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3장 - 10. 어둠 속으로(1)
10. 어둠 속으로
병원에서 깨어난 석호는 몹시 아늑한 느낌을 받았다. 무언가가 자신을 감싸는 느낌. 어린 시절 어머니의 품에 안긴 것 같은, 그리고 최베드로 신부가 자신을 안아주는 듯한 아련함이 석호를 감쌌다. 석호는 눈을 뜨고 사방을 돌아보았다. 낯선 병실 풍경이 보였다. 석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세현이 석호를 보며 말했다.
- 괜찮으세요?
석호는 세현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 몸은 괜찮은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네요.
석호의 말에 세현이 석호의 옆에 서서 얘기를 했다.
- 소라 양의 말을 빌자면 아주 놀라운 일이 있었다고 하더라구요.
세현은 석호에게 소라에게 들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 소라 양의 병세도 상당히 호전되어 있더라구요. 그런 식으로 외부로 노출되었다면 이미 수포가 터지고 살이 어느 정도 상했을 텐데 오히려 각질조차 조금은 무른 상태더라구요. 마치 전신을 소독한 것처럼.
세현의 말에 석호가 고개를 저었다.
-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요. 차에서 USB... 아!
석호는 그러더니 세현을 보며 말했다.
- 혹시 제 옷에서 USB 메모리 못 보셨어요?
세현은 석호가 누워 있는 서랍을 열며 말했다.
- 소지품은 여기에 다 넣어 두었어요.
세현이 소지품을 뒤지다가 USB 메모리를 꺼내 주었다.
- 이거 말씀하시는 건가요?
세현의 말에 철구가 고개를 끄떡였다.
- 노트북 좀 쓸 수 있을까요?
석호의 말에 세현이 밖으로 나가 노트북을 들고 들어왔다. 석호는 노트북을 켜고 USB 메모리를 끼웠다. 그러자 그 안에는 여러 개의 문서 파일과 사진 파일, 그리고 동영상 파일이 있었다. 석호는 먼저 문서 파일을 열어보았다. 거기에는 지수에 대한 실험 보고서들이 일자별로 나열되어 있었다.
- 끔찍한 짓을 했군요.
석호가 얘기를 하자 같이 화면을 보고 있던 세현은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었다.
- 그... 그럴 사람이 아닌데...
석호는 그 화면을 끄고 다른 문서를 열었다. 거기에는 지수와 관련된 다양한 정보들이 들어 있었고, 그 안에서 놀랍게도 지수의 과거와 톰슨 병원에 대한 정보가 나와 있었다. 한 줄 한 줄 읽어갈수록 석호는 분노로 얼굴이 붉어졌다. 급기야 지수의 남편과 관련된 부분을 읽을 때에는 자신도 모르게 욕설이 터져 나왔다.
- 죽일 놈들...
세현 역시 그 끔찍한 기록들 앞에서 몸서리가 쳐졌다. 석호는 사진들과 동영상을 열어서 보았고, 마지막 문서를 읽을 때에는 이미 시간이 꽤 흘러 있었다. 석호는 노트북을 접으며 세현에게 말했다.
- 이놈들의 끝이 어딘지 모르겠군요.
석호의 말에 세현 역시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다가 문득 철구가 떠올라 석호에게 얘기를 했다.
- 일단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하고 좀 쉬세요. 철구 씨도 어제 총상(銃傷)을 입고 여기 입원해 있거든요.
석호는 뜻밖의 소식에 고개를 돌려 세현을 쳐다보았다. 석호는 링거를 이동대에 옮기며 말했다.
- 저는 괜찮습니다. 같이 철구 씨한테 가 보죠.
석호의 말에 세현은 철구가 누워있는 병실로 갔다. 철구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석호와 세현은 철구의 옆으로 다가갔다.
- 이번 일로 모두 상처를 받았군요.
석호의 말에 세현이 고개를 끄떡였다.
- 외상(外傷)은 치료하면 되는데... 문제는 소라 양이에요. 아니 그리고...
세현은 석호를 돌아보았다. 석호는 세현이 무엇 때문에 뒷말을 주저하는지 알고 있었다.
- 저는 문제가 될 게 없죠. 피가 무당의 피가 섞여 있을 뿐이지, 저는 하느님의 아들입니다.
석호는 특유의 매력적인 미소로 세현을 쳐다보았다. 세현은 그런 석호를 보며 마찬가지로 미소를 지었다.
- 어쩌면 그 폭발 상황에서 살아난 건 아직 하느님께서 제가 할 일이 남았기 때문에 구해 주신 건 아닐까 해요.
세현은 그 말에 고개를 끄떡였다. 아니 그것이 하느님의 권능(權能)이 아니라 무당의 신기(神奇)라 할지라도 석호는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은 사람임은 분명했다. 그리고 그것이 그에게 어떤 운명으로 작용을 할지 아무 것도 알 수 없어도 석호는 분명 아주 훌륭한 신부였고, 앞으로 위대한 신부가 되는 데에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 제가 소라 양에게 얘기를 하죠.
석호의 말에 세현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 지금은 감금 상태에서 풀려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 거예요. 좀 더 있다가 얘기하시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세현의 말에 석호는 고개를 저었다.
- 어차피 소라 양이 감내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더 미룬다고 해서 그 충격이 덜 하진 않을 겁니다. 저 역시 저희 어머니가 궁금해서 이리저리 조사를 했었죠. 그리고 그 때 알았어요. 날 살리기 위해 본인의 목숨을 버릴 정도로, 그리고 정신을 놓을 정도로 나를 사랑하셨구나 하구요. 소라 양도 그녀의 어머니가 소라 양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안다면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세현은 석호의 말에 고개를 끄떡였다. 석호는 무거운 걸음을 옮겨 소라가 있는 지하 병실 쪽으로 갔다. 소라의 병실은 불투명 유리로 되어있었다. 햇빛이 들어갈 수 없게 밖은 불투명하고 안에서는 밖을 볼 수 있는 유리 구조였다. 석호가 병실 안으로 들어가자 희미하긴 하지만 은은한 불빛이 보였다. 석호는 그 불빛을 보며 고개를 끄떡였다. 빛이 아래로 내려오진 못하게 하면서도 방 안은 그나마 조금 보일 수 있도록 빛을 천장 쪽으로 쏘고, 살짝만 반사되게 만든 구조였다. 석호가 소라의 침대 옆에 앉자 소라는 붕대를 감고 있는 모습을 보이기 싫었는지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썼다.
- 괜찮아요?
석호의 말에 소라는 이불 속에서 고개를 끄떡였다. 석호는 그런 소라를 보며 말했다.
- 계속 등 돌리고 얘기할 거예요?
석호의 말에 소라는 가만히 있었다. 석호는 농담하듯 얘기를 했다.
- 어두운 지하실에서 제가 옷 갈아입힌 거 알죠? 난 소라 양에 대해 다 아는데?
석호의 말에 소라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 신부님이 뭐 그렇게 저질이에요?
석호는 그 말에 어깨를 으쓱하고 말했다.
- 저질이 아니라 그렇다는 건데요.
석호의 말에 소라는 입을 다물고 석호를 노려보았다. 붉게 충혈된 눈이 몹시 안쓰러워보였다. 그러나 이내 소라가 석호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 나... 난 신부님이 죽는 줄 알았어요.
석호는 그런 소라를 안아주며 말했다.
- 난 초능력이 있어서 그런 걸로 죽지 않아요.
석호의 말에 소라는 눈물을 그치며 말했다.
- 피.. 그런 게 어디 있어요?
- 여기 있죠. 저같이 훌륭한 신부는 그런 능력쯤은 하나씩 갖고 있어요.
석호의 말에 소라가 웃으며 말했다.
- 신부님이 거짓말도 잘 하시네.
석호는 그런 소라를 조금은 측은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 치료는 잘 받고 있어요? 세현 씨 말로는 많이 호전되었다고 하던데.
석호의 말에 소라는 고개를 끄떡였다.
- 전에는 항상 몸이 따끔거리고 아팠는데, 그날 이후로 따끔거리는 게 없어졌어요. 한결 살 만해요. 지금이라면 언제든지 엄마를 만나러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소라의 입에서 '엄마'라는 말이 나오자 석호는 저절로 가슴 한 편이 무거워졌다. 석호는 표정을 풀며 말했다.
- 그런가요? 그런데...
석호의 뒷말을 듣지도 않은 채 소라는 조금은 들뜬 어투로 말했다.
- 엄마 만나면 나도 많이 나아졌으니까 엄마도 힘을 내라고...
소라는 말을 하다가 중간에 어깨를 들썩거렸다. 얼굴에 감은 붕대 위로 피고름이 섞인 눈물이 흘렀다. 석호는 그런 소라를 보며 자신도 모르게 눈이 붉어졌다.
- 어... 엄마가 좋아하겠죠?
석호는 그런 소라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 좋아하실 겁니다. 반드시.
석호의 눈에서도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 엄마... 엄마는... 좋아하실 거예요.
소라는 그 자리에 엎드려 울었다. 이미 원호에게 엄마의 죽음에 대해 들은 소라였기에 석호의 입에서 나오기 전에 알고 있었지만, 왠지 석호에게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리고 싶었기에 혼자서 들뜬 것처럼 얘기를 했던 것이다. 석호는 엎드려 우는 소라의 등에 손을 올리고 조그맣게 기도를 올렸다.
- 우리에게 이길 수 있는 시련만 주시옵고, 우리로 하여금 그 시련을 이길 수 있는 용기를 주시옵소서. 간절히... 이렇게 간절히...
석호 역시 기도의 마지막을 맺지 못한 채 눈물을 흘렸다. 소라는 한참동안 울고 난 후 고개를 들어 석호를 보았다.
- 제가 너무 어린애 같죠?
소라의 말에 석호는 고개를 저었다.
- 저는 어머니의 죽음을 알고 며칠 밤을 울었어요.
그러면서 석호는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어머니가 무당이었고, 자신에게 그 운명을 이어주지 않기 위해 성당 앞에 가져다 버린 얘기며, 결국은 정신을 놓고 미쳐서 자살을 하게 된 사연까지 이야기를 해주었다. 석호는 자신의 얘기가 끝나자 소라를 보며 말했다.
- 소라 양과 저는 공통점이 참 많아요.
소라는 석호의 말에 고개를 끄떡였다.
- 네..
석호는 그런 소라를 보며 손에 힘을 주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 어쩌면 지금부터 하는 얘기가 믿어지진 않을 거예요. 하지만 소라 양도 알아야 하기 때문에 얘기를 해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석호의 말에 소라는 고개를 끄떡였다.
- 네.. 알겠어요.
석호는 그런 소라를 보며 말했다.
-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해요.
석호는 소라의 얼굴을 안쓰럽게 쳐다보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