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축계(逐界)-쫓겨난 이들의 세계-158화 (158/309)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Ep1 - 1. 일상의 파괴(3)

경찰의 말에 미려는 고개를 끄떡였다. 휴게실 밖으로 나왔을 때, 모든 눈초리가 자신을 향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평소 자신에게 지극 정성을 쏟았던 광민이었고, 또 지난 밤 문재가 광민을 데리고 나갔을 때 성표와 자신 두 사람만 남았다는 걸 알았을 테고, 그나마 성표마저 출근하지 않은 상황에서 모든 관심이 자신에게 쏠린다는 걸 미려도 잘 알고 있었다. 더욱이 회사라는 공간에는 항상 호사가(好事家)들이 있기 마련이어서 이야기는 부풀려지고, 그 대상자는 난도질을 당할 것이 분명했다. 미려는 자신의 책상에 앉아서 고개를 저었다. 경찰들이 한바탕 회사를 휩쓸고 나가자 과장이 문재와 미려를 따로 불렀다. 휴게실에 앉은 두 사람을 보고 과장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 이게 무슨 일이래. 뭐 아는 것들 없어?

그 말에 문재가 고개를 저었다.

- 어제 광민 씨가 많이 취했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집에 데려다줬죠. 뭐 벌써 떡이 돼서 누가 오는지 가는지도 몰라서 제가 침대에 눕히고 저는 집으로 갔죠. 그게 전부에요.

문재의 말에 과장이 고개를 끄떡이다가 미려를 보며 물었다.

- 미스 최는 아는 게 없고?

미려는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지난밤에 성표와 같이 있었다는 걸 밝힐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과장은 탁자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 그나저나 이 친구는 왜 오늘 같은 날 무단결근이야. 5년 동안 한 번도 그런 일이 없다가... 아무튼 어제 회식하자고 할 때부터 기분이 이상했어. 그동안 그런 적이 없던 사람이 말야.

과장은 쓰게 입맛을 다시고는 말했다.

- 입조심들 해. 다른 부서에서 이 일로 입방아를 찧겠지만, 우리 부서에서만큼은 그런 일 없도록 말야.

과장이 일어나려고 하자 문재가 과장에게 물었다.

- 그런데... 죽었다는 말만 들었는데, 광민 씨는 어떻게...

문재의 말에 과장은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이 말했다.

- 칼에 찔렸대. 그것도 수십 번이나..

과장의 말에 미려는 다리에 힘이 풀려 의자에 주저앉았다. 과장이 휴게실 바깥으로 나가자 문재가 혼잣말하듯이 얘기했다.

- 홍성표... 그 새끼 아냐? 출근 안 하는 것도 그렇고... 하긴 평소에 하는 짓이 좀 소시오패스(sociopath) 같았잖아.

미려는 문재의 말에 무어라고 반박을 하려다가 입을 닫았다. 지금 상황에서 자신이 입을 여는 게 더 일을 크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문재와 미려가 밖으로 나오자 문재 옆으로 직원들이 하나 둘씩 모였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직원까지 문재와 우르르 몰려 옥상으로 올라갔고, 과장은 못마땅한 듯이 쳐다보다가 같이 담배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사무실에 뻘쭘하게 혼자 앉은 미려는 성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미건조한 핸드폰 연결 소리가 들리다가 누군가가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그러나 상대는 아무 말이 없었고, 금방 전화를 끊었다. 미려는 뭔가 싶어서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한참을 있어도 전화를 받지 않았고, 안내 멘트가 나왔다. 미려는 전화를 끊고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만약 자신이 성표와 하룻밤을 같이 보낸 것이 회사에 알려진다면 평소 회사에서 쌓아온 이미지가 깨지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성표에게 관심이 있던 여사원들에게도 지탄을 받을 것이었다. 미려는 성표에게 관심이 있다는 여사원들에게 항상 도도하게 그런 사람은 관심 밖이라고 했고, 유독 적극적으로 성표에게 관심을 보인 옆 부서 여사원에게는 자기가 나서서 소개를 해 준다고까지 했기 때문이다.

- 술이 웬수지..

미려는 술의 탓을 했지만, 사실 미려 역시 매사에 완벽한 성표에게 마음이 있었고, 어제는 분위기가 그렇게 흘러갔기에 자신도 본능에 따른 것이었다. 술 때문에 조금은 기분이 들떴었지만, 그렇다고 이성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 그런데 이 사람은 왜 안 오는 거야?

미려는 자신도 모르게 투덜거리며 말을 했다. 남자 직원들이 담배를 피우고 왔는지 우르르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고, 미려는 또다시 고개를 돌린 채 정면만을 응시했다. 뒤에서 들리는 수군거리는 소리가 마치 자신과 성표에 대한 얘기 같아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이 고개를 들었다.

'나보다 먼저 일어나 있었잖아. 내가 먼저 잠들었고... 혹시...'

미려는 그런 생각이 들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아닐 거야... CCTV에 다 찍혀 있을 테니까....'

미려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휴대전화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성표는 지난 밤 잠을 자지 않았지만, 그다지 피곤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마신 술도 평소 그에게는 별로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지난밤 일어난 일을 혼자 음미하면서 빙긋이 웃었다. 그러나 그런 기분도 도착한 집 앞에서 산산이 깨져버렸다. 오늘 일정을 보기 위해 켠 스마트폰 때문이었다. 성표는 자신도 모르게 웹소설에 접속을 해서 어제 읽은 소설을 이어서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02. 과거를 이야기하다. (1)

어쩌면 그 때가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는지도 몰라. 네가 나에게 말을 걸어준 날.

너도 알고 있지? 우리 집 소문 말야. 애들 사이에서 귀신 나오는 집이라고 했던. 물론 난 그 집이 좋았어. 아버지와 나 단둘이 살기에는 턱없이 큰 집이었지만, 그래도 동네 유일한 의사였던 아버지가 선택한 집이었잖아. 물론 아버지가 왔을 때, 마을 사람들이 좋아하던 것도 좋았어. 보건소도 문을 닫았고, 동네에서 유일하게 환자를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빠인 것도 좋았어. 그런데 그런 좋은 거랑 달리 동네는 무서웠어. 애들도 무서웠고. 서울에서 온 계집애 같이 생긴 애라고 놀리는 것도 그랬고, 우리 집에 귀신이 나온다고 하는 것도 그랬고. 그런데 그 때 네가 와서 나한테 말을 걸어줬잖아.

- 너그 집에 참말로 귀신 나오나?

나는 나한테 대놓고 그렇게 묻는 네가 웃겼어. 그런데 네가 그때 또 그랬잖아.

- 귀신이 니한테 붙었나 보네. 사내 자슥이 왜 그렇게 웃노?

어쩌면 그 때 나는 알고 있었던 것 같아. 이 애라면 내 얘길 들어줄 수 있을 거라고.

- 은제 한 번 느그집에 가보자. 아들이 느그집에 귀신 나온다케싸서 내가 귀신은 읎다고 그랬는데.

난 네가 그렇게 말해 줘서 참 고마웠어. 사실 우리 집에 귀신같은 게 나오진 않았어. 물론 귀신이 나올 것처럼 을씨년스럽긴 했지만.

- 나.. 나중에. 아빠 없을 때 부를게. 아빠가... 집에 누가 오는 걸 별로 안 좋아해.

물론 집에 혼자 있는 게 나도 무서웠어. 귀신이 나오진 않았지만, 아빠가 밤에 왕진(往診)이라도 가시면 텅 빈 집에서 혼자 있는 게 무서웠거든. 어쩌면 다른 것보다 그게 제일 무서웠던 것 같아.

그런데 너도 기억 나? 내가 너한테 전에 했던 말.

사실 아빠가 집에 없던 날도 무서웠지만, 아빠가 집에만 있는 날도 무서웠거든. 이곳으로 이사 온 다음부터 아빠가 조금 이상해지긴 했어. 이곳으로 이사를 온 건 엄마 때문이거든. 엄마가 갑자기 죽어서 아빠는 서울 집에 살면 자꾸 엄마 생각이 난다면서 이리로 온 거라고 그랬어. 물론 아니란 걸 알고 있었지만 아빠 말이니까 그냥 그러려니 하고 믿었어.

그런데 여기 와서 아빠가 2층 방, 그 있잖아. 비밀의 방 있잖아. 아빠는 술에 취하면 그 방에 들어가서 한참을 보내곤 했어. 아버지가 그 방에 들어가는 날이면 방에서 이상한 울음소리도, 웃음소리도, 누구와 대화하는 듯한 중얼거림도 들리곤 했어. 나도 그 방에 들어가 보고 싶었는데, 아빠는 항상 그 방문을 잠가뒀지. 그리고 나한테 항상 윽박지르듯이 말씀하셨어.

- 이 방에 들어가면 죽여 버릴 거야.

뭐 죽는 것도 무섭지만, 사실 그 방에 대한 건 호기심일 뿐이거든. 그 안에서 더 무서운 걸 발견하면 어쩌면 이 집에서 도망칠 것 같았거든. 이미 충분히 무서웠으니까. 그리고 아빠 말을 거스를 자신도 없었어. 아빠는 언제나 좋은 사람이었지만, 말을 듣지 않으면 언제나 불호령이 떨어졌으니까.

- 이... 이 새끼 뭐야?

성표는 차를 몰아 교외로 달렸다. 왠지 그곳에 있으면 누군가가 자신을 알아볼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교외에서 성표는 모텔을 하나 잡았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 도대체 어떻게...

성표는 모텔 방 안에 있는 컴퓨터를 켜고 다시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마우스 스크롤을 내려가면서 눈으로는 그 내용을 다시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성표는 손이 덜덜 떨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성표는 떨리는 마음으로 다음 회를 클릭했다.

03. 과거를 이야기하다. (2)

그 날 기억 나? 한밤중에 네가 찾아왔던 날. 그날 아빠는 꽤 멀리 있는 산속 마을로 왕진을 갔잖아. 내가 학교에서 너한테 오늘 우리 아빠 못 들어 오실지도 모른다고 했더니 네가 밤에 우리 집에 왔었잖아. 그 때 사실 난 무서워서 잠도 오지 않았었거든. 그런데 네가 우리 집 창문을 두드렸잖아.

- 아버지 계시냐?

그 때 네 말이 난 하늘에서 들리는 천사의 목소린 줄 알았어. 이 무서움을 날려 줄. 물론 집에 친구가 왔다는 걸 아버지가 아시면 혼나겠지만 너를 보니까 오히려 그런 건 아무렇지도 않았어. 네가 집에 들어오자마자 제일 먼저 했던 말 기억 나? 난 아직도 가끔 그 생각을 하면 웃겨.

- 귀신은 믄노매 귀신. 우리 집보다 훨씬 좋구마.

그리고 내 방에서 너랑 한참 얘기했잖아. 그 때 넌 내 책상에 앉아서 무척 부러워했었지.

- 나는 아빠 얼굴도 모른다. 울 어매랑 둘이 사니까. 뭐 우리 엄매도 맨날 밖으로만 싸돌아 다녀싸서 집에 거의 혼자 있지.

그러면서 내 책상 앞에 있는 아빠와 내가 찍은 사진을 보면서 그랬잖아.

- 내도 느그 아빠 같은 아빠가 있었으면 좋겠다.

난 그날부터 너를 좋아하기로 했어. 정말 내 맘을 잘 알아주는 좋은 친구라고 믿었어.  그 집으로 이사 오고 처음으로 아무 무서움 없이 잠들 수 있었어. 동트기 전에 네가 나가면서 그랬잖아.

- 울 엄매는 내가 집에 있는지 읎는지 알지도 몬한다. 그러니까 자주 놀러 오께.

난 네가 한 그 말이 살면서 가장 든든한 말이었어. 아무도 모르는 외딴 시골에서 엄한 아빠랑 같이 사는 소심한 아이에게 그 말보다 더 위로가 되는 말은 없었으니까. 그리고 너 덕분에 학교에서도 난 잘 지낼 수 있었잖아. 애들하고도 탈없이 지냈고, 서울내기라고 놀리던 애들도 친해졌고. 너 때문에라도 애들이 시비도 안 걸고. 그런데 그거 기억 나? 난 아직도 그 날만 생각하면 슬퍼.

성표는 그 부분을 읽지 않아도 머릿속에 저절로 영상이 떠올랐다. 고개를 크게 저으며 소리쳤다.

- 아냐... 이건... 그럴 리가 없어... 도대체 누가...

성표는 몸이 떨렸다. 지금쯤 자신이 출근하지 않는 걸 직원들이 다 알 것이다. 왜 자신이 이런 음습한 골방에 틀어박혀 이 따위 글에 벌벌 떨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이 따위 글은 결국 사람들이 읽지도 않는 웹소설이 아닌가 말이다. 무시하면 될 일이다. 아니 무시하고 뭐고도 없는 일이다. 거기엔 어디에도 자신과 관련된 것이 언급되지 않지 않은가? 더욱이 사투리...

- 나랑 관련 없는 얘기야....

그러면서도 성표는 다시 화면으로 고개를 돌려 4회를 클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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