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축계(逐界)-쫓겨난 이들의 세계-172화 (172/309)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Ep1 - 5. 성표의 본색(1)

5. 성표의 본색

성표는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그 순간 의식 아래서 잠들어 있던 고통이 찾아왔다. 마치 칼로 난도질하듯 아랫배가 몹시 아파왔다. 성표는 갑작스런 고통으로 인해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아랫배를 부여잡고 힘겹게 화장실로 향해 기어갔다. 어둠 속에서 필사적으로 화장실 불을 켜는 순간 성표는 아랫배의 고통보다 더 큰 충격을 받았다. 화장실 불빛으로 비치는 자신의 배 아래의 끈적끈적함을 보았기 때문이다. 성표는 자신의 아랫배 아래로 자신도 모르게 시선이 갔다. 어디서 흘러나온지 모르는 정체모를 피가 자신의 하체에 잔뜩 묻어 있었다.

- 뭐.. 뭐야?

성표는 고통스럽지만 몸을 돌려 자신의 아래쪽을 쳐다보았다. 성표는 그 순간 소스라치게 놀랐다.

- 내... 내...

그리고는 바깥을 향해 크게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목구멍 안에 무언가 가득 찬 것처럼 목소리가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성표는 몹시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아랫도리를 쳐다보았다. 자신의 하반신이 자신과 분리된 채 멀리 따로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분리된 하반신을 아래에서 누군가가 붙잡고 있는 것이었다. 성표는 하반신 아래쪽, 어두운 부분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 누... 누구야?

성표의 목소리에 하반신 아래에서 다리를 붙잡고 있던 사람이 벌떡 일어났다.

- 끈질긴 녀석이군.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성표는 자신도 모르게 몸이 굳었다.

- 너.. 넌...

조금 가는 목소리가 성표의 귓가를 때렸다.

- 기억하고 있나 보네?

성표는 그를 쳐다보며 고개를 마구 저었다.

- 아... 아냐... 넌... 넌 불 타 죽었어... 그 날... 그 날...

성표의 부르짖음에 그는 한걸음 앞으로 나와 밝은 곳에 우뚝 멈춰 섰다.

- 아니야. 난 이렇게 살아 있는걸?

성표는 밝은 곳에서 그의 얼굴이 나타나자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 미... 철민이.. 네가 어떻게 여기를...

성표의 말에 철민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 여기? 아주 쉬워.

철민은 한걸음 다가와 성표의 귀에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붙이며 속삭였다.

- 네가 있는 곳은 어디든 내가 갈 수 있거든. 이제 우리 헤어지지 말자.

성표는 뒤로 물러나며 소리를 질렀다.

- 넌 죽었어... 아냐.. 아냐...

성표는 마구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 목소리가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 죽었다고? 아냐. 난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있잖아.

성표는 마구 고개를 저으며 힘겹게 철민에게서 멀어지려고 노력했다.

- 성표 씨... 성표 씨...

성표는 문 밖에서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성표는 그 목소리가 익숙하다는 걸 알고 최대한 힘을 쥐어짜내 크게 외쳤다.

- 사... 살려주세요.

성표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성표의 주변에는 흰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몇 명 서 있었고, 그 사이에 세현이 보였다. 성표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하반신을 쳐다보았다. 두 다리가 멀쩡하게 보였다.

- 무.. 무슨 일이...

세현은 성표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 괜찮아요. 이제 다 알았으니까.

세현의 뜬금없는 말에 성표는 세현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 다 알다뇨?

세현은 크게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성표를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다른 의사들을 보더니 고개를 끄떡였다. 다른 의사들은 세현의 끄덕거림을 보고는 밖으로 나갔다. 의사들이 밖으로 나가자 세현은 성표를 보며 말했다.

- 성표 씨는 지금 많이 아파요.

세현의 말에 성표는 고개를 저었다. 어제까지 입지 않았던 억압복을 입고 있었기에 성표는 세현을 쳐다보며 물었다.

- 제가 아프다뇨? 도대체 어디가요?

세현은 그런 성표를 보며 말했다.

- 성표 씨, 혹시 가끔 기억이 나지 않는 경우가 있나요?

세현의 말에 성표는 고개를 저었다.

- 기억이 나지 않는다뇨? 제가 기억상실증이라도 걸렸다는 건가요?

성표의 말에 세현은 고개를 저었다.

- 아뇨. 성표 씨, 혹시 아까 꿈꾸지 않았나요?

세현의 질문에 성표는 고개를 끄떡였다.

- 제.. 제가 잠꼬대를 했나요?

세현은 고개를 저었다.

- 아뇨. 성표 씨를 진단하기 위해서 최면을 걸었어요. 아마 그건 최면 상태에서 경험한 일 일거에요.

세현의 말에 성표는 고개를 저었다.

- 최... 최면이라뇨? 저는 그런 적이...

세현은 성표의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 사실 성표 씨가 병원에 입원을 하고 일주일간 지켜봤어요. 그런데 성표 씨의 행동이 묘하게 이질적이더라구요. 책을 열심히 읽을 때도 있고, 저와 아주 유쾌하게 얘기를 나눌 때도 있었는데, 가끔은 아주 우울한 모습으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볼 때도 있었고, 가끔은 무언가를 잊기 위해서 고개를 저으며 혼자 '아니야'를 외치기도 했죠. 그것들은 모두 영상으로 기록되어 있어요.

세현의 말에 성표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을 했다.

- 그럴 리가 없어요. 절대...

세현은 성표에게 얘기를 했다.

- 그래서 진단을 해 보기로 한 거예요. 도대체 무슨 병을 앓고 있나 해서요. 그런데 예상대로 성표 씨는 해리성 인격 장애를 앓고 있다는 진단이 나왔어요.

세현의 말에 성표는 고개를 저었다.

- 제.. 제가 이중인격자라고요?

세현은 성표의 말에 고개를 끄떡였다.

- 마... 말도 안 돼...

성표의 반응에 세현이 얘기를 이어갔다.

- 최면을 걸어서 성표 씨의 무의식에 접근을 해 봤어요. 그런데 성표 씨는 놀랍게도 '부수 인격'이더라구요.

세현의 말에 성표는 놀란 표정으로 세현을 쳐다보았다. 세현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으로 성표에게 말을 했다.

- 지금 제가 얘기하고 있는 성표 씨가 만든 인격이에요.

세현의 말에 성표는 고개를 저었다.

- 이.. 이게 무슨...

세현은 성표에게 다시 말을 했다.

- 처음엔 저도 놀랐어요. 본 인격을 능가하는 만들어진 인격이 있다는 걸 상상하기 힘들었거든요. 아니 어쩌면 '인격'이라고 말하는 게 의학적으로 말이 안 되긴 하지만, 본래의 성격보다 다른 성격이 더 강하게 나타나는 경우는 없었거든요. 대개 본래의 인격에서 도피하고자 새로운 성격을 가진 인격을 만드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도피할 때만 새로운 성격이 나타나는 게 해리성 인격 장애의 특징이죠.

성표는 커다란 눈이 되어 세현을 쳐다보았다.

- 그.. 그럼 전... 전 뭐죠?

세현은 성표를 보며 말했다.

- 성표 씨는...

세현은 성표를 몹시 측은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성표는 그런 세현의 눈을 보며 무언가 아련함이 느껴졌다.

- 우선 제가 성표 씨에게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 먼저 말씀드려야겠네요.

세현의 말에 성표는 아까보다는 많이 안정된 표정으로 세현을 보았다.

- 성표 씨는 고아에요. 본인이 '엄마가...' 이렇게 얘기한 건 다 거짓이었어요.

성표는 세현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말에 다시 놀란 표정이 되었다.

- 그.. 그럴 리가요. 저는 엄마랑 통화도...

세현은 성표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 성표 씨의 핸드폰에 있는 번호로 연락을 했더니 대행 서비스라고 하더군요. 외로운 현대인을 위해 역할 대행을 해 주는 서비스라고. 이미 확인을 했죠.

성표는 세현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 아니야. 아니라고.

세현은 성표를 쳐다보며 조금은 냉정하게 얘기를 했다.

- 지금 제가 얘기하고 있는 성표 씨는 진짜 성표 씨가 아니에요. 대개 새로운 도피처를 만들 때에는 본인의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을 꾸미는데 오히려 성표 씨는 반대였어요. 본인의 감추고 싶은 원래 성격을 새로운 이름으로 지었죠. 그것도 성표 씨가 되고 싶은 사람의 이름으로.

세현의 말에 성표는 정신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세현은 개의치 않고 얘기를 이었다.

- 성표 씨가 바라는 인격은 지금의 인격이 맞아요. 아니 어쩌면 원래 성표 씨가 갖고 있는 성격이 지금의 성격이지만, 그 남자 김광민과의 만남으로 인해 어두워졌겠죠.

세현의 말에 성표는 힘이 빠진 듯이 그냥 있었다.

- 지금은 치료가 중요해요. 그 원인을 알았으니까 해결 방법도 알고 있어요.

세현이 그렇게 말을 하고 돌아서서 나가려고 할 때 성표의 입이 열렸다.

- 아냐. 당신이 틀렸어. 난 성표야. 당신이 잘못 알고 있는 거야.

너무나도 시니컬한 말투에 세현은 저절로 고개를 돌려 성표를 쳐다보았다. 성표는 세현을 비웃으며 쳐다보고 있었다.

-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해? 후후.

세현은 성표를 쳐다보며 물었다.

- 넌 누구지?

압박복이 조금 불편한 듯한 표정을 짓던 성표는 세현에게 얘기를 했다.

- 나? 난 성표지. 홍성표.

세현은 그 순간 머리가 복잡해졌다. 하지만 최대한 침착하게 얘기를 했다.

- 당신은 성표 씨가 아닌 것 같은데?

세현의 말에 성표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성표면 어떻고 아니면 어때? 어차피 모두 나인데.

세현은 순간 그것이 성표의 새로운 인격이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는 조금은 놀란 표정이 되었다. 최면 요법을 쓰면서 성표의 내면과 무의식을 다 관찰했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의외의 상황에서 나타난 의외의 모습의 성표로 인해 조금 혼란스러웠다. 사실 성표가 해리성 인격 장애를 앓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기도 무척 힘든 과정이었다. 전체적인 상황에서 성표에게서 의외성을 찾기가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성표를 지켜보던 세현은 가끔 성표가 무척이나 우울해 하며 멍한 표정으로 창밖을 쳐다보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그 연결 고리를 찾았다. 물론 '우울한 모습'이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었지만, 세현은 그 때마다 나타나는 신체적 변화와 근육의 경직 등을 통해 나름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자신을 비롯해 몇몇 전문가들과 함께 성표에게 최면 요법을 실행한 것이고, 그의 안에 우울함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철민'을 발견해 낸 것이었다. '철민'의 모습은 힘없이 당한, 그리고 좀 더 강한 남자가 되고 싶은 욕망만 갖고 있는 인격이었기에 '성표'의 모습에 크게 영향을 주지 않았다. 그렇기에 더욱 성표가 해리성 인격 장애를 앓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기 힘들었던 것이었다. 세현은 성표를 놔두고 밖으로 나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