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Ep1 - 9. 가려진 진실(1)
9. 가려진 진실
슈뢰딩거는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노발대발했다.
- 자네 생각이 있는 건가, 없는 건가?
슈뢰딩거의 말에 톰슨 원장은 느물거리는 표정으로 대답을 했다.
- 제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그 분이 시키는 대로 할 뿐이죠.
톰슨의 말에 슈뢰딩거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 자네 같은 사람이 이런 병원에 원장이라는 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야. 자신의 의지라고는 없는...
슈뢰딩거의 가시 돋친 말에도 톰슨은 여전히 웃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 의지라구요? 박사님께서는 어떤 의지로 일을 하시는 거죠?
톰슨의 말에 슈뢰딩거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 적어도 정상적인 인간을 대상으로 이런 장난 같은 건 치지 않아!
하지만 톰슨은 그 말에 조금 비웃듯이 말했다.
- 박사님께서 말씀하신 것과는 많이 다르군요. 인간의 진보를 위해 적은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톰슨의 말에 슈뢰딩거는 탁자를 쾅 내려치며 말했다.
- 그 희생은 실험체만으로 충분해!
슈뢰딩거의 말에 톰슨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실험체도 생명체 아닙니까?
슈뢰딩거는 자신의 논리에 비약이 있다는 걸 느꼈지만 적어도 정상적인 인간에 대한 생체 실험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 단순히 윤리적인 문제가 아니야! 법적으로도 그리고 사회적으로도 문제가 있는 거야!
슈뢰딩거의 어조가 조금 누그러진 것을 느낀 톰슨은 고개를 끄떡이며 말을 했다.
- 그 분의 의도였습니다.
톰슨의 말에 슈뢰딩거는 얼굴이 붉어졌다.
- 아직 그 분은 없어!
슈뢰딩거의 말에 톰슨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 그.. 그 분을 부정하시는 겁니까?
슈뢰딩거는 에어리어 51 안에 있는 '그'를 떠올렸다. 지금이라도 당장 그에게 왜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슈뢰딩거 역시 최대한 조심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 조직을 어느 정도 장악하고 있는 그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 부정하는 것은 아니야. 하지만 이런 말도 안 되는 걸 계획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크게 문제를 삼아야 하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 조직은 한 사람의 장난 같은 존재로 전락하고 말 거야.
슈뢰딩거의 말에 톰슨은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떡였다.
- 음... 사실 말이 나왔으니까 드리는 말씀이지만...
톰슨의 말에 슈뢰딩거는 고개를 들어 톰슨을 쳐다보았다. 톰슨은 무언가를 주저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 괜찮네. 말해 보게.
슈뢰딩거의 차분한 말에 톰슨은 이윽고 입을 열었다.
- 이 실험 말고도 여러 개의 실험을 진행 중입니다. 물론 대부분은 다나카님의 주도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만...
슈뢰딩거는 톰슨의 말에 눈이 커다래졌다.
- 뭐... 뭐야?
톰슨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 저도 그 내막 전체를 알 수는 없지만 여러 가지 실험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톰슨의 말에 슈뢰딩거는 잠시 눈을 감았다.
'이대로는 안 된다. 어쩌면 폭주하고 말 거야.'
슈뢰딩거는 톰슨에게 이번 일을 마무리하라고 지시를 한 후 급히 출국을 위해 준비를 했다. 전용기가 준비되었다는 말을 듣고 미국으로 가려던 슈뢰딩거에게 비서가 급하게 달려왔다.
- 박사님, 전화가 왔습니다.
박사는 비서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평소에는 냉정하기 그지 없는 사람이었는데 지금 이렇게 서두르는 걸 보면 분명 무언가 중대한 일처럼 느껴졌다.
- 누군가?
슈뢰딩거의 말에 비서는 우물쭈물할 뿐 대답을 하지 못했다. 슈뢰딩거는 그런 비서를 보며 전화기를 건네 받았다.
- 나다.
전화기 너머에게 기계음이 들렸다. 슈뢰딩거는 쓴웃음을 지었다. 분명 '그'에겐 한국으로 온 걸 비밀로 했음에도 '그'는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슈뢰딩거에게 전화를 건 것이었다.
- 톰슨입니까?
슈뢰딩거는 자신이 여기에 있음을 알려준 사람이 톰슨이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건너편 기계음은 예상 외의 답변을 했다.
- 내가 톰슨에게 알려주었다.
슈뢰딩거는 침묵했다. 그러자 기계음이 말을 이었다.
- 네가 어디를 가던 나는 다 알고 있다.
그러자 슈뢰딩거는 참았던 분노를 쏟아냈다.
-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노 박사의 목소리는 뜻밖에도 몹시 떨렸다. '그'가 두려운 이유도 있었지만, 어쩌면 '그'가 진짜 '그 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에 스쳤기 때문이었다. 슈뢰딩거의 말에 건너편 목소리는 조금 가라앉았다.
- 너를 통하지 않은 건 내가 실수했다.
뜻밖에도 '그'의 입에서 '실수'라는 말이 나왔다. 어떤 일이건 '그'는 독단적으로 행동했고, 그것이 '진리'인 것처럼 말하던 '그'가 처음으로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던 것이었다.
- 단순한 실수가 아닙니다. 이건... 그레고리님의 뜻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슈뢰딩거의 '그레고리'라는 말에 건너편은 침묵을 했다. 그러나 이내 그에 대한 변명인지 아니면 상황 설명인지가 이어졌다.
- 그레고리님이라... 자네의 사명감과 생각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오직 '그레고리'라는 과거의 인간의 생각을 이어받는 것이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 하지만 적어도 개체로서 존재하는 인간에게 손을 대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슈뢰딩거의 말에 기계음은 차분하게 대답을 했다.
- 과연 그레고리도 그렇게 생각할까?
슈뢰딩거는 '그'의 말에 멈칫 했다. 어쩌면 자신보다 그레고리와 더 가까운 그였기에 그가 이렇게 얘기를 한다면 슈뢰딩거는 밀릴 수밖에 없었다.
- 저는 믿고 있습니다. 더 나은 인간,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것. 그것이 그레고리님의 이상이라는 걸. 그리고 그 과정에서 불가피한 희생은 있을 수 있지만, 이러한 무모한, 그리고 가치 없는 실험으로 희생자를 늘려서는 안 된다는 걸.
슈뢰딩거의 말에 기계음이 대답을 했다.
- 더 나은 세상. 더 나은 미래라... 그리고 불가피한 희생..
기계음이 반복한 말에 슈뢰딩거는 끙하고 신음성을 냈다. 그러나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에 슈뢰딩거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 그렇다면 자네의 실험은 올바른 것이었나?
- 제.. 제 실험이라뇨?
당황하는 슈뢰딩거에게 기계음이 말을 했다.
- 초능력 실험.
슈뢰딩거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 그 실험은 실험체를 갖고 한 실험이었습니다.
슈뢰딩거의 말에 기계음이 말을 했다.
- 하지만 그 실험체도 가정을 이루고 세상의 한 축이었지.
기계음의 말에 슈뢰딩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그건 실험의 연장이었을 뿐입니다.
슈뢰딩거의 말에 기계음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가 마지막 카운터를 날린다는 생각이었는지 가장 민감한 문제를 꺼냈다.
- 그렇다면 CS2는?
'그'의 입에서 CS2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슈뢰딩거는 기겁을 했다. 암묵적으로 그 얘기는 꺼내지 않는 것으로 하고 있었기에 갑작스런 말에 슈뢰딩거는 몹시 당황을 했다. 그러자 기계음이 차분하게 얘기를 꺼냈다.
- 미래에는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괴물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아니면 기계가 지배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프랑켄슈타인을 감당할 수 없듯이 인간이 만든 새로운 개체를 인간이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 자네의 말대로라면 우리가 만약 날개를 달고, 아가미를 갖고, 네 다리로 달리고, 낙타처럼 등에 혹을 단 채, 머리는 지금의 뇌 용량보다 훨씬 큰 뇌를 갖게 된 개체를 만들었다면 어느 하나 인간보다 뒤떨어지지 않는 개체가 되겠지. 하지만 그 괴물을 인간이 감당할 수 있을까? 아니 인간을 기반으로 한 인공지능으로 더 나은 조건을 가진 기계들을 만들어낸다면 과연? 자네 말은 옳아. 지금의 '윤리적' 관점으로 보면 말이지.
기계음의 말에 슈뢰딩거는 버럭 소리를 쳤다.
- 그런 강의를 들을 나이는 지났습니다.
슈뢰딩거의 말에 '그'는 조용히 말을 했다.
- 자네가 70년을 살았듯이 난 '그레고리의 기억'부터 지금까지 250년을 살았어. 내 얘기는 '인간'이 더 강해져야 그들을 실험할 수 있다는 거야. 더 강한 현재 인간들만이 그런 '감당할 수 있는 실험체'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지.
슈뢰딩거는 '그'의 말에 주먹을 쥘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추구했던, 그리고 그레고리가 이상이라고 여겼던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의 말처럼 인간은 더 강한 개체가 되어야 했다. 자신이 만들어낸 개체를 컨트롤할 수 있는 존재. 하지만 슈뢰딩거는 '그'의 이런 무모하고도 급진적인 생각에 동의할 수는 없었다. 누구나 '실험체'가 될 수 있는 세상. 그건 '인간'을 위한 세상이 아니라 '인간'을 이용하는 세상이 아니던가. 자신과 죽어간 두 친구가 믿었던 신념이 그것이 아니라고 부정해야 했다.
- 어쩌면 당신이 당신이 말한 괴물일 수도 있겠군요.
슈뢰딩거의 날카로운 말에 기계음은 잠시 침묵을 했다. 그러더니 이내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대답을 했다.
- 그럴 수도 있겠지. 피터 스미스가 감당할 수 없는, 아니 어쩌면 자네도 감당하기 힘든 괴물을 만든 것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슈뢰딩거는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에 침묵을 할 수밖에 없었다.
- ....
슈뢰딩거는 어찌할 수 없는 안타까움에 고개를 숙였다. 어쩌면 처음부터 전제가 잘못된 실험을 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실험을 진행했던 것이 후회가 되었다. 이제와 어떻게 할 수 없는 노릇이기에 더욱 기가 막혔다. 두 친구가 살아있다면 어떻게든 일을 올바르게 돌려놓으려고 했겠지만, 이제 자신은 늙은 학자일 뿐이었다. 슈뢰딩거는 전화기에 대고 힘겹게 말을 했다.
- 그 원대한 계획에 저는, 저 같은 늙은이는 힘이 없어....
슈뢰딩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계음이 말을 했다.
- 최소한 자네만큼은 '원본'이었으면 하네. 다른 모든 이가 그렇지 않더라도 말야.
슈뢰딩거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 저는 당신이 하는 일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기계음의 대답은 그가 생각한 것과 정반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