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Ep1 - 9. 가려진 진실(2)
- 자네는 지금처럼 하면 되네. 나의 일에 사사건건 반대를 하고, 지적을 하고, 잘못된 것임을 알려주면 되네.
기계음의 말에 슈뢰딩거는 다소 놀란 말투로 말을 했다.
- 그게 무슨 말인지...
- 모든 인간의 오만은 자기가 '다 알고, 다 할 수 있다.'는 것이지. 꼭두각시들이야 시키는 대로, 그리고 하자는 대로 하는 존재들 아닌가. 하지만 자네와 같은 사람이 있어야, 아니 자네와 같은 사람이 하나가 아니라 더 있어야 그러한 오만을 깰 수 있지. 그런 의미에서 자네와 바티칸에 참 고맙지.
'그'의 진정한 오만한 말에 슈뢰딩거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마치 자신이 하는 일에 방해자가 없으면 '재미'가 없다는 투로 얘기를 하는 '그'에게 알 수 없는 공포심마저 들었다.
- 그.. 그게...
- 별 거 아니지. 다만 누군가 나를 제어하지 않으면 폭주할 수도 있다는 뜻이야.
슈뢰딩거는 '그'의 말에 우뚝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냉정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이성이 무너지는 자신을 일으켜 세웠다.
- 폭주라뇨? 우리 조직은 당신의 폭주를 막을 힘이 있습니다.
슈뢰딩거의 말에 '그'는 희미하게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 후후. 그렇겠지. 하지만 이제부터는 그렇지 않을 수 있어. 아니 이제부터라기보다 자네가 한국에 간 이후부터겠지.
슈뢰딩거는 그의 말에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 혹.. 혹시...
슈뢰딩거의 말에 '그'는 명쾌하게 대답을 했다.
- 자네가 나에게 심으라는 그 제어 장치. 뭐랄까 화학적으로 아주 조잡하더군. 그런 걸로 내가 그렇게 '통제'가 되리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지.
슈뢰딩거는 옆에 놓인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난 '그'를 제어하기 위해 비밀리에 개발한 특수 약물로 정신과 신체를 조절하려고 했지만, 그 계획이 '그'에게 이미 발각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 다음의 말이 슈뢰딩거를 더욱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 그런 방법은 예전에 하던 방법 아닌가? 조직을 배신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말야. 하지만 자네가 크게 간과하고 있었던 게 있어. 그게 뭔지 아나?
'그'의 말에 슈뢰딩거는 대답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 약물보다 더 강한 '정신'을 지배하면 되는 거지. 굳이 약물로 '공포심'을 줄 필요가 있나 말야. 그들의 '정신'에 각인을 시켜놓으면 배신은커녕 아주 충실한 '부하'가 될 수 있지.
슈뢰딩거는 '그'의 말에 힘없이 물었다.
- 그럼 이번에 한 실험이 그것이었습니까?
슈뢰딩거의 말에 '그'가 호쾌하게 대답을 했다.
- 한국, 중국, 일본에서 실험을 실시해봤지. 물론 초기의 실험 군집들이라 실패율이 높았지만, 소기의 성과를 거두긴 했지. 좀 더 확실한 데이터가 필요했거든. 이번 실험으로 명확한 사실을 알았지. 누구든 '정신'도 지배할 수 있다는 걸 말야. 하하하.
슈뢰딩거는 '그'의 마지막 웃음소리가 마치 악마의 웃음처럼 들렸다. 결국 '그'는 조직을 장악하기 위해, 더 나아가 조직원들의 정신을 지배하기 위해 극비리에 이런 실험을 했던 것이었다. 슈뢰딩거가 힘겹게 그에게 물었다.
- 이번 일은 바티칸에서도 주목하고 있습니다. 우리 조직에 위험이...
'그'는 슈뢰딩거의 말을 자르고 얘기를 했다.
- 바티칸은 일부만 알지. 아주 일부 사실만 말야. 바티칸보다 한국 경찰이 더 놀랍더군. 일본이나 중국에서는 그냥 '초자연적인 현상' 정도로 치부했는데, 한국 경찰들은 조금 집요하게 파고들더군. 물론 그와 관련된 점조직도 발견은 됐지만 그리 문제될 건 없지. 지금은 모두 폐기했으니까 더 나올 것도 없고 말야.
슈뢰딩거는 '폐기'라는 말에 절망감을 느꼈다. 실험체가 아닌 일반인조차 '실험'에 이용하고 '폐기'를 하는 가장 극단에 다다랐다는 기분 때문이었다. 자신과 동료들은 '적어도' 현인류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스스로 위안을 했지만, 자신들이 결국 이러한 결과를 초래했다는 자괴감에 빠져들었다.
- 저희들의 잘못이군요.
슈뢰딩거의 말에 '그'는 다소 냉정하게 말했다.
- 너무 자책하진 말게. 자네의 통제를 벗어난 '괴물'이 '나'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 역시 자네들과 같은 실수를 하고 싶진 않으니까. 적어도 그 괴물이 '나'를 능가하진 않게 할 거니까 말야.
슈뢰딩거는 '그'의 말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그'가 '그 분'이냐 아니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이미 자신의 통제권 바깥에 있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 조직원 모두에게 그 정신 통제를 하실 생각이십니까?
슈뢰딩거의 말에 '그'는 침착하게 말했다.
- 이번 실험의 결과가 뭔지 아나? 이번 실험을 통해서 말야 정신을 '완전히' 지배할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았지. 완전히 지배할 수 있는 사람이야 그렇게 하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그간 써온 방법을 써야지.
'그'의 말에 슈뢰딩거가 말을 했다.
- 그런 계획을 왜 제게 말씀하시는 거지요? 그냥 저마저 그렇게 만들면 될 텐데.
슈뢰딩거의 말에 '그'는 잠시 침묵을 했다. 그러다가 이내 그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을 내놓았다.
- 그건... 자네가 내 아버지이자, 스승이자, 생명의 은인이기 때문이지. 그리고 유일하게 나에게 '기본적인 통제'를 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야. 자네는 이번 실험이나 계획과는 무관한 사람이지.
슈뢰딩거는 '그'의 말에 다시 깊은 한숨을 쉬었다.
- 차라리 꼭두각시가 더 나을 것 같군요.
'그'는 다시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 적어도 꼭두각시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하니까. 자네와 같이 다소 올바른. 그리고 나를 막아줄 수 있는 사람 말야.
슈뢰딩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저 역시 당신을 막기에는 역부족인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을...
슈뢰딩거의 말에 '그'는 조금 느리게 말을 했다.
- 당신밖에 없어.
그러더니 조금은 짜증나는 투로 말을 이었다.
- 다들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하더군. 톰슨이라는 작자는 내가 그냥 실험을 하면 심심하다고 하니까 이상한 걸 생각해 내더군. 인터넷으로 암시를 주는 방법이나 수열을 이용하는 방법으로 각성을 시키자더군.
슈뢰딩거는 '그'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 장난이 심하군요.
- 그런가? 하긴 내가 심심하다니까 그런 생각을 했겠지만 말야. 그런 인간에게 가이드를 맡길 수는 없지 않은가 말일세. 다른 사람들도...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말을 끊었다. 그리고 한참 후에 다시 말을 이었다.
- 일단 여기로 오면 만나서 얘기를 더 해 보자구.
'그'는 이렇게 얘기를 하고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슈뢰딩거는 의자에 앉은 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자신들이 '날개를 달고, 아가미를 갖고, 네 다리로 달리고, 낙타처럼 등에 혹을 단 채, 머리는 지금의 뇌 용량보다 훨씬 큰 뇌를 갖게 된 괴물'이 아닌 겉은 사람이나 내부는 괴물이 된 존재를 만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외형적인 괴물이었더라면 하는 후회마저 들었다. 그리고 '그'의 순수한 외모와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눈을 떠올렸다. 도무지 알 수 없는 그 깊이. 그 안엔 무엇을 담고 있을지 슈뢰딩거로서는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슈뢰딩거는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비서를 불렀다.
- 일단 영국으로 가세.
비서는 미국으로 가고자 하던 계획을 틀어 영국으로 가겠다는 슈뢰딩거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내 머리를 한 번 숙이고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슈뢰딩거는 그런 비서의 뒷모습을 보며 천천히 긴 복도를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