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축계(逐界)-쫓겨난 이들의 세계-171화 (171/309)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Ep1 - 4. 의심(5)

- 사람도 실험을 한 거니? 이미?

달평의 말에 미연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밖으로 빠져 나갔다. 그러자 달평은 미연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석호는 놀라서 멍하니 있는 철기 옆으로 다가갔다.

- 아까 추출된 기억이 어떤 겁니까?

석호의 말에 철기는 화들짝 놀라며 모니터에 화면을 띄웠다. 거기에는 흐릿한 사진처럼 누군가의 얼굴이 나타나 있었다.

- 이게 전부인 건가요?

석호의 말에 철기는 고개를 끄떡였다.

- 워.. .워낙 시간이 짧아서요.

- 아.. 그렇군요.

석호는 조금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 핵심 멤버 두 사람이 저러니 오늘 임상 테스트는 그만 해야겠군요.

석호의 말에 철기는 고개를 끄떡였다. 철기 역시 밖으로 나가자 석호는 지하 연구실에 혼자 남게 되었다. 석호는 어쩌면 이 기회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연구실에서 밖으로 나오자 여러 기계 장치들이 보였다. 석호는 천천히 그 기계 장치들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외적인 것만 봐서는 어디에 쓰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석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반대쪽에 있는 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그 문은 잠겨 있어서 열 수가 없었다. 석호는 그 문에서 나와 다른 쪽 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 앞에서 문을 열자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그리고 안을 들여다보자 복도에는 조금은 어지러운 불빛들이 반짝였다. 불빛이 어지럽게 흔들리는 것과는 다르게 내부는 무척이나 조용했다. 조용한 가운데 멀리서 들리는 것처럼, 아니 마치 방음벽을 통과해 온 것과 같은 음악 소리가 들렸다. 석호는 그 소리를 따라 발걸음을 내딛었다.

- 오아시스(Oasis)로군.

저 멀리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는 오아시스라는 그룹의 'Half the world away.'라는 곡이었다. 석호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도 그 노래에 귀를 기울이는 자신의 모습이 조금은 우스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석호는 애써 음악 소리를 무시하고 안으로 더 들어가 보았다. 안쪽에는 굳게 닫힌 철문들이 몇 개 있었고, 그 중 한 문 안에서 음악소리가 들렸다. 석호는 그 앞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안을 들여다볼 수도 없는 철문이었기에 안을 들여다보려면 문을 열어야 했다. 석호는 문을 열고 누군가를 만났을 때를 대비해 머릿속으로 변명을 준비하고는 문을 열었다. 그런데 그 안에서 석호는 '누군가'를 만났다. 다만 그 '누군가'는 변명을 할 필요가 없는 누군가였다. 침대에 누운 채 머리에 아까 미연이 만들 기계와 같은 기계를 뒤집어 쓴 누군가였다. 그의 옆에는 복잡한 기계 장치가 쉴 새 없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그러니 신체 상태 반응을 나타내는 바이탈(Vital) 지수가 거의 '0'에 가까웠다.

- 죽은 건가?

그러나 죽었다고 하기에는 얼굴에 생기가 넘쳤다.

- 이게 뭐지?

석호는 그 옆으로 다가가 이런 저런 것을 보다가 모니터를 쳐다보았다.

- 페르소나 에이 플러스 케이(Persona A + K)?

석호는 더 이상 알 수 있는 게 없자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다음 철문도 아무 거리낌 없이 열었다. 그 안에도 마찬가지의 사람이 보였고, 거기에는 어김없이 모니터에 똑같은 문구가 보였다.

- 오아시스 음악은 어디에서...?

석호는 밖으로 나와 방문을 모조리 열어보았다. 그러다가 다섯 번째 방에서 문제의 '오아시스' 음악을 들었다. 거기에는 '마스터(master)'라는 태그가 붙은 모니터가 보였다. 그리고 모니터에는 다른 모니터와 다르게 '페르소나 A'라고만 쓰여 있었다. 석호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몸서리가 쳐졌다.

- 이.. 이건...

석호는 재빨리 그 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기계들 사이를 지나칠 때 어떤 연구원과 마주쳤다. 석호는 그 연구원에게 다가가 웃으며 말했다.

- 여기서 어떻게 나가죠?

석호의 뜬금없는 질문에 연구원은 놀란 눈으로 석호를 쳐다보았다. 석호는 간략하게 자초지종을 설명했지만, 여전히 의구심에 가득 찬 눈으로 석호를 쳐다보았다. 석호는 괜한 의심을 받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미연에게 전화를 걸었고, 미연이 아래로 내려와 연구원과 뭔가 얘기를 하더니 석호에게 다가왔다.

- 죄송해요. 당황스러우셨죠?

석호는 그 말에 어깨를 으쓱했다.

- 연구하다 보면 의견 충돌은 있기 마련이죠.

석호는 미연과 같이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타며 말했다.

- 달평 씨는 그만 뒀어요.

미연의 입에서 나온 말에 석호는 몹시 놀랐다.

- 그만 두다뇨?

미연은 어색한 표정으로 석호를 쳐다보며 말했다.

- 연구하다 보면 그만 둘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미연은 석호를 보며 말을 흐렸다.

- 무슨...

석호가 미연을 쳐다보자 미연은 마음을 잡았다는 듯이 얘기를 했다.

- 이번 연구는 폐기해야 할 것 같아요.

미연의 말에 석호는 당황한 듯이 얘기를 했다.

- 이론적 토대가 마련됐는데 폐기라뇨? 그리고 제가 이 연구에...

석호와 미연이 9층 뇌과학 센터에서 내렸을 때 엘리베이터 앞에는 동진이 서 있었다.

- 센터장님.

미연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서 동진을 보고 말을 했다. 동진은 미연을 보며 고개를 끄떡이고는 석호를 쳐다보며 말했다.

- 제 사무실로 가시죠.

석호는 동진과 함께 뇌과학 센터장실로 향했다. 센터장실 안에 들어가자 온갖 물건들이 들어차 있었고, 지저분한 한 가운데 소파가 하나 놓여 있었다.

- 그 쪽으로 앉으시죠.

석호가 소파에 앉자 동진이 석호의 맞은편에 앉았다.

- 팀장에게 얘기는 들으셨죠?

동진의 말에 석호는 기분이 나쁘다는 듯이 말을 했다.

- 들었습니다만, 이건 예의가 아니지 않습니까? 폐기라뇨?

석호의 날선 말에 동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 윌슨 재단에도 저희가 통보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번 일에 대한 보상은...

동진의 말에 석호가 버럭 소리를 쳤다.

- 이번 임상실험은 성공이었습니다.

석호의 말에 동진이 고개를 저었다.

- 아니요. 실패입니다. 중요한 문제를 간과하셨더군요.

동진의 말에 석호는 고개를 들어 동진을 쳐다보았다.

- 중요한 문제라뇨?

동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 윤리적인 문제요.

동진의 말에 석호는 탁자를 쾅 내려쳤다.

- 그게 무슨 말입니까? 임상실험은 여기서 준비...

그러나 동진은 비웃음 비슷한 걸 흘리며 말했다.

- 서명은 본인이 하셨죠.

석호는 그 순간 그들이 자신을 옭아맬 구실을 미리 만들었음을 알았다. 석호의 입장에서는 그 연구 결과를 가져가지 않아도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최소한 이런 연기를 하지 않으면 그들이 의심을 할 것이라는 생각에 더욱 상황에 몰입했다.

- 그... 그런...

동진은 석호를 보며 말했다.

- 저희가 도의적으로 책임을 지겠습니다. 그러니까 이번 연구는 잊으십시오.

동진의 말에 석호는 비웃었다.

- 이런 식으로 연구 결과를 가로채나요?

석호의 말에 동진은 고개를 저었다.

- 아까 말씀드렸듯이 연구는 실패였습니다. 이건 사실이죠.

동진의 말에 석호가 날카롭게 물었다.

-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제 연구는 겉포장에 불과했다는 느낌이 드는군요.

석호의 말에 동진은 어깨를 으쓱했다.

- 원래 뇌 연구라는 게 그렇지 않습니까? 다 알고 맞는 것 같지만 항상 예측을 벗어나는 것이 있다는 걸.

동진의 말에 석호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동진에게 말을 했다.

- 예측에서 벗어난다라... 아무튼 알겠습니다.

석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동진이 석호의 등 뒤에 말을 했다.

- 이 일은 서로 없던 걸로 치는 게 좋을 듯 합니다.

석호는 협박 비슷한 동진의 말에 동진을 돌아보며 말했다.

- 세상엔 없던 일이지만, 제게는 '있던' 일일 수 있겠죠.

석호가 의미심장하게 말을 남기자 동진은 피식 웃었다. 석호가 밖으로 나가자 동진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 당신이 유병렬 박사 라인이 아니었으면 잊기 싫어도 잊었을 거야.

석호는 밖으로 나와 연구실 안으로 들어갔다. 연구실 안에는 미연만이 책상에 앉아 멍하니 있었다. 석호는 자신의 물품을, 그래봤자 몇 개 되지 않았지만, 챙겼다. 석호가 물품을 챙기는 동안에도 미연은 멍하니 있었다. 석호는 다 챙기고 나가면서 미연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 그동안 즐거웠습니다. 이런 결론을 바란 건 아니었지만.

석호가 돌아서 나갈 때에도 미연은 멍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석호는 그런 미연을 놔두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세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 중요한 정보를 입수했어요. 곧 만나 뵙죠.

석호는 자신의 차를 타고 자신이 머물고 있는 숙소로 갔다. 그리고 자신의 물건을 챙긴 후 충북 쪽으로 차를 몰았다. 어쩌면 그들이 자신을 뒤쫓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유 박사를 먼저 만나보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석호는 가는 차 안에서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 도플갱어, 기억 주입, 페르소나 A, 페르소나 K... 오아시스 음악...

석호는 굳은 표정이 되었다. 이 모든 게 마치 하나의 퍼즐 조각처럼 맞아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 이 자식들...

석호는 더욱 세게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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