들이 워낙 치밀해서일 수도 있지.

석호는 지난 밤 임 박사와 원 회장에게서 받은 메일의 내용을 읽어주고는 말을 이었다.

- 이와 비슷한 일이 중국하고 일본,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만 일어났더라구요. 인터넷에 글을 올려 암시를 한 것, 그리고 일주일 전에 모든 내용이 삭제되었다는 것, 그리고 희생자가 일곱 명이었다는 것까지 똑같은 패턴이었죠.

석호의 말에 철구가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 결국 '똑같은 실험'을 세 나라에서 동시에 진행했다는 거군요. 미친 것들.

철구의 말에 석호는 조금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했다.

-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지금 중국에선 다른 방법으로 실험을 한 개체가 발견되었죠. 물론 그게 그들의 실험인지 아니면 모방 실험인지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우리나라나 일본에서도 그런 방법으로 실험을 한 사람들이 나타날지도 모르죠.

석호의 말에 철구는 미간을 문지르며 말했다.

- 하긴 그 놈들이 좀 더 연구하기 위해 그런 실험을 계속할 수도 있겠죠. 하... 신부님께서 톰슨 병원에서 봤던 실험이 어쩌면 그것의 연장일 수도 있겠죠.

철구가 깊은 한숨을 내쉬자 석호가 말을 이었다.

- 그들의 실험은 멈췄을 겁니다.

석호의 말에 철구와 세현이 의아하게 석호를 쳐다보았다.

- 톰슨 병원에 바티칸 이름으로 비공개 서한을 보냈거든요. 실사 조사단도 파견했구요.

석호의 말에 철구가 고개를 저었다.

- 그놈들이 신부님들 말을 들을까요?

철구의 말에 석호가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 이번에 파견된 조사단 책임자가 그들에게 아주 강경한 분이거든요. 그들의 비밀도 많이 알고 있는.

석호의 말에 세현이 석호를 쳐다보며 말했다.

- 혹시... 얼마 전에 방문하신 슈테판 추기경님 말씀하시는 건가요?

세현의 말에 석호가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자 철구가 의아하다는 듯이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 슈테판 추기경님? 그 분이 누군데?

철구가 세현을 쳐다보며 말을 하자 석호가 대답을 했다.

- 저에게는 최베드로 신부님만큼이나 소중한 분이죠. 저의 스승님이시기도 하구요.

석호의 말에 세현이 한 마디 덧붙였다.

- 그리고 차기 교황으로 가장 유력한 분이기도 하죠.

철구는 석호와 세현의 말에 고개를 끄떡였다.

- 뭐 신부님을 보면... 슈테판 추기경님도 훌륭한 분이시겠네요.

철구의 말에 석호가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 저는 슈테판 추기경의...

'발끝도 못 따라갑니다.'라는 말을 석호와 컴퓨터 기계음이 같이 나왔다. 그러자 세현이 피식 웃으며 모니터 쪽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모니터에서는 석호의 말투 패턴이 글자로 보였다.

- 신부님은 이런 식으로 말한다.

그걸 보자 철구가 웃으면서 모니터 쪽을 향해 말했다.

- 별 걸 다 분석하는군. 좋아하면 말투도 분석을 하나?

철구의 말에 대장이 '삐삐' 소리를 냈다. 다들 그 말에 웃음을 터트렸고, 웃음이 잦아들자 철구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 아무튼 저 때문에 고생 많으셨어요.

철구가 석호를 보며 말을 하자 석호가 손사래를 쳤다.

- 아니에요. 고생은 철구 씨가 더 많이 했죠.

철구는 고개를 돌려 세현을 보며 말했다.

- 할매도 고생 많았어.

철구가 또 '할매'라고 하자 세현이 눈을 흘겼다. 철구는 모니터 쪽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 어이, 대장. 고마워. 나중에 신부님과 둘이 시간 보낼 수 있게 해 줄게. 내가 부탁해서.

철구가 그렇게 말을 하자 스피커에서 '삐삐' 소리가 마구 들려왔고, 모니터에는 철구를 향한 이상한 이모티콘들이 마구 흘러갔다. 석호는 당황한 듯이 철구를 쳐다보았지만 철구는 사무실을 향해 손을 한 번 들고 밖으로 나갔다.

- 전 먼저 갑니다.

그리고는 차로 가서 시동을 걸었다. 그러다가 차량 포켓에서 혜민의 사진을 꺼냈다.

- 살아 있는 거지? 그치?

철구는 사진 속의 혜민이 대답이라도 할 것처럼 다정하게 물었다. 그리고는 다시 차량 포켓에 사진을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시동을 걸어 오랜만에 사무실로 갔다. 사무실에는 한수가 책상에 앉아 고스톱을 치고 있었다.

- 왔냐?

철구는 사무실 안에 들어가 소파에 눕듯이 앉아서 한수에게 말했다.

- 사무실엔 별 일 없었수?

철구의 말에 한수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마우스를 클릭했다.

- 별 일이야 있겠냐. 니가 없는데. 의뢰도 없고, 돈도 없다.

그 순간 모니터에서 '빡'하는 소리가 났다. 그러자 한수는 마우스를 내동댕이쳤다.

- 이런 씨발. 이놈의 건 맨날 빡이야!

한수가 씩씩거리며 모니터를 쳐다보자 철구가 얘기를 했다.

- 거 맨날 잃는 고스톱은 해서 뭐해요?

그러자 한수가 철구를 보며 말했다.

- 임마, 고스톱은 힐링이야. 힐링. 그거 아냐?

철구가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자 한수가 말을 했다.

- 갔던 일은 잘 됐냐?

한수의 말에 철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뭐, 잘 되고 말고가 어디 있어요. 그냥 그런 거지.

철구의 말에 한수가 모니터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 그러니까 돈 안 되는 일일랑 그만하고... 이런 썅... 또 쌌어.

한수의 말에 철구가 말을 이었다.

- 형님이야 말로 돈도 안 되는 일일랑 그만 하시죠?

철구의 말에 한수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이건 돈이 아니라니까, 힐링이라니까...

그러다가 싸 놓은 걸 상대가 먹었는지 한수는 "이런 우라질.."하고 욕을 했다. 철구는 한수를 보며 말했다.

- 내일부터 한 동안은 일할 테니까 일거리 좀 잡아주슈.

철구의 말에 한수가 모니터에서 머리를 내밀며 철구를 쳐다보며 말했다.

- 그래? 그럼 내가 당장 일을 잡아오지.. 짜식. 진작 말하지 그랬어.

한수가 앉아 있는 모니터에서 '띵동' 소리가 들리더니 한수는 독수리 타법으로 자판을 쳤다. 그리고 모니터를 쳐다보다가 혼잣말을 했다.

- 이건 단가가 싸고, 이건... 정치인이라 불편하고... 이거하고... 이거...

그러더니 한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역시 간통은 폐지되고 봐야 해. 이렇게 돈이 되는 의뢰가 많이 들어오니.. 흐흐흐.

그리고는 프린터로 무언가를 출력해서 철구가 앉아 있는 자리로 와서 철구에게 말했다.

- 불륜 현장 찾기 세 건, 사람 찾기 두 건, 그리고... 강아지 찾기 한 건.

철구는 '강아지'라는 말에 한수를 쳐다보았다.

- 개를 찾으라구요?

철구가 버럭 소리를 치자 한수가 귀를 틀어막았다 떼며 말했다.

- 아, 자식... 그냥 개새끼면 나도 그냥 넘어갈 텐데, 이 개새끼가 족보 있는 개새끼래. 그래서 찾아주면 현상금 500만원.

한수의 말에 철구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 개새끼 찾는 건 형님이 하시죠. 원래 그 쪽끼리 잘 통하잖아요.

철구의 말에 한수가 "그럴까?" 하다가 철구를 쳐다보며 말했다.

- 너 내 욕한 거지?

철구는 한수 손에 들린 프린트 용지를 뺏어들고 골방 쪽으로 가며 말했다.

- 이 일들, 내일부터 시작할꺼유. 오늘은 피곤해서 먼저 잘게요.

철구가 대답을 하지 않고 골방 쪽으로 가자 한수는 철구를 보며 소리쳤다.

- 너 나 욕한 거잖아. 개새끼라고... 아니냐?

하지만 철구는 대답을 하지 않고 골방 문을 쾅 닫아버렸다. 한수는 그런 철구를 보며 '이런 우라질 놈'하고 욕을 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철구 눈가에 진 그늘과 안 그래도 마른 몸이 더 마른 것 같아 보여 안쓰러웠다.

- 에휴. 저 놈의 자식. 몸 좀 살피면서 하지.

한수는 조용히 사무실 불을 끄고 밖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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