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Ep1 - 9. 가려진 진실(4)
- 어차피 모두가 당신의 종이 아닙니까? 능력 있는 피터를 만들어 내는 것 또한...
다나카의 변명을 듣던 기계음은 갑자기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그 소리는 몹시 귀에 거슬리는 소리였다. 다나카와 톰슨은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 웃음소리가 잦아들자 다나카가 다시 말을 이었다.
- 견제의 수단이나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기계음은 아까보다 싸늘한 목소리였다.
- 그렇겠지. 나를 견제한다는 건 곧 조직을 새롭게 장악한다는 건데, 자네와 자네의 심복 톰슨이 그렇게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기계음의 말에 다나카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을 의도적으로 깎아 내리는 말에 몹시 심기가 상했지만, 아직은 자신이 화를 낼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그냥 침묵을 했다. 그러자 기계음이 다시 말을 이었다.
- 피터를 폐기해.
기계음의 말에 다나카는 순간 몹시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얼마 안 있으면 피터가 만들어지고, 자신의 꿈을 이뤄주리라고 믿었는데, 순간적인 실수로 잃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다나카는 다급해졌다.
- 피터는 그냥 심복으로....
그 순간 기계음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 너와 톰슨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그러자 다나카 역시 분노에 사로잡혀 말을 했다.
- 선택권이 없다니, 우린 꼭두각시란 말인가! 아무리....
다나카의 말을 끊고 기계음이 말을 했다.
- 꼭두각시? 너는 한갓 소모품에 불과할 뿐이지. 꼭두각시도 과분해!
기계음의 말에 다나카는 더욱 분노에 사로잡혀 소리쳤다.
- 아직 완전히 검증되지 않은 너 따위가 감히 내게 그런 말을 하다니... 널 가만 두지 않겠다!
톰슨은 두 사람이 극단으로 치닫는 상황이 되자 머리를 굴렸다. 도대체 누구의 편에 붙어야 자신의 안위를 살필 수 있을 지의 여부로 복잡하게 생각할 때 쯤 전화기에서 다시 기계음이 들렸다.
- 후후. 네가 짜증이 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안 거지만, 이제 폐기할 때가 된 것 같군. 안 그런가 톰슨?
기계음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톰슨은 화들짝 놀라 전화기와 다나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 그... 그게 무슨 말이신지...
톰슨이 당황을 하며 말을 더듬자 기계음이 말을 했다.
- 복제품이 '각성'을 시작할 때 쯤부터 '짜증'이 늘고, 감정의 기복이 심해진다는 자네 보고서 잘 봤네. 다나카가 그 상태 아닌가?
톰슨과 다나카는 기계음의 말에 깜짝 놀랐다. 톰슨은 손을 벌벌 떨며 전화기를 향해 말했다.
- 그... 그건 사실이지만, 여기 다나카는 복제된 적이 없는...
그러자 전화기에서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 과연 그럴까?
다나카는 전화기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 말도 안 되는 소리!
기계음을 다시 톰슨에게 말을 했다.
- 잘 봐 두게, 톰슨 원장.
그리고는 전화기 너머에서 라틴어 한 구절이 나왔다.
- Expergiscimini a somno. (잠에서 깨어나라.)
그 순간 다나카의 눈이 꺼지고, 입에 거품을 물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벽을 향해 돌진을 했다. 퍽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가 깨지며 다나카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죽어갔다. 톰슨은 그 모습을 보고는 경악에 차서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 이... 이건...
그 때 전화기 너머에서 기계음이 들렸다.
- 내가 말하지 않았나, 다나카는 '복제품'이라고.
톰슨은 자신도 모르게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떨리는 손으로 전화기를 향해 말을 했다.
- 호... 혹시 저도 복제품입니까?
전화기 너머 기계음은 잠시 침묵을 했다. 그러다가 톰슨을 안심시키는 대답이 나왔다.
- 자네는 '서번트 증후군'을 앓고 있는 걸로 아는데? 아직 그것에 대한 것은 연구 중 아닌가? 자네가 잘 생각해 보면 알 텐데?
기계음의 말에 톰슨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나 뒤에 이어지는 말에 톰슨은 다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 아까도 얘기했지만, 피터는 폐기하게.
기계음의 말에 톰슨은 보이지도 않는데도 열심히 고개를 끄떡이며 대답을 했다.
- 다... 당장 폐기하겠습니다.
그리고는 기계음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 이참에 다나카도 폐기하고 싶지만 다나카 이치로라는 인간의 경력과 인맥은 무시할 수 없으니...
톰슨은 기계음의 말에 침을 꿀꺽 삼켰다.
- 일주일 후에 다나카 이치로가 입국할 거야. 일단은 자네가 잘 관리해 주게.
- 네? 네. 알겠습니다.
톰슨은 보이지 않는 허공에 인사를 하며 대답을 했다. 톰슨의 대답이 끝나자 조금 후에 피식 웃는 소리와 함께 마지막 말이 나왔다.
- 호머 심슨 주니어라... 재미있는 장난을 쳤더군. 후후.
그리고는 전화가 끊겼다. 톰슨은 의자에 앉아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한 쪽 구석에 쓰러져 있는 다나카를 쳐다보며 말했다.
- 어쩌면 우리가 한 일은 그냥...
톰슨은 인터폰을 들고 심복들을 불렀다. 그리고 쓰러져 있는 다나카의 시체를 치우게 했다. 그리고 톰슨은 밖으로 나와 전산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그간 올라온 소설들을 지웠다. 그리고는 호머 심슨 주니어로 가입된 아이디를 삭제했다.
- 다 알고 있었군.
톰슨은 낮게 한숨을 쉬며 생각했다.
'무서운 사람이군. 진짜 숨어서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겠어...'
톰슨은 의자에 기댄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문득 슈뢰딩거가 떠올랐다.
'그라면... 혹시...'
톰슨은 마음속으로 무언가를 끊임없이 생각하다가 눈을 번쩍 떴다.
'음... 미리 작업을 준비해 둬야겠군.'
톰슨은 전산실을 빠져나와 지하 실험실로 가는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그리고 오늘 내로 '피터'를 폐기하고 다른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