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축계(逐界)-쫓겨난 이들의 세계-167화 (167/309)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Ep1 - 4. 의심(1)

4. 의심

말끔한 신사복 차림의 남자 하나가 병원 로비로 들어오자 로비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로 쏠렸다. 특히나 몇몇 여자들은 노골적으로 그를 쳐다보았고, 지나가던 간호사들조차 그를 쳐다보느라 발걸음이 느려졌다. 남자는 로비에 있는 안내 데스크 앞으로 다가가서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 신경정신과 유병렬 박사님을 만나고 싶어서 왔는데요?

남자의 말에 예쁘장하게 생긴 안내 데스크의 여직원은 마치 사랑고백이라도 받은 듯이 얼굴이 붉어지며 컴퓨터 자판을 두드렸다.

- 유병렬 박사님이요? 지금은 7층에 계시는데요? 무슨 일 때문이시죠? 예약 때문이신가요?

안내 데스크 여직원의 말에 남자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예약 때문은 아니구요, 만나 뵐 일이 있어서요.

남자가 뒤돌아 엘리베이터 앞으로 가자 안내 데스크 여직원은 자신의 머리를 콩 때이며 중얼거렸다.

- 예약이건 뭐건 내가 왜 그런 말을 한 거야?

안내 데스크에서는 말 그대로 안내만 하면 되는 것이었는데, 자신이 오지랖 넓게 나서서 '예약' 운운한 것이 부끄러웠기 때문이었다. 남자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사라지자 여기저기서 조금은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 연예인은 아닌 것 같은데, 정말 잘 생기지 않았어?

- 그러게. 남자가 뭐 저렇게 생겼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7층으로 올라가던 남자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 이럴 땐 귀찮다니까.

남자가 엘리베이터에 내려서 7층에 있는 유병렬 박사의 사무실로 걸어가는 동안에도 몇몇 사람들이 남자를 흘끗거리며 쳐다보았고, 그때마다 남자는 조금은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유병렬 박사 사무실 앞에 선 남자에게 한 간호사가 다가와서 물었다.

- 어떻게 오셨죠?

남자는 그 간호사를 쳐다보며 예의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 오늘 만나 뵙기로 약속이 되어 있어서요.

남자의 말에 간호사는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 그런데 어쩌죠? 지금 잠깐 나가셨는데. 저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 계시면 금방 오실 거예요.

간호사의 말에 남자는 고개를 끄떡이고는 대기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조금 후에 아까 그 간호사가 커피를 한 잔 가지고 남자에게 건네주었다.

- 감사합니다.

남자는 커피를 받아들고는 간호사에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간호사는 얼굴이 붉어진 채 '아니에요.'라고만 말하고 도망치듯 가버렸다. 그 때 계단을 올라온 유 박사가 남자를 보며 말했다.

- 신부님은 여전히 인기가 좋으시군요.

신부라고 불린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유 박사를 향해 인사를 했다.

- 잘 계셨죠?

유 박사가 내미는 손을 맞잡은 남자는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사무실 안으로 두 사람이 들어가자 밖에서 남자를 쳐다보던 간호사들이 술렁거렸다.

- 신부라고?

- 저... 저 사람이 신부?

여기저기서 안타까운 탄식이 터져 나왔다. 석호는 민망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유 박사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석호가 자리에 앉자 유 박사는 미소를 띠며 석호에게 얘기를 했다.

- 여기까지 직접 오실 정도면 무언가 일이 있다는 말씀인데...

유 박사의 말에 석호는 고개를 끄떡였다.

- 이 병원의 신분이 필요해서요.

석호의 말에 유 박사는 조금 놀란 표정이 되었다. 물론 석호가 무슨 일을 하는지 유 박사는 대강은 알고 있었지만, 신부라는 신분을 갖고 있는 석호가 대놓고 신분 위조를 위해 도와달라는 말은 익숙지 않았다.

- 알겠습니다. 의사 신분이면 되는 겁니까?

석호는 민망한 듯이 고개를 끄떡였다. 유 박사는 석호를 응시하다가 말을 꺼냈다.

- 그들이 또 무언가를 하는 군요.

석호는 유 박사의 말에 미미하게 고개를 끄떡였다. 유 박사는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얘기를 했다.

- 저 같은 괴물이 안 나왔으면 좋겠는데...

유 박사의 조금은 한스러운 말에 석호가 고개를 저었다.

- 유 박사님은 괴물이 아닙니다. 적어도 제가 알기 시작했을 때부터는요.

유 박사는 희미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떡였다. 그리고는 석호에게 조금은 슬픔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얘기를 했다.

- 최베드로 신부님 일은 안됐습니다.

유 박사의 말에 석호는 고개를 끄떡였다.

- 어쩌면 최베드로 신부님께서 더 큰 일을 위해 스스로 신부에서 물러난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유 박사는 석호의 말에 크게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 그렇겠군요. 그간 알아온 최베드로 신부님이라면 능히 그러시리라 생각됩니다만..

석호는 유 박사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미 머리가 하얗게 새어버린 유 박사는 언제나 인자한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말 못할 과거가 있었다. 석호도 익히 알고 있는 것이었지만, 함부로 입 밖에 내거나 그러지는 못할 만한 일이었다.

- 네...

유 박사는 석호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했다.

- 장 신부님을 보면 예전 최베드로 신부님이 떠오릅니다. 한창 시절, 저를 악의 구렁텅이에서 빼내 주었을 때처럼요.

유 박사의 말에 석호는 고개를 저었다.

- 저는 아직 최베드로 신부님의 발끝도 못 쫓아갑니다. 그만한 성력을 가지신 분을 찾기 힘들죠.

그러자 유 박사는 고개를 저었다.

- 그럴까요? 아마도 제 생각이 맞을 겁니다.

석호는 유 박사의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유 박사는 한 때 그들의 의견에 동조했던 인물로 조금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였다. 상대의 머리에 손을 대면 뇌파를 통해 그 사람의 기억의 일부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석호의 반응에 유 박사는 여전히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저희 병원 신분만 빌려드리면 되는 건가요?

유 박사의 말에 석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 박사님께서 도와주신다면 더 좋겠지만, 위험할 수도 있는 일이라서요.

석호의 조심스러운 말에 유 박사는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 저 같은 늙은이가 어디에 필요하실지는 모르지만 도움이 필요하다면 제가 힘이 닿는 데까지 도와드리겠습니다.

석호는 유 박사의 말에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그들과의 은원(恩怨) 관계를 초월한 나이임에도 유 박사는 석호에게 도움을 주었다. 유 박사는 잠시 눈을 감았다 뜨고는 말했다.

- 저 같이 어리석은 사람이 저지른 실수를 신부님 같이 훌륭한 분들이 바로잡아 주시니 늙은 제가 미안할 따름입니다.

유 박사의 말에 석호는 고개를 저었다.

- 유 박사님처럼 많은 걸 희생하신 분께서...

석호가 말을 이어가려 할 때 유 박사 앞에 있는 전화기가 울렸다. 유 박사는 미안해 하며 전화를 받았다.

- 그런가? 금방 가겠네.

유 박사는 황급히 전화를 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장 신부님하고 오랜만에 얘기 좀 나누려고 했는데, 긴급 환자가 생겼군요. 허허. 미안합니다.

석호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 아닙니다. 오히려 바쁘신 박사님의 시간을 빼앗아서 제가 죄송합니다.

유 박사는 책상 위에 놓인 청진기를 목에 걸고는 문 앞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 장 신부님마저 잃을 수는 없습니다.

유 박사의 말에 석호는 굳게 입을 다물며 고개를 끄떡였다. 유 박사는 특유의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밖으로 황급히 나갔고, 석호 역시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온 석호는 지난주에 원 회장에게서 온 메일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중국에서 이상 징후 발견. 도플갱어 사건.'

석호는 메일의 내용을 읽기 전까지 그냥 초자연적인 어떤 내용과 관련된 것인가 하고만 여겼다. 그러나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어처구니없는 내용이었고, 그것과 관련된 실험을 한국에서 실시하고 있다는 정보였다. 석호는 그 내용을 확인하고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해서 그 실험을 하고 있다고 알려진 톰슨 병원에 잠입하고자 마음을 먹었다.

- 이놈들은 도대체 뭐하려고...

석호는 혼자 중얼거리며 병원에서 빠져나왔다. 다음날 석호는 위조된 신분증을 갖고 톰슨 병원으로 출근을 했다. 석호의 잘생긴 얼굴 때문인지 입구에서부터 사람들이 쳐다보는 바람에 석호는 조금 민망했다.

- 아.. 이럴 땐 이 얼굴이 원망스럽군.

석호가 입구 안내 데스크에 도착하자 안내 데스크에 있던 안내원이 환하게 웃으며 석호에게 인사를 건넸다.

- 오늘 이쪽으로 발령받은 최태현이라고 합니다.

석호가 자신을 소개하자 안내원은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더니 밝게 웃으며 말을 했다.

- 아! 오늘 9층 뇌과학 센터로 파견 나오신 선생님이시군요. 저쪽 엘리베이터 타시고 9층에 올라가시면 사무실이 나올 거에요. 그리로 가시면 됩니다.

석호는 안내원에게 인사를 건네고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석호 옆에는 조금은 푸석한 얼굴의 의사 한 명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엘리베이터를 쳐다보고 있었다. 주변의 반응이나 소음에 아무 신경을 쓰지 않은 채 조금은 귀찮다는 표정으로 서 있다가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천천히 올라탔다. 석호도 그 의사 뒤에 올라 9층 버튼을 누르려고 했다. 그런데 그 푸석한 얼굴의 의사가 먼저 9층 버튼을 눌렀다. 석호는 곁눈으로 그를 흘끗 쳐다보았다.

- 뇌과학 센터로 가시나 보네요.

석호가 상쾌한 목소리로 의사에게 말을 걸자 그는 조금 뚱한 표정으로 석호를 돌아보았다.

- 네.

그의 짧은 대답에 무안하기도 했지만, 석호는 밝은 얼굴로 얘기를 했다.

- 저도 9층으로 갑니다. 오늘 파견 나온 최태현이라고 합니다.

석호가 그렇게 말을 하자 그는 덥수룩한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 최태현 닥터라...

남자는 잠시 인상을 쓰다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눈을 반짝였다. 석호는 그를 쳐다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 아! 유병렬 박사님 소개로군요.

그러더니 남자는 석호에게 손을 내밀었다.

- 구동진이라고 합니다. 뇌과학 센터장입니다.

석호는 자신을 구동진이라고 소개한 센터장과 악수를 나누었다. 석호는 놀란 듯이 동진의 손을 잡았다. 톰슨 병원의 핵심 연구소가 '뇌과학 센터'인데, 이곳의 책임을 맡고 있는 사람치고는 너무나 젊었기 때문이었다.

- 아! 그러시군요. 오늘 파견 나온 최태현입니다.

석호의 말에 동진은 아까와는 다른 눈빛으로 석호를 쳐다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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