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축계(逐界)-쫓겨난 이들의 세계-159화 (159/309)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Ep1 - 1. 일상의 파괴(4)

04. 과거를 이야기하다. (3)

그 날. 내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날이었어. 아니 지우려고 지우려고 노력해도 안 지워지더라구.. 사실 네가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어. 그 어색한 고양이 목소리. 넌 내 방에 먼저 갔겠지. 그리고 내가 보이지 않으니까 조심스럽게 거실로 나와서 날 불렀어. 난 그 소리가 네가 부르는 소리인 줄 알았지만 나갈 수 없었어. 그리고 제발 1층에서 찾다가 내가 없으면 가길 바랐어. 하지만 넌 끝내 2층으로 올라왔지. 나는 최대한 울지 않으려 했는데 내 입에서 흘러나온 흐느낌 때문에... 그렇지?

넌 그 소리 때문에 그리로 온 거잖아. 사실 난 너무 괴로웠어. 네가 올라온다는 걸 알았지만 그 괴로움 때문에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던 거야. 나는 최대한 입을 틀어 막았는데... 2층 아빠 방문이 열리는 걸 봤어. 손잡이가 열리고 네가 안을 쳐다봤을 때... 난 정말 미칠 것처럼 부끄러웠어. 벌거벗겨진 채 아빠가 내 몸을 더듬는 순간이. 그리고 그 더러운 손길이 내 몸을 이리저리 만질 때... 난 안타깝게 널 쳐다봤는데... 넌 멍하니 문틈으로 쳐다보기만 했어. 제발 가 달라고 내가 애원하는 눈빛을 보냈는데 넌 마치 아주 더러운 무언가를 보듯이 쳐다봤어. 물론 너 역시 당혹스럽고 역겨웠겠지만 난 그걸 네게 보이는 게 더 마음이 아팠어. 나는 속으로 빌었어.

'제발... 제발 아빠한테 들키지 않게 도망가게 해달라고...'

내 마음을 알았는지 넌 문을 닫고 조용히 나가더라고.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이 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 지옥 같은 곳에 나만 버려져 있다는 생각에 너무나 슬펐어. 아직도 그 때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

성표는 그 때 자신의 전화기가 울리는 걸 보았다. 배터리가 다 되어서 충전을 해 놓느라 구석에 놔뒀기에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핸드폰이 울리다가 바닥으로 떨어졌기에 성표는 핸드폰 앞으로 다가갔다. 미려였다. 성표는 받을까 말까 고민을 하다가 통화를 눌렀다. 미려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성표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성표는 그냥 전화를 끊고는 전원을 아예 꺼버렸다. 지금 자신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도 없었다. 이 소설 외에는.

05. 과거를 이야기하다. (4)

학교에서 널 만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많았어. 내 상황을 어떻게 얘기해야 하나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어. 이해해 주길 바라거나 동정해 주길 바라는 게 아니라 그냥... 그냥... 그런데 너는 내 앞에 나타나지도 않았어. 너한테 어떤 변명이라도 하고 싶어서 미술실 앞에서 기다렸는데... 넌 날 보자마자 그랬지.

- 꺼져라. 이 더러븐 새끼야.

네 말이 비수처럼 가슴에 꽂혔었어. 미안하기도 했고, 부끄럽기도 했고. 무엇보다 비참한 기분이었어. 내 얘기 좀 들어달라고 했을 때 네가 비웃으면서 그랬지?

- 지 애비랑 붙어먹는 새끼 말 따위 들을 시간 읎다. 꺼지라.

난 정말 너에게 말하고 싶었거든. 그래서 너한테 소리쳤잖아. 난.. 난 고아라고. 친엄마라도 있는 네가 부럽다고. 그런데 넌 여전히 매몰차게 난 밀어내버렸지. 눈물도 나오지 않았어. 아빠의 더러운 손길보다 너의 그 차가운 눈빛이 내겐 더 아팠으니까. 사실 그 날 난 더 이상 사는 게 의미 없다고 생각했어. 학교 옥상에 올라가서 뛰어내릴까도 생각했는데, 너에게 내 속마음이라도 얘기하고 싶어서 간신히 참았어. 그런데 그날 밤에 네가 우리 집에 찾아와줘서 난 뛰어내리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가 싶었어. 여전히 넌 퉁명스런 말투였지만, 아까와 같은 냉정함은 없었지.

- 난 고아야. 초등학교 때 현재 아빠가 입양을 했어. 그리고 내 원래 이름이 아니라 '김철민'이란 이름을 붙여줬어.

성표는 '김철민'이란 이름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의자를 뒤로 밀었다.

- 김철민... 이 새끼..

성표는 책상을 쾅 내려쳤다. 성표는 분노를 눌러 담은 채 다음 이야기를 읽기 시작했다.

그 때 네가 그랬지? 내 본명이 뭐냐고. 그런데 내 본명 따위가 무슨 소용 있겠어. 난 이미 김철민이었고 사람들도 김철민로 알고 있는데 말야. 그리고 내가 고아였다는 것도 사실 중요하지 않았어. 아빠는 어디에서나 날 친아들로 소개했고, 나 역시 그렇게 믿고 살았거든. 네가 본 건 아빠의 다른 모습이었어. 평소 아빠는 자상했고 부족한 것 없이 잘 해 주셨어. 그리고 내 몸을 만지고 내 몸을 쓰는 건 아빠만의 사랑이라고 생각했어. 물론 그 사랑의 방식이 더럽고 나한테 맞지 않더라도 그건 가족이 생기고, 편안하게 살기 위한 비용 같은 거라고 생각했어. 고아원에서 형들이 만지는 건 끔찍했는데 아빠는 그래도 달랐어. 하지만 네가 그걸 알게 된 다음에는 너무 부끄러웠어. 너한테만큼은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거든. 내 말을 들은 네가 그랬지?

- 아무튼 니 아부지는 개새끼만도 못한 놈이다.

그 때 네 말이 난 참 멋있었어. 개새끼만도 못한 놈. 맞아. 우리 아빠는 개새끼만도 못한 놈이었지. 그러면서 네가 놀랄 만한 제안을 했잖아.

- 느이 아부지가 꽁꽁 숨기는 방에 가믄 늬 아부지가 와 그라는지 알지 않을까?

나는 네 제안이 놀랍고도 무서웠어. 나도 정말 궁금하긴 했지만 거길 들어갈 생각 따윈 하지 않았거든. 하지만 네 말에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우린 몰래 들어가 보자고 했었지.

- 느이 아부지 같은 사람이 감추는 방이라몬 분명히 몬가가 있다.

나는 너랑 일을 꾸미는 게 좋았어. 더구나 평소에 나도 두려워했던 일 중 하나인 아빠의 비밀 방에 들어가는 거잖아. 무섭기는 했어도 너랑 같이 간다면 난 아무래도 좋았거든.

성표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이후의 일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성표는 다음 회를 눌렀다.

06. 과거를 이야기하다. (5)

아마 그 날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날이었을 거야. 그날 아빠는 급한 왕진이 있다면서 밖으로 나갔었지. 그리고 내 방에 몰래 숨어들어 있던 너랑 같이 2층으로 올라갔잖아. 네가 앞장서고 내가 뒤에 따라갔지. 아버지가 꽁꽁 숨긴 비밀의 방 앞에서 네가 장도리로 문을 부쉈잖아. 손잡이를 내려칠 때, 나도 모르게 깜짝 놀랐어. 물론 아빠가 오면 크게 혼나겠지만, 그 때는 전혀 무섭지 않았어. 너랑 같이 있었으니까.

네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을 때 나도 네 등 뒤에 붙어서 따라 들어갔어. 그런데 하필이면 그날 비가 많이 와서... 외부로 가는 다리가 유실(流失)되는 바람에 아빠만 돌아오지 않았어도....

안은 몹시 어두웠잖아. 불을 켜려고 벽 쪽에 붙어서 걷다가 네가 뭔가에 부딪혔지. 네가 조그맣게 소리치는 바람에 나도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었어. 나는 문 앞에서 너한테 말을 걸었는데, 넌 아무 말도 없었어. 그때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 그런데 밖에서 우르르 쾅쾅 소리가 들리면서 천둥 번개가 쳤잖아. 그 때 난 번개에 비친 네 모습을 봤어. 그런데 넌 넋이 나간 것처럼 내 쪽을 쳐다보았지.

- 왜... 왜 그래?

내가 물었을 때 넌 대답이 없었지. 다시 번개가 한 번 칠 때 너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든 걸 봤어. 그리고 뒤에서 들리는 소리 때문에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잖아.

- 내가 말했잖아. 여기 들어오지 말라고.

아빠의 목소리였어. 나도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는데, 또다시 번개가 쳤지. 그런데 아빠의 손에 번개에도 번쩍거릴 날카로운 메스가 들려있었잖아.

- 사랑하는 아들아. 난 너를 매우 사랑한단다. 하지만, 이건 아무래도 용서가 안 되는구나.

아빠가 네게 다가오면서 메스를 휘둘렀지. 그리고 그 메스에 팔을 베어서 따끔했지. 나는 나도 모르게 자리에 주저앉았을 때, 번개와 함께 쓰러지는 아빠의 모습을 봤어. 그리고 그 옆에 네가 서 있었지. 그런데 네 손에 들려있어야 할 장도리가 보이지 않았지. 그래서 아빠 쪽을 내려다보는데, 먼저 피, 내 발 아래로 흐르는 그 피가 보였어. 그리고 번개와 함께 아빠의 모습이 드러났잖아. 관자놀이에 박혀 있는 장도리를 봤어. 그리고 그 옆에 숨을 헐떡거리는 네가 보였어. 그 때 너무 무서웠지만, 네가 옆에 있어서 참을 수 있었지.

- 우리 자수할까?

그런데 넌 그 떨어지는 번개를 맞은 것처럼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그랬지.

- 웃기지마라. 그랬다간 니나 내나 인생 쫑이다. 알긋나?

- 그럼 어떡해?

그런데 그 때 네가 집안을 뒤졌잖아. 그리고는 창고에 있는 석유통을 꺼내서 집 안에 뿌리면서 그랬잖아.

- 이제 그런 더러븐 짓 안해도 된다. 글고 어차피 넌 고아 아니가? 원래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난 사실 그런 더러운 짓보다 혼자가 더 싫었어. 그래서 너한테 애원했잖아.

- 싫어 혼자.. 다시 혼자가 되긴 싫단 말야.

- 그름 어떡허라고?

나는 살면서 처음으로 용기를 내서 말했어.

- 우리 같이 도망가자. 같이 도망가서 살자.

너는 네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집에 불을 질렀잖아. 비가 억수로 내리는데도 기름을 부어서인지 집이 활활 타올랐지. 나는 네 팔을 잡으면서 말했잖아.

- 제발... 우리 같이 도망가자.

그 때 넌 나를 쳐다봤지. 그러다가 넌 내 손을 뿌리치며 말했지.

- 이거 놔라.

- 성표야! 제발...

그런데 네가 나한테 그랬지.

- 내가 같이 도망가자고? 와 내가 니랑 도망을 가는데?

- 우리... 우린 항상 같이 있었잖아. 서로에게 힘이 되고...

그 때 네가 나한테 소리쳤지. 쏟아지는 비를 맞으면서.

- 이 자슥, 와 지랄이고? 니랑 니 애비랑 같이 붙어 묵으믄서.. 내가 니 때문에 인생이 꼬였는데, 와 내가 니랑 가노? 이거 놔라. 더러븐 놈아.

그 불타고 있는 우리 집을 등지고 네가 얘기할 때 네 모습이 마치 악마 같았어. 내게 사형 선고를 내리는 악마.

- 니가 가족이 되어 준 댔잖아. 난 너만 믿고...

그런데 넌 뒤도 안 돌아보고 가버렸잖아. 난 그런 너를 보며 소리쳤지.

- 혼자는 싫어... 다시는. 혼자는... 죽어도!

그리고 난 불에 타고 있는 집 안으로 들어갔지. 넌 뒤에서 안 된다고 소리를 쳤지. 하지만 난 그럴 수 없었어. 혼자가 되는 건 죽는 것보다 싫었거든. 내가 들어가자 부엌에 연결해 놓은 LPG 가스통이 터졌지. 난 그 불길 안에서 밖에 서 있던 너를 보았어. 넌 내가 유일하게 사랑한 사람이었거든.

- 고마웠어...

성표는 그 날의 일을 떠올렸다. 철민의 눈빛. 애처롭고, 무언가 애원하는 듯한 그 표정. 성표는 자신도 그를 구하려고 불길 안으로 뛰어들려다가 불길이 더욱 세져서 그냥 도망쳤던 기억이 떠올랐다. 성표는 기억이 떠오르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이 일은 자신과 철민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철민은 그날 불 속으로 뛰어들어 죽지 않았던가?

성표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모텔 방을 서성거렸다. 성표는 침착하자고 스스로에게 다짐을 했다. 도대체 어떤 미친 인간이 이 이야기를 소설 란에 올리고 있는지 궁금했다. 철민은 아닐 것이다. 철민은 죽었으니까. 그렇다고 성표 역시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올릴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그 일을 지켜본 누군가가 올린 게 아닐까하고 생각을 했다.

- 누구지?

성표는 물어뜯던 손톱을 퉤하고 뱉었다. 손톱을 물어뜯는다고 무척이나 혼이 나서 지금은 고친 줄 알았는데, 자신도 모르게 손톱을 물어뜯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지만, 지금은 가슴이 떨려서 그런 것조차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 도대체 누가 이 일을...

성표는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화면에는 '07. 현재를 이야기하다. (1)'이 있었다. 성표는 도대체 누가 이런 장난질일까 싶어 다음 화를 클릭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나오는 내용을 보고는 경악에 빠졌다. 그리고 얼른 자신의 스마트폰을 켰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미려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미려는 몹시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 어디에요? 지금 난리 났어요.

- ... 혹시 광민 씨가 죽었나요?

성표의 말에 미려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 그것 때문에 다들 조사받고 난리 났어요. 성표 씨랑 저는...

그렇게 얘기하던 미려는 다시 목소리를 더 낮추며 말했다.

- 어디에요? 출근 안 하고 뭐해요?

성표는 조금은 냉정한 말투로 얘기를 했다.

- 잘 들어요. 지금은 자세히 얘기할 수 없으니까 이따 저녁 때 만날 수 있을까요?

성표의 말에 미려는 성표와 퇴근 후에 만나기로 했다. 성표는 자신이 있는 모텔에서 만나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성표는 미려와 전화를 끊고 손톱을 물어뜯었다.

- 이게 뭐야?

성표는 모니터 화면을 쳐다보았다. 화면에는 '07. 현재의 이야기하다. (1)'의 본문 내용이 떠 있었다. 이전까지는 마치 성표에게 얘기하듯이 전개되던 소설이 이 부분부터는 3인칭으로 전개되었다. 그리고 등장인물들은 각각 이니셜로 표기되었지만, 어젯밤의 상황을 아는 사람이라면 다 알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 소설의 내용은 바로 어제의 이야기였다. 그건 성표의 입장도 아닌, 누구의 입장에서 쓴 글이 아니었다. 마치 모든 것을 다 아는 이가 담담하게 얘기를 들려주는 것 같았다. 성표는 미려와 자신의 얘기가 나올 때는 얼굴이 붉어졌다가 '광민'의 죽음이 나올 때에는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미려에게 전화를 한 것이었다. 성표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을 감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까지 없었던 두려움이 온몸을 감쌌다. 성표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에 빠졌다. 성표는 자리에서 일어나 계속 서성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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