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Ep1 - 4. 의심(4)
- 전제가 잘못 되었군요. 왜 꼭 인간이 하드웨어라고 생각하시죠? 인간이 아니라 기억을 데이터화해서 영상 장치나 다른 전기적 장치로 변환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석호의 말에 달평은 크게 고개를 끄떡이다가 말을 했다.
- 그럴 수도 있지만, 그래도 완벽한 재생은 완벽한 하드웨어인 인간이 가장 정확하지 않을까요?
그러더니 달평은 고개를 저었다.
- 사람의 기억을 마음대로 빼고 넣는 건 옳지 않은 거에요.
달평의 말에 석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 지금 하시는 일에 회의(懷疑)를 갖고 계시나요?
석호의 말에 달평은 마치 바람 빠진 인형처럼 축 늘어졌다. 그러자 옆에 있던 미연이 술에 취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 이 놈 평생 소원이 '동물'과 얘기하는 거에요. 그래서 동물의 뇌를 연구하는 거죠.
석호는 미연의 말에 고개를 끄떡였다.
- 야... 일어나. 집에 가야지.
미연은 철기를 보며 말했다.
- 이 자식 좀 부축해. 우리 집으로 가야 되겠다.
그 말을 들은 철기도 몸을 일으켰지만, 몸을 휘청거렸다. 석호가 팔을 잡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대로 쓰러졌을 것이었다. 석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안 되겠군요. 제가 다들 모셔다 드릴 테니까 제 차로 타시죠.
석호는 자신의 차에 달평과 철기를 뒷좌석에 태우고, 미연을 자신의 옆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미연이 알려준 주소로 운전을 하는 길에 미연이 입을 열었다.
- 우리 이상하죠?
미연의 말에 석호는 고개를 저었다.
- 모두 가까워보이는군요.
석호의 말에 미연이 창을 조금 내리며 말했다.
- 바람이 시원하네요.
딴소리를 하다가 뭔가를 생각하듯이 말했다.
- 달평이와 저는 중학교 때부터 친구에요. 남들은 이상하게 보겠지만, 우리 두 사람은...
- 그렇군요.
미연이 창을 올리며 말했다.
- 술에 취하니까 별소리를 다 하죠?
석호는 고개를 저었다.
- 아닙니다. 아주 즐거웠습니다.
석호의 말을 마지막으로 집에 도착할 때까지 두 사람은 침묵을 했다. 집에 도착하자 미연은 자신의 방에 달평과 철기를 눕혔다. 그리고 석호는 보며 말했다.
- 뭐 마음 내키시면 이 집 아무데서나 주무셔도 되요.
미연의 말처럼 이 집 아무데서나 잘 수 있을 만큼 집이 어마어마하게 컸다. 대문을 들어올 때부터 느낀 것이었지만, 마치 유럽의 대저택 같았다. 서울 시내에 이런 집이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이런 집에 이런 연구원이 살고 있다는 것도 놀라웠다.
- 집이 크군요.
석호의 말에 미연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 할아버지 집이니까요.
- 아!
석호의 반응에 미연은 웃으며 말했다.
- 저도 오늘은 피곤하네요. 아무튼 오늘 고마웠어요.
미연의 말에 석호는 고개를 끄떡이고 말했다.
- 네. 오늘 즐거웠습니다. 내일 연구소에서 뵙죠.
석호는 미연에게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현관문을 빠져나와 대문 앞으로 걸음을 옮기다가 고개를 돌려 거대한 집을 쳐다보았다. 거대한 집은 마치 악마의 입과 같았고, 그 안에서 자고 있는 사람들은 마치 그 악마의 입으로 들어간 제물처럼 여겨졌다. 석호는 고개를 저으며 밖으로 빠져나왔다.
- 내가 이상해지는군. 훗.
다음날 연구소에서 만난 세 사람은 어제보다 더 푸석해진 얼굴들이었다. 하지만 석호가 주도하는 다양한 실험들을 무리없이 해냈다. 석호는 틈나는 대로 유 박사와 임 박사에게 전화를 걸어 실험의 세부적인 내용들을 물었고, 그 때마다 그들은 아낌없이 조언을 해주었기에 실험은 대체적으로 안정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석호는 그 실험과는 별개로 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파악해야 했기에 마음이 몹시 분주했다. 그들이 퇴근하는 시간도 불규칙했고, 또 톰슨 병원 안에 있는 다양한 실험실은 어디에서 자신이 알아봐야 하는지 헛갈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CCTV도 석호가 행동하는 것에 장애가 되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고, 석호는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할 수 없다는 생각에 몰래 이곳저곳을 들락거렸다. 물론 다니는 동안에는 최대한 CCTV 사각 지대를 활용했다. 하지만 건물에 있는 사무실을 아무리 뒤지고 다녀도 자신이 알아보는 것에는 접근할 수가 없었다. 석호는 한 달이라는 시간동안 원래 계획에 없던 '연구'에서만 성과를 낼 수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연구도 어느덧 마무리가 되었고, 석호는 밖에서 정보를 다시 찾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할 무렵 의외의 상황이 벌어졌다.
- 최 박사님, 오늘은 지하 연구실에서 실제 실험을 해 본답니다.
석호는 달평의 말에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지하 연구실'
석호는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갈 수 없는 곳이 바로 지하 연구실이었기에 이번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물론 위험은 있었지만, 최대한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알아보려고 했다. 석호와 미연, 달평과 철기가 통제구역으로 통하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을 때, 달평이 우스갯소리를 했다.
- 우리도 생체 실험을 하는 건가요?
달평의 실없는 말에 미연은 정색을 하는 표정을 지었고, 석호는 의아한 듯이 그 둘을 쳐다보았다.
- 생체 실험이 아니라 임상 실험이야!
미연의 날카로운 말에 달평은 입술을 쭉 내밀었고, 석호는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다.
- 이번 실험을 위해서 실험 참가자를 모집했고, 동의서를 모두 받았어요. 단지 기억을 추출하는 것이기 때문에 추출한 기억은 실험의 성패 여부와는 관련 없이 폐기하기로 했어요.
미연은 석호에게 재빠르게 변명을 하듯이 말을 했다. 석호는 그 순간 미연에게서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달평과는 다른 뭔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 네. 알겠습니다.
석호의 짧은 대답이 끝나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자 넓은 공간이 나왔고, 다양한 기계 장치들이 보였다. 석호가 다른 쪽 기계를 기웃거리자 미연이 석호를 불렀다.
- 저희 실험실은 이쪽이에요.
석호가 그 말에 '아!'하고 그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또 다른 문을 통해 들어간 방에는 두 명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석호는 눈을 감고 누워있는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모두 앳된 얼굴들이었다. 한 명은 남자였고, 한 명은 여자였다.
- 실험 참가자들인가요?
석호의 질문에 미연이 고개를 끄떡였다.
- 두 사람 다 대학생이에요. 여기 사인을 해 주셔야 되요.
석호는 서류를 받아들고 서류의 내용을 읽어 보았다. 이 실험에 대한 주의사항과 책임과 한계에 대한 내용이었다. 석호는 그 서류에 사인을 하자 미연이 달평에게 말을 하고 재빠르게 머리 부분에 캡 같은 걸 씌웠다. 석호는 그 캡을 보며 말했다.
- 잘 만들어졌군요.
석호의 말에 달평이 입을 열었다.
- 저희가 하는 연구와 일치하는 부분들이 꽤 돼서 그걸 활용했죠.
기계적인 장치가 모두 설치가 되자 미연이 석호를 쳐다보았다.
- 시작할까요?
미연이 석호를 보며 말을 하자 석호는 고개를 끄떡였다. 미연은 철기를 보며 말했다.
- 신호가 잡혀?
- 네. 수면 신호와 기억 신호 모두 잡히고 있어요.
미연은 그러더니 옆으로 가서 스위치에 손을 가져대 대었다.
- 셋 하면 시작할 테니까 철기 씨도 준비해.
- 네. 준비 됐습니다.
- 하나, 둘, 셋.
미연이 버튼을 누르자 철기 역시 컴퓨터의 엔터키를 힘차게 눌렀다. 그러더니 MRI가 돌아가는 듯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 상황은 어때?
미연이 철기를 보며 묻자 철기는 그래프들을 보며 말했다.
- 아직 큰 변화는 없어요. 기억 신호도 아직은 그다지 강하지 않구요.
- 잘 지켜봐.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여자의 몸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 무슨 일이야?
철기는 모니터를 보며 소리쳤다.
- 수면 반응이 이상해요.
달평이 여학생 앞으로 달려들며 말했다.
- 심장 박동이 불규칙해.
달평은 그러면서 미연을 쳐다보며 외쳤다.
- 기계 꺼!
미연은 고개를 저었다.
- 일시적인 현상일 수 있으니까 잠깐...
그러나 여학생의 반응을 점점 이상해졌다. 석호는 재빨리 몸을 옮겨 기계의 스위치를 내렸다.
- 괜찮습니까?
석호가 스위치를 내리자 미연이 석호를 쏘아보았다. 달평은 여학생의 상태를 보고 고개를 저었다.
- 응급실로 옮겨야 해요. 상태가 점점 나빠지고 있어요.
달평이 그렇게 얘기를 하자 미연이 소리를 쳤다.
- 일시적인 신체 불균형이야! 곧 있으면 좋아질 거라고!
미연의 외침에 달평이 미연을 쳐다보았다.
- 그건 네 생각이고! 지금 사람이 죽게 생겼는데... 그리고 처음 하는 실험인데 일시적인지 아닌지 어떻게...
달평은 그렇게 말하다가 미연을 쳐다보았다. 석호 역시 무언가 짐작되는 바가 있었지만, 그냥 침묵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철기가 모니터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 여자에게서 기억이 일부 추출되었어요.
석호와 달평이 그 쪽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여자가 누워있는 침대 쪽으로 눈을 돌렸다. 여자는 아까의 이상한 반응이 사라진 듯 고르게 숨을 쉬고 있었다. 달평은 미연에게 눈을 돌렸다.
- 우리 얘기 좀 할까?
달평이 미연에게 다가가자 미연은 달평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 할 말 없어.
그러자 달평이 크게 소리를 쳤다.
- 난 많아!
미연은 달평을 외면하고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 순간 달평이 미연에게 크게 소리를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