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Ep1 - 3. 알 수 없는 정황(1)
3. 알 수 없는 정황
세현의 병원에서 도망치듯 나온 성표는 회사로 출근하지 않고 또다시 모텔로 숨어들었다.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꼬인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과거의 그 일이야 이미 공소 시효도 지났고, 그건 엄밀히 말하면 정당방위였다. 그리고 이번에 일어난 살인 사건은 자신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하지만 성표는 손이 덜덜 떨렸다. 마치 자신을 옥죄어 오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 의뢰를 하는 게 아니었어. 젠장..
성표는 모텔 방 안에서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자신과 관련된 일을 떠벌리고 다니는 누군가가 자신을 이렇게 만든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자신이 의뢰를 하도록 만들어 자신을 이런 궁지에 빠지게 만들었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성표는 컴퓨터를 켜고 웹소설에 접속을 했다. 분명 다음 얘기가 올라와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 어떤 개새끼가....
성표는 그 소설에 즐겨찾기를 해 놓지 않은 것을 알았다. 성표는 이런 저런 소설들을 클릭하기 시작했다.
제 7화
세상이 무척이나 아름답다. 그저 흥청거리는 것 같은 세상의 사람들도 이 밤엔 모두 아름다운 반딧불이가 된다. 저 빛과 이 빛이 서로 뭉개져 하나의 빛이 되어버린다. 아니 그 불빛들은 태양이 빛을 발하듯, 모두 광선을 쏘듯 원을 중심으로 촘촘히 부챗살을 펴고 있다. 세상의 모든 빛은 어차피 태양에서 온 것이 아닌가. 태양을 닮아 있는 게 뭐가 대수겠는가. 그는 지독한 난시이다. 안경을 벗으면 모든 것이 뭉그러져 보인다.
성표는 뒤로 버튼을 누르고 다른 소설을 읽었다.
제 7화
꾸물거리는 아이보리색 작은 물체가 보인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르지만 구석으로만 숨으려고 온 몸을 뒤틀며 좁은 틈 사이로 기어간다. 저 작지만 징그러운 것에 본능적인 적의가 일어난다. 저 놈 말고 또 있으리라. 저 놈들은 혼자서 꿈틀거리지 않는다. 수백, 아니 수천의 꿈틀거림이 있을 것이다. 그것들은 틈을 보고 있다가 어느 순간엔가 나타날 것이다. 주시하는 대상의 움직임이 멈추는 순간 그것들은 그 곳으로 마구 꿈틀거리며 돌진할 것이다.
- 씨발... 어떤 거야..
제 7화
하루를 사는 이에게는 두려움이란 없다. 어차피 내일 죽으나 오늘 죽으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시간의 흐름이란 그저 초시계의 숫자가 변하는 것일 뿐 느림도 빠름도 아닌 그냥 지나는 것이다. 어차피 사람들은 모두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길에 있는 것이고 상대적으로 빠르냐 느리냐의 선택일 뿐이다. 영원이란 거짓 믿음 속에서 우리는 종말의 시간을 늦추려고 아등거릴 뿐이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영원은 없었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성표는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웠다. 활자들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몹시 심한 두통이 찾아왔다. 머리가 너무나 아파서 성표는 머리를 부여잡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살면서 이런 두통은 처음 겪었는지 성표는 도무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성표는 그 자리에서 몸부림을 쳤다.
- 으... 으....
그러다가 성표는 자신도 모르게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땐 익숙한 얼굴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여... 여긴..
성표가 눈을 뜨자 세현이 웃으면서 말했다.
- 당신이 도망친 병원이죠.
성표는 고개를 세게 흔들었다. 분명 자신은 이 병원에서 빠져 나와 모텔 안에 숨어들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눈을 뜨니까 다시 병원이었다. 이 비현실적인 상황에 성표는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아까보다는 두통이 덜 했지만, 여전히 머리가 지끈거렸다.
- 어떻게 된 일이죠?
성표의 질문에 세현이 성표의 가슴에 붙인 심전도기를 떼며 말했다.
- 당신이 웹소설에 접속했잖아요.
성표는 세현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철구의 전화를 받은 세현은 성표의 위치를 찾기 위해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분명히 웹소설에 다시 접속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대장에게 성표의 위치를 파악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얼마 후에 대장이 성표의 위치를 알려주었고, 세현은 당장 달려가서 성표를 데리고 병원으로 온 것이었다.
- 도대체 왜?
성표의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세현이 대답을 했다.
- 조금 있으면 몹시 화가 난 사람 한 명이 올 거예요.
세현의 말에 성표는 몸을 움직이려고 했지만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 가만히 있어요. 조금 불편하겠지만, 지금은 그러고 있는 편이 나아요. 당신을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말이죠.
세현의 말에 성표가 소리를 질렀다.
- 내... 내가 이 옷을 왜 입어!
성표는 억압복을 보며 소리를 질렀다.
- 치료 받기 전까지는 입으셔야 돼요.
- 치료라니?
성표의 물음에 세현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병실 문을 벌컥 열고 철구와 성준이 안으로 들어왔다.
- 이 자식이야.
성준은 성표를 보며 말했다.
-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요?
성준의 말에 철구가 대답을 했다.
- 그러게. 나도 속았으니까. 뭐.
두 사람의 뜬금없는 대화에 성표가 소리를 질렀다.
- 당신들이 뭔데 날 이렇게 해!
철구는 성표를 보며 말했다.
- 그럴 만하니까 그렇게 하는 거야.
철구의 말에 성표가 갑자기 시니컬한 말투로 얘기를 했다.
- 내가 그 집에 불을 지른 것 때문에, 아니 철민이 아빠를 죽인 것 때문에 그런 거라면 이미 그건 공소 시효가...
성표의 말에 철구가 고개를 저으며 성표 앞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 글쎄. 과연 그것 때문일까?
철구의 말에 성표는 몹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성준이 옆에서 말을 이었다.
- 경상북도 칠곡군에서 당신과 관련된 정보를 찾아봤죠. 그런데 놀랍더군요. 당신 말처럼 그 집은 귀신이 나오는 집이고 이십년 전 귀신들린 아들이 아버지를 죽였다느니,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고 자살했다느니 하는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었죠. 하지만 그건 그냥 마을에 떠도는 얘기일 뿐이었죠. 사실은 그 집에는 서울에서 내려온 의사 한 명이 살고 있었을 뿐이었죠. 약간 정신이 나간. 그리고 입양된 아이가 있었는지는 몰랐어요. 아무도.
성준의 말에 성표가 고개를 저었다.
- 분명... 철민이가 있었어요.
- 그런데 이상한 게 있어요. 아무도 그 철민이라는 존재를 몰라요. 심지어는 학교에서도.
성준의 말에 성표는 고개를 강하게 저었다.
- 그 녀석... 그 녀석은...
그 때 철구가 성표의 말을 끊고 얘기를 했다.
- 근데 이상한 게 뭔 지 알아. 원래라면 시체가 두 구가 나와야 하잖아. 김광민하고 양자 김철민. 그런데 조사해봤더니 한 구뿐이었지.
- 그럴 리가 없어!
철구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 한 구가 더 있긴 있었지. 꽁꽁 숨긴 공간에. 아마 그 녀석이 김철민이 아닐까 하는데?
- 아냐! 죽었어! 절대 그 불속에서 살아나올 수가 없어. 내가... 내가 그 녀석이 들어간 다음 한동안 그 집을 쳐다봤는데... 그 녀석은 죽었다구!!!
김철민의 시신이 없다는 말에 성표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 학교 선생님 말은 다르더군요.
철구와 성준은 학교에 찾아갔을 때, 느꼈던 충격이 고스란히 살아나는 것 같았다. 철구와 성준이 성표가 졸업한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성표에 대해 묻자 성표의 담임을 맡았던 선생님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제가 교단에 30년을 섰지만, 그런 친구는 처음이었습니다.
나이가 지긋한 여 선생님은 아직까지 성표에 대해 또렷하게 기억하는 것 같았다.
- 성표는 무척 소극적인 아이였어요. 아주 우울한 학생이었죠.
여 선생님의 말에 성준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 그런 친구는 꽤 되지 않습니까?
성준의 질문에 여 선생님은 고개를 끄떡였다.
- 네. 그렇지요. 하지만 단순히 그런 학생이었다면 기억에 이렇게 오래 남지 않았겠지요.
여 선생님은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을 지었다.
- 특이한 점이라도 있었나요?
- 네. 아마도 그게 그 의사 선생님이 보건소로 오시고 난 다음이었을 거예요.
- 의사 선생님이요?
성준의 질문에 여 선생님은 고개를 끄떡였다.
- 아마 그럴 거예요.
성준은 의문스럽다는 표정으로 여 선생님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여 선생님은 차근차근 그 때의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 그 전까지 성표는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아주 우울한 학생이었죠. 그런데 그 의사 선생님이 오고 난 다음부터 성격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 성격이 바뀌었다구요?
성준의 질문에 여선생님은 고개를 크게 끄떡였다.
- 네. 모든 일을 도맡아서 할 정도로 아주 적극적으로 바뀌었죠. 반장은 아니었지만, 반장이 오히려 성표에게 의존할 정도였지요.
여선생님의 말에 성준은 다른 질문을 했다.
- 그렇게 소극적인 학생이 어떻게 그 의사 선생님과 친하게 되었죠?
성준의 질문에 여선생님은 합리적인 의심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떡였다.
- 그게... 사실 그 의사 선생님이 학교에 와서 아이들 신체검사를 한 날이었을 거예요. 그 의사 선생님이 유독 성표에게 잘 해 주셨고, 웬일인지 성표 역시 그 의사 선생님을 무척이나 따랐죠. 아마 그 이후에 얘기는 하지 않았어도 성표가 그 의사 선생님을 몇 번 찾아간 적도 있었던 것 같아요.
- 음... 그렇군요.
그런데 여선생님은 무언가 작심을 한 듯이 말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