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Ep1 - 8. 마지막 연결 고리(4)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특이한 행동을 하는 사람은 보이지가 않았다. 철구는 옥상에서 걸어 나오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옥상에서 아래로 연결된 계단으로 갈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 경찰들 상황 완료.
철구는 발걸음을 멈췄다. 행여나 아래로 소리가 날까 해서였다. 그러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놈이 이 건물에 있을 것이라고 왜 생각을 못했을까 하고 자책을 했다. 놈도 분명히 누군가를 찾아보려면 높은 건물에서 보는 것이 편할 테고, 이 부근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 여기라면 당연히 이쪽으로 왔을 것이다. 그런데 옥상 문이 잠겨 있어서 한층 아래로 내려갔고, 거기서 상황을 지켜봤던 것이었다.
'넌 죽었어. 새꺄.'
철구는 조심스럽게 아래로 내려갔다. 아래층에 있던 놈이 천천히 계단 아래로 내려가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아래에서 한 사람이 올라오고 있었고, 놈은 그 사람이 잘 올라가도록 몸을 비켜주었다. 철구는 그 때를 노려 발걸음을 조금 빨리 했다. 그리고 놈 뒤에 다가서서 말했다.
- 홍성표!
철구가 놈을 부르자 놈은 뭔가 싶어 뒤를 돌아보았다. 철구는 놈의 얼굴을 보고 씨익 웃고는 구둣발로 그의 턱을 올려 찼다. 불의의 일격을 당한 성표는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철구는 넘어진 성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허벅지를 구둣발로 누르며 말했다.
- 너 이 새끼. 오늘 죽었어.
철구의 입에서 '죽었어'라는 말이 나오자 성표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더니 허벅지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는데도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발버둥을 쳤다.
- 이.. 이 새끼 뭐야?
분명 몹시 고통스러울 텐데 성표는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만을 하는지 자리에서 버둥거리며 일어나려고 했다. 철구는 그런 성표의 턱을 다시 한 번 구둣발로 가격했다. 그러나 성표는 마치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 듯 고개를 다시 돌렸다. 아래턱이 나갔는지 하관이 덜렁 거렸고, 입 안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성표는 그런 거에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만 했다. 철구는 보통 사람들 같았으면 이미 기절을 했거나 아니면 고통 때문에 자지러졌을 텐데 성표가 그렇지 않자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철구는 다리에 힘을 빼고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성표는 한 다리가 부러졌지만 한 발로 힘겹게 일어났다. 그러더니 피가 흐르는 입을 닦으려고 하지도 않은 채 철구를 보며 이상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가슴에서 칼을 꺼내 철구에게 휘둘렀다. 다친 놈이라고 보기엔 공격이 날카로웠다. 철구는 그 칼을 피하며 이 미친놈을 어떻게 사무실로 데려가나 고민을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성표의 표정이 이상하게 바뀌면서 자신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찌르는 것이었다.
- 안 돼!
철구가 날라 차기로 성표의 손을 차냈다. 그러나 성표의 칼은 목에 큰 상처를 남겼고, 피를 줄줄 흘리며 서 있었다. 그 때 위에서 내려오던 여자가 그 광경을 보며 비명을 질렀다.
- 이거 난감하게 됐는데.
밖에는 경찰들이 깔려 있고, 위층에서는 여자가 비명을 지르고 있고, 자신의 눈앞에는 성표가 피를 흘리며 기괴한 표정으로 서 있는 이 상황이 철구로서는 몹시 난감했다. 철구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인지라 재빨리 몸을 빼서 밖으로 나왔다. 성표를 데려가야 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철구는 시장을 통해 밖으로 재빨리 몸을 옮겼다. 그리고는 얼른 차 있는 곳으로 몸을 옮겼다. 순간의 판단 실수로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을 놓친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철구는 지금은 이곳에서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해서 얼른 차를 몰았다. 가는 차 안에서 철구는 성준에게 전화를 걸어 면목역 근처에 있는 건물에 용의자가 있음을 알려주었다. 자신이 정보를 얻을 수 없으면 성준을 통해서라도 얻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철구가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에는 세현만 남아 정리를 하고 있었다.
- 왔어요?
세현이 밝게 묻자 철구는 손을 한 번 들고는 테이블 앞에 있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는 미간을 문지르며 말했다.
- 신부님 예지력이 있나보네. 조심하라고 하길래 그냥 그런가보다 했는데, 오늘 처음으로 죽을 뻔했다는 생각이 드는군.
철구가 '죽을 뻔 했다.'는 말을 하자 세현이 깜짝 놀라서 물었다.
- 무슨 일 있었어요?
철구는 그냥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 아주 지랄맞은 일이 있었지. 휴...
그리고는 철구는 세현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세현은 철구가 자신을 쳐다보자 어색한 듯이 말했다.
- 왜... 왜요?
세현이 당황을 하자 철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 이런 짓거리를 하고 다니는 나나, 할매나, 신부님이나 모두 쫌 불쌍해서.
그런데 그 때 철구의 핸드폰이 울렸다. 철구가 전화를 받자 성준이 말을 했다.
- 현장에 가 봤는데, 그 자식 과다출혈로 죽었더라구요. 그런데 거기에 있던 목격자가 대강의 인상착의를 말하는데...
철구는 그 말에 허탈하게 대답했다.
- 왜? 나랑 비슷한 사람이래?
철구의 말에 성준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 글쎄요. 복장만 비슷하고, 나머지는 거의 틀리던데요?
철구는 '알았다.'고 대답을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세현을 쳐다보며 말했다.
- 어쩌면 이 사건 말야. 이대로 끝날 수도 있겠어. 그냥 이상한 조합들만 가득한 채로. 만약 또 이상한 일이 일어나면 그 때는 알 수 있겠지만... 아무튼 우리가 파악하고 있는 성표라는 놈들은 다 죽었다네.
- 다 죽어요?
철구는 그렇게 말을 하고 세현이 뭐라고 묻기 전에 문을 열며 말했다.
- 뭔 일 있으면 연락해. 난 좀 쉬어야겠어.
철구가 밖으로 나가자 세현이 그런 철구의 뒷모습을 보고 고개를 낮게 끄떡였다. 밖으로 나온 철구는 허탈한 결과에 몸에 힘이 쭉 빠졌다. 처음 성표에게 의뢰를 받았을 때,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이런 결과를 가져올 줄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모두의 죽음'
그들에게 있어서 누군가의 죽음은 무엇인가 생각을 해 보았다.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단순한 관점이 아니라 그들에게 있어서 '인간'은 어떤 존재일까 하는 근본적인 질문이었다. 철구는 고개를 저었다.
- 음식 가지고 장난치는 놈들보다 사람 가지고 장난치는 놈이 더 나쁜 놈이야.
철구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그들에게 잡혀간 혜민과 자신의 아들은 지금 어떻게 지낼까 생각해 보았다. 분명 그들에게 쓸모가 있으니 살려둘 것은 뻔했다. 죽음 직전에 그걸 알려 주기 위해 박 형사가 자신에게 전화를 하지 않았던가. 문득 철구는 예전 박 형사가 한 말을 떠올렸다.
- 세상에서 제일 나쁜 놈이 누군지 알아? 살인범? 사기꾼? 아냐. 제일 나쁜 놈은 유괴범이야. 유괴해서 아이를 죽인 놈이지. 왜냐고? 막말로 나 같은 놈이야 이제 살만큼 살았고, 내가 더 살아서 세상에 뭘 남기겠냐? 그런데 애들은 다르지. 그 유괴범이 잡아다 죽인 아이는 과학자도 될 수 있고, 대통령도 될 수 있지. 어쩌면 세계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는 아이인지 누가 알아? 살인범은 사람을 죽인 놈이지만 유괴범은 미래를 죽인 놈이야. 그러니까 유괴범이나 아이를 죽인 놈들은 그냥 죽여선 안 돼. 아주 진절머리나게 해서 죽여야 돼.
철구는 왜 지금 그 말이 떠올랐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문득 이번 사건을 떠올렸다. 사람들에게 원치 않는 기억을 주입하고, 그들로 하여금 '무모한 행동'을 하게 만들고, 끝내는 죽음에 이르게 한 파렴치한들. 철구는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그리고 연기를 훅 뱉으며 생각했다. 그럼 우리는 어땠을까? 과연 학교에서 배운 것들이 내가 원하던 것이었을까? 어쩌면 사회가, 아니 기득권들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게 만들지는 않았을까? 너무 비약하는 것 같았지만, 철구는 다시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고개를 저었다.
- 웹소설이라...
철구는 아무나 글을 올릴 수 있는 웹소설을 떠올렸다. 그러면서 만약 혜민이 알았다면 혜민은 아마도 최고의 작가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글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자신과 다르게 혜민은 대학 시절부터 글을 곧잘 썼고, 나름 상도 받았기 때문이었다. 자신과 결혼을 한 이후에 자신이 글을 잘 읽지 않았기에 글쓰기는 거의 하지 않았지만, 이런 것이 있는 줄 알았다면 혜민 역시 거기에 글을 많이 올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이 바뀌면서 참 많은 것이 바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소설가나 시인이라고 하면 뭔가 대단한 아우라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웹소설을 보고 있노라니 이제 소설가나 시인이 하늘에서 우리와 다른 공기를 마시는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의 주변에 있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걸 느끼게 되었다. 물론 동전의 양면처럼 이런 현실에서 예전처럼 양질의 글들이 책으로 나와 독자들에게 읽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저런 잡다한 글들까지 '글'의 형태로 데이터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모든 일이 다 그런 것이 아니던가?
철구는 담배를 끄고 사무실 쪽을 향해 차를 몰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