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축계(逐界)-쫓겨난 이들의 세계-154화 (154/309)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3장 - 10. 어둠 속으로(2)

- 사실 소라 양의 아버지는 고위 공무원이었어요. 그런데 소라 양 어머니인 지수 씨와 소라 양의 병세를 알고 위험한 쪽에 협력을 했어요. 그들은 두 사람을 고쳐준다는 걸 미끼로 소라 양의 아버지를 이용했죠. 하지만 소라 양의 아버지가 두 사람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을 대상으로 실험을 한다는 걸 알고 분노해서 그들에 대해 세상에 알리려고 했죠.

소라는 그 말에 눈이 커졌다. 하지만 석호는 고개를 한 번 끄떡이고 얘기를 이었다.

- 그들은 소라 양의 아버지가 그러한 짓을 하지 못하게 나쁜 짓을 했습니다.

- 아... 아빠도 죽은 건가요?

석호는 그 말에 고개를 끄떡였다. 소라는 가슴 한 켠이 텅 비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세상에 혼자 남았다는 기분이 이런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살가운 혈육의 정은 없었지만, 그래도 아빠만큼은 언제나 조금은 냉정하게 살면서 자신을 지켜볼 줄 알았다. 하지만 아빠 역시 자신과 엄마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다가 그렇게 비명(非命)에 갈 줄은 몰랐다.

- 그런데...

석호의 다음 말이 소라를 더욱 놀라게 만들었다.

- 지수 씨는 그들에 의해 선택된 실험 대상이었습니다.

석호의 말에 소라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그럼 엄마는 그냥 무병이 아니란 말인가요?

소라의 말에 석호는 무겁게 고개를 끄떡였다.

- 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소라의 더듬거리는 말에 석호는 차분하게 얘기를 했다.

- 조금 어려운 얘기일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잘 들어요.

석호의 비장한 표정에 소라는 자신도 모르게 손끝이 떨렸다.

- 제가 인터넷에서 찾은 자료에는 무병은 신이 안으로 들어와서 그 신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픈 병이라고 알고 있는데요.

석호는 떨리는 소라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 대개 무병의 원인은 그렇지요. 하지만 그놈들은...

소라는 그놈들이라는 말에 몸을 떨었다.

- 혹시 아버지를 죽인?

석호는 고개를 끄떡였다. 소라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엄마의 병과 아빠의 죽음이 모두 그들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 하지만 무병은..

석호는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 그들은 1940년대부터 한국에서 무병을 연구했어요. 그들이 왜 아픈가, 그것에 대한 해결책이 무엇인가를 연구하려는 게 아니라 무병을 앓는 이가 낳았을 때 갖게 되는 신비한 능력만이 그들의 관심사였어요. 그러니까 그들은 그 능력을 어떻게 갖게 되는지 알고 싶었던 거지요.

석호의 말에 소라는 고개를 저었다.

- 그.. 그런데 왜 하필 우리 엄마죠? 엄마는 그런 능력이 없고, 또 평범한 가정주부잖아요.

소라의 말에 석호가 말을 해야 하나 싶었다. 엄마가 갖고 있는 엄청난 비밀을 딸이 알게 되었을 때 얼마나 충격을 받을까 걱정스러웠다.

- 소라 양. 사실 지금부터가 소라 양이 감내해야 할 일이에요.

소라는 아빠, 엄마의 죽음으로 인해 심신이 이미 많이 지쳐있는 상태였다. 그런 어린 소녀에게 어쩌면 부모의 죽음보다 더 감당하기 힘든 이야기를 해야 하는 석호는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소라는 석호의 두 눈을 쳐다보았다. 석호는 빨갛게 충혈 되어 있는 소라의 눈을 보자 더욱 마음이 아팠다.

- 소라 양의 엄마는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단순히 선택된 게 아니라 이미 선택되어서 밖으로 나온 거지요.

석호의 말에 소라는 고개를 저었다.

- 이미 선택되어 나온 거라뇨? 그게 무슨 말이에요?

석호는 주저했지만 소라도 알아야 할 일이었기에 입을 열었다.

- 소라 양의 엄마는 복제품입니다. 인공으로 배양된 사람이라는 거죠.

소라는 석호의 말이 믿기지 않는 듯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 거.. 거짓말.

석호는 그런 소라가 안쓰러웠지만 하던 얘기를 계속했다.

- 거짓말이 아닙니다. 소라 양의 어머니, 최지수 씨는 영국의 에드워드 박사와 슈뢰딩거 박사가 주도한 인간 복제 샘플이었습니다. 무병이 있는 한국으로 파견될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소라는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넋이 나가는 것 같았다.

- 그.. 그럼 할아버지, 할머니도..

석호는 당혹스러운 듯이 입을 다물었다.

- 모두 그들의 수하였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감시자들이었죠.

소라는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자신이 믿고 따랐던 사람들은 엄마의 감시자들이었고, 엄마는 무병을 발전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 아니에요. 아니라고 해 줘요. 신부님이 거짓말 하는 거라고..

소라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석호는 그런 소라를 측은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제가 지켜줄 테니까.

석호의 말에 소라는 석호에게 안겼다. 석호는 그런 소라를 안아주며 생각했다. 하루아침에 부모를 잃은 아이의 심정을 헤아려보니 석호는 저절로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분노가 더욱 커졌다.

- 죽여 버릴 거야.

소라의 입에서 터져 나온 말은 그녀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섬뜩한 말이었다. 아빠를 이용하고, 엄마를 운명에 순응하지 못하게 만들고, 자신조차 실험의 대상으로 삼은 그들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아니 용서라는 말조차 떠올릴 수 없었다. 자신을 파멸로 몰고 온 그들을 부숴버리고, 모든 것을 없애버리고 싶었다. 펜타곤을 해킹해서 핵폭탄을 쏟아 붓고 싶은 심정이었다. 모두가 죽으라고. 하지만 소라는 그러지 못했다. 불쌍하게나마 살아남은 엄마와 석호의 간절한 부탁 때문이었다. 물론 현실적으로도 핵폭탄을 쏟아 붓는 게 불가능한 일이었겠지만 미라는 어떤 방법으로든 모두에게 복수를 하고 싶었다.

- 제가 이렇게 살아서 뭐하죠?

소라의 말에 석호는 소라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했다.

- 살아서 뭐하는 게 아니라 살아야 하기 때문에 사는 겁니다.

석호의 말에 소라는 어둠 속에서 크게 고개를 저었다.

- 제가 죽으면 그들에게도 큰 피해가 될 거 아니에요.

소라의 말에 석호가 버럭 소리를 쳤다.

- 죽는다는 말을 쉽게 하지 마세요!

석호의 호통에 소라는 움찔했지만 자신의 말을 물리지는 않았다.

- 그들의 샘플로만 살던 제가 이제 와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요. 아니 하고 싶어도... 지.. 지금은..

소라는 왈칵 눈물을 쏟았다. 석호는 그런 소라를 보며 말했다.

- 세상에 쓰임새가 없는 물건은 하느님께서 만드시지 않으셨어요.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 제 쓰임새는 그들의 실험용 쥐였나 봐요.

소라의 시니컬한 말에 석호는 고개를 저었다.

- 그건 그릇된 인간들의 잘못이에요. 하느님의 안배가 아닙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만약 그런 의도를 조금이라도 갖고 계신다면 제가 사제복을 벗어버리지요.

석호의 말에 소라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 저.. 저는 어떻게 해야 하죠?

석호는 소라의 말에 소라의 손을 잡았다. 붕대를 감은 아래 거친 손이 느껴졌다. 소라는 얼른 손을 빼려고 했지만 석호가 힘을 주어 손을 잡았다.

- 그건 걱정 마세요. 세현 씨가 잘 보살펴 주실 거예요.

- 저는 항상 도움만 받네요.

석호는 소라의 눈을 보며 말했다.

- 도움을 받을 때도 있고, 도움을 줄 수 있을 때도 있는 거예요. 저 역시 여러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으며 살고 있어요.

소라는 석호를 쳐다보았다. 석호는 소라의 옆에서 한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다. 소라 역시 멍한 표정으로 석호를 쳐다보기만 했다. 한동안 멍하니 있다가 소라는 침대에 누웠다.

- 혼자 있고 싶어요.

석호가 밖으로 나가자 소라는 밤새 이런저런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침에 석호가 찾아왔지만, 소라는 여전히 석호를 외면한 채 누워만 있었다. 세현이 찾아와 상처를 치료할 때는 마지못해 일어나 앉아 있었다. 음식도 거부했고, 모든 걸 거부했다. 세현은 소라 옆에 앉아서 이런 저런 얘기를 했지만, 소라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석호와 세현이 번갈아 가며 소라와 얘기를 하고자 했지만, 소라는 멍하니 앉아만 있거나 그냥 침대에 누워 힘없이 흐느끼기만 했다. 문 밖에서 어둠 속에 있는 소라를 응시하던 세현은 낮게 한숨을 쉬며 돌아섰다.

- 어린 나이에 충격이 클 거예요.

석호가 바티칸으로 떠나는 날 세현에게 당부를 하며 한 말이었다. 세현은 계단을 오르며 평생 떠올려보지 않았던 단어를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았다.

'운명...'

예전이라면 비웃으며 넘길 단어였지만, 지금의 세현은 그 단어가 소름끼치도록 가슴에 와 닿았다. 철구와 석호, 그리고 소라. 어쩌면 자신이 그동안 인간답지 않았기에 그러한 단어를 애써 외면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이렇게 모인 건 어쩌면 운명일지도...

앞으로의 일이 막막했지만 세현은 고개를 저었다. 모든 것이 순리대로 풀린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하루아침에 자취를 감춘 그들이 어느 순간 또 나타날 것이다. 그건 그들의 운명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그들을 뒤쫓을 수밖에 없는 운명일 테고. 다음날 세현은 노트북 하나를 들고 소라의 방 안으로 들어왔다. 노트북을 소라 앞에 놓으며 세현은 혼잣말 하듯이 얘기를 했다.

- 나나, 장 신부님이나 철구 씨 모두 그 놈들이 죽일 만큼 미워요.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그들과 싸우고 있어요. 만약 소라 양도 그들과 싸우고 싶다면 소라 양의 방식대로 싸워봐요. 소라 양은 컴퓨터를 잘 한다고 들었는데, 인터넷에서 그들에 대한 정보를 알아보는 것도 싸우는 방법이 될 수 있겠죠.

세현의 말에도 소라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세현은 노트북을 펼쳐 놓으며 말했다.

- 빛이 최대한 흡수되는 보안경을 설치한 노트북이에요. 아마 지금 상태라면 이 노트북을 사용하는데 큰 무리는 없을 거예요.

세현이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소라는 세현이 나가고 한참 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쩌면 세현의 말이 맞는 것처럼 느껴졌다. 소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노트북을 켰다. 그리고 자신의 내부 서버에 접속을 해 보았다. 아직까지 연결이 되어 있었다. 소라는 자신에게 필요한 파일들을 복사하고는 나머지를 모두 지웠다. 그러다가 문득 파일 하나가 보였다.

'Quiea-Diary.cqr'

자신이 만든 비밀 일기장이었다. 소라는 암호 알고리즘을 풀어 문서를 열었다. 그러자 마지막으로 쓴 일기 파일이 보였다.

9/13

하루하루 살아진다는 건 서글픈 일이다. 그저 시간을 축 내고, 의미 없는 날짜의 배열 안에서 흘러가는 것뿐이다. 그 끝이 무엇이든 나는 살아지는 삶이 아닌 살아가는 삶을 살고 싶을 뿐이다. 결국은 다 같은 죽음을 향해 달리는 길이라지만 살아가는 의지가 없다면 결국 살아지는 죽음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슬퍼할 시간보다 슬퍼하지 않을 수 있는 시간을 살고 싶다.

그래. 나는 살고 싶은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