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축계(逐界)-쫓겨난 이들의 세계-187화 (187/309)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Ep1 - 8. 마지막 연결 고리(2)

- 결국은 몸이 다르지만 같은 행동을 하도록 기억을 만든 것이로군요.

철구는 그 말에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 우리는 '동일한 기억'에만 집중해서 잘못 판단했던 거죠. 그들에게 '동일한 기억'이 어떤 의미인지가 중요했던 거죠. 결국 홍성표라는 본체는 별 중요하지 않은 거였어요. 그래서 이런 저런 틈이 있었던 것이었죠.

철구의 말을 들은 석호가 얘기를 했다.

- 그 놈들의 의도가 분명하군요.

석호의 말에 철구와 세현이 석호를 쳐다보았다. 석호는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 기억을 추출하고 주입하는 것은 표면적인 일이었네요. 그들에게 같은 공포를 주입하고 웹소설을 통해 일깨우는 암시를 내린 것이죠. 그리고 그들은 같은 행동을 하도록 설계된 것이군요. '생각'은 다르지만 '행동'이 같은 인간들.

철구는 석호의 말에 고개를 끄떡였다.

- 획일적인 사고를 하는 같은 인간들이죠. 그들의 조종을 받는 인간일 수도 있죠. 마치 군대의 명령처럼.

철구의 말에 세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 어이없군요. 그런 세상을 만들어서 독재자라도 되려는건가요?

세현아 무심코 던진 한 마디에 석호가 무겁게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 그럴 수도 있겠죠. 아니 지금까지의 정황으로 볼 때 그런 생각이 농후해요.

철구는 잠시 생각을 했다. 세현은 그 사이에 석호를 보며 말했다.

- 현실이 게임도 아니고 모든 인간들의 기억을 다 조작하는 게 가능할까요?

세현의 말에 석호가 대답을 했다.

-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어요. 과거의 독재자들은 독재 이후에 프로파간다(propaganda)를 했는데, 오히려 반대로 대중 매체나 인터넷을 통해 공포에 대한 주입을 먼저 한 후에 암시적 행동을 유발하게 한다면 말이죠.

석호의 말에 세현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철구는 그런 세현과 석호를 보며 말했다.

- 뭐 나중에 일어날 일은 나중에 걱정하고. 일단 지금 일어난 일들을 정리해 본다면 '홍성표'라는 인물의 기억, 그러니까 공포의 기억을 주입한 후에 암시를 걸어 행동을 하게 한다는 것. 그러니까 여기서 '홍성표'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죠. 그리고 어쩌면 그들의 수법이 더 발전하면 좀 더 간단한 방법으로 이런 일을 할 수 있겠죠. 지금처럼 병원에 잡아다가 기억을 어쩌고 하는 것보다. 아까 신부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말이죠.

철구의 말에 석호는 고개를 끄떡였다.

- 결국 이번 일은 그들의 임상실험이라는 말씀이군요.

석호의 말에 철구는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 그것도 일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철구의 말에 두 사람 모두 낮게 신음성을 흘렸다. 그런데 그 때 컴퓨터에서 '삐삐' 소리가 들렸다. 모두의 시선이 컴퓨터 쪽으로 향하자 컴퓨터에서 말소리가 나왔다.

- 얘기 다 끝났으면 모니터를 봐라.

그러더니 모니터에는 백과사전의 내용이 나왔다.

피보나치 수열

첫 번째 항의 값이 0이고 두 번째 항의 값이 1일 때, 이후의 항들은 이전의 두 항을 더한 값으로 이루어지는 수열을 말한다. 이를테면, 제3항은 제1항과 제2항의 합, 제4항은 제2항과 제3항의 합이 되는 것과 같이, 인접한 두 수의 합이 그 다음 수가 되는 수열이다. 즉, 0, 1, 1, 2, 3, 5, 8, 13, 21, 34, 55,... 인 수열이며, 보통 a1=a2=1, an+an+1=an+2 (n=1,2,3...) 로 나타낸다. 이것은 L.피보나치가 1202년 《산술(算術)의 서(書)》에서 처음으로 제기하였다. 이렇게 단순한 수열이 중요해진 것은 이 수열이 자연계의 일반법칙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모니터 화면을 보던 석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 아! 피보나치 수열... 왜 그 생각을... 대장은 어떻게..

컴퓨터에서 딱딱한 기계음이 들렸다.

- 이건 쉬운 거다. 글자들을 수열 체계로 배열해 보니 대강 각이 나왔다.

그러더니 다음 모니터에는 '죽음의 서' 작가의 말이 떴다.

이제는 다 끝이다. 이 모든 것을 다 멈춰라. 아무 것도 없었다. 지금서부터는 평범하게 애도 낳고 잘 살아야 한다. 이제 모든 걸 잊고 편안히 살라.

그리고 나서 피보나치 수열에 해당하는 0, 1, 1, 2, 3, 5, 8, 13, 21, 34, 55의 글자에 동그라미가 쳐졌다. 그 글자들을 배열하니 '이제는 끝이다 없애라'라는 말이 나왔다.

- 이게 무슨...

철구의 말에 석호가 말을 꺼냈다.

- 공포... 어쩌면 그 소설의 내용도 그들에게 주입된 공포 중 하나였고, 작가의 말에서...

그러더니 다른 글들을 열었다. 죽음의 서에는 다른 글에서 볼 수 없었던 '작가의 말'이 모두 붙어 있었다.

작가의 말

미려는 더 쓸 책의 모양이 여기 없다는 걸 알아야 한다.

석호가 작가의 말을 피보나치 수열로 배열을 하니 '미려는 쓸모없다'가 나왔다.

- 소설의 내용은 중요한 게 아니었어요. 어쩐지...

석호와 세현은 이제야 의문이 풀렸다. 다른 소설들은 모두 다른 소설을 암시하는 역할 뿐이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이 소설을 읽도록 유도한 글이었다. 그리고 이 글 안에, 그리고 다른 소설과 다르게 이 글에서는 내용이 공포를 주었고, 작가의 말이 암시였던 것이었다. 결국 마지막 구절로 명령을 내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 그런 것이었군요.

철구는 모니터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말을 했다.

- 그런 걸로 각성이 될 수 있나?

철구의 질문에 세현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저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잘 모르겠어요.

세현의 말에 철구는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 할매가 처음이라면 뭐 다 처음이겠지. 암튼 이놈들 점점 의도가 불순해지고 있어.

석호는 철구의 말을 받았다.

- 어쩌면 처음부터 불순했는지도 모르죠.

철구는 탁자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 그런데... 다 알았다고 해서 어쩔 수가 없는 일이로군.

철구의 체념적인 말에 석호가 대답을 했다.

- 어쩌면...

석호는 모니터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 여기 마지막 소설의 작가의 말 부분이요. '이제는 끝이다 없애라' 그런데 여기에는 누구를 없애라는 건지 그 대상이 나오지 않았어요. 그냥 '없애라'는 것만 나왔을 뿐이에요. 물론 이 소설이 올라온 다음에 병원에 있는 홍성표들이 죽어서 우리는 목적어를 '홍성표들'로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어쩌면 그게 아니라 다른 것을 암시하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석호의 말에 철구는 고개를 끄떡였다.

- 그렇군요.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철구는 그 말에도 여전히 조금은 회의적인 목소리였다.

- 우리가 그 '목적어'를 어떻게 찾아내죠? 더 이상 올라오는 소설도 없고...

철구의 말에 석호는 입을 다물었다. 냉정하게 보자면 철구의 말이 틀린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웹소설을 올리기 전까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 때 세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 그 웹소설 올린 사람, 호머 제이 심슨 주니어를 찾는 건 어떨까요?

세현의 말에 철구가 입을 열었다.

- 그 놈이 이 일과 상관이 있을까? 단지 이름만 도용되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미국에서 올린 것일 수도 있잖아. 그리고 지난 번 말로는 한국에 들어온 적이 없다면서?

그 때 석호가 모니터를 보며 말했다.

- 혹시 최근 1년 동안 출입국 기록에서 그 사람을 찾아볼 수 있을까요?

석호의 말에 '삐삐' 소리가 들리며 말소리가 들렸다.

- 데이터가 방대해서 시간이 조금 걸린다.

대장의 말에 철구가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 그러면 당분간은 아무 것도 없겠군. 그럼 난 그동안 성준이 녀석 도와서 도망친 그 놈 찾으러 다닐게요.

철구의 말에 석호가 조금은 심각한 얼굴로 철구를 쳐다보았다.

- 조심하세요.

철구는 석호의 말에 뭔가 가슴이 섬뜩해졌다. 평소의 석호라면 '조심하라'기보다 '잘 다녀오라'고 얘기를 했기 때문이었다. 철구는 석호의 말에 고개를 돌려 석호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석호는 여전히 심각한 표정을 하고는 말을 했다.

- 왠지 기분이...

철구는 석호의 말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 무섭게 그러지 마십쇼. 신부님이 그러니까 꼭...

철구는 '무당'같다는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닫았다. 석호의 과거를 알고 있기에 철구는 그냥 고개만 끄떡였다. 철구가 밖으로 나오자 세현이 석호를 보며 물었다.

- 왜 그러세요?

세현의 말에 석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모.. 모르겠어요. 그냥 철구 씨 신상에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이어서요.

석호의 말에 세현은 고개를 저었다.

- 아마 신부님이 '성표'라는 사람한테 당해서 그런 느낌이 드는 걸 거에요. 철구 씨라면..

세현의 말에 석호는 고개를 끄떡였다.

- 제가 예민해서 그런가 보네요. 후후.

석호가 허탈하게 웃음을 짓자 세현은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석호의 말에 왠지 불안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세현은 석호의 능력을 직접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혹시 예지 능력 같은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런 것이야 말로 비과학적인 것이었지만, 세현은 성당에서 본 석호의 모습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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