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축계(逐界)-쫓겨난 이들의 세계-152화 (152/309)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3장 - 9. 흔적(4)

- 정리는 다 된 건가?

어둠 속의 기계음이 말을 하자 늙은 남자가 어색하게 대답을 했다.

- 대강은 그렇습니다만... 저는 아직 의도를 모르겠습니다.

늙은 남자의 대답에 기계음은 대답을 했다.

- 음.. 그건 어려운 해답이 아닐 텐데 그렇게 묻는 걸 보니 숨겨진 의도가 무엇인가를 묻는 건가?

기계음의 대답에 늙은 남자는 고개를 끄떡였다.

- 그 녀석들은 남겨둘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 말은 마치 다른 의도가 없다면 귀찮은 세력을 없애는 게 옳은데 굳이 왜 남겨 둬서 골치를 썩이느냐는 말 같았다.

- 하하하. 우습군. 내가 재미나 아니면 그냥 인간적인 면 때문에 남겨둔다고 생각하나? 그렇다면 더 재미있는 일을 꾸미면 되지.

기계음의 대답에 여전히 늙은 남자는 이해가 가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기계음은 그런 것과 관계없다는 듯이 혼자 말을 이었다.

- 모든 일이 순리대로 되어간다면 얼마나 재미가 없겠어. 잘 알고 있지 않나, 슈뢰딩거.

슈뢰딩거는 그 말이 몹시 못마땅한 듯이 조금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 신중에 신중을 기해도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게 장난처럼...

그러자 기계음이 말을 끊으며 말했다.

- 장난이라고? 자네가 착각하고 있는 게 있는 것 같군. 장난을 친다면 내가 굳이 모두를 그대로 둘 필요도 없지. 내 멋대로 하면 되니까 말이야. 자네도 내가 장난을 치지 않아 그렇게 숨을 쉬고 있다는 걸 기억해 두게.

기계음의 매몰찬 말에 슈뢰딩거는 여전히 따지듯이 물었다.

- 가지고 계신 큰 뜻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를 포함한 우리의 희생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슈뢰딩거의 말에 기계음이 말을 했다.

- 가르치려 드는군. 아직도 선생 짓인가? 자네가 가르칠 사람은 많이 있으니 그들을 찾아보는 건 어떤가?

슈뢰딩거는 자신의 말을 허투로 듣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여전히 조금 격앙된 말투로 얘기를 했다.

- 제가 선택했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그러나 슈뢰딩거의 말은 오히려 기계음의 비웃음을 샀다.

- 선택이라... 자네는 선택할 권리가 없지. 자네는 마치 자네의 의지대로 나를 선택한 것처럼 얘기하는데 나를 선택한 건 필연이었지. 여러 대안을 찾은 걸 내가 모를 줄 알았나? 자네는 그게 탈이야. 눈앞에 확실함을 두고 항상 가능성을 찾아 헤매지.

기계음의 말에 슈뢰딩거는 주먹을 부르르 떨며 허공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이내 표정을 풀며 말했다.

- 그렇군요. 필연. 확실함... 어쩌면 제가 간절히 바란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필연과 확실함을 잃어버린 느낌입니다.

그 말에 기계음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 멋진 말이야. 필연과 확실함이 사라졌다는 그 도발을 기억하겠네. 하지만 자네가 생각하는 필연과 확실함은 너무 지엽적이야. 그건 아나?

- 문제의 본질을 바꾸려 하지 마십시오. 제 생각엔 필연과 확실함이란 말로 대충 넘기려하는 게 더 이상합니다.

슈뢰딩거의 말에 기계음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말을 이었다.

- 자네가 정 그렇게 생각한다면 자네 뜻대로 하게. 단!

기계음의 다음 말에 슈뢰딩거는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 그들의 쓸모를 나중에 판단했을 때는 자네도 쓸모를 잃게 되겠지.

슈뢰딩거는 자신의 판단 이상의 무언가를 느끼고 있었지만 그는 결코 말해주지 않았다. 슈뢰딩거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 무지한 제게 그들의 쓸모에 대해 얘기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슈뢰딩거는 기계음을 향해 진심을 다해 물었다. 하지만 기계음은 냉소적으로 얘기를 했다.

- 조금은 실망이로군. 난 자네가 대단한 판단력과 혜안을 가진 줄 알았는데 말야.

하지만 다음 말은 슈뢰딩거를 놀라게 할 만한 말이었다.

- 그들의 쓸모라면 내가 쉽게 얘기를 해 주지. 다나카와 톰슨이 모두 복제 인간인 건 알고 있나?

기계음의 말에 슈뢰딩거가 고개를 끄떡였다.

- 그렇기에 그들은 더 이상 쓸모가 없는 존재들입니다. 쓸데없이 남겨두어 분란을 일으키는 것은...

하지만 기계음은 조용히 얘기를 꺼냈다. 길고도 치밀한 계획을 슈뢰딩거에게 얘기를 했다. 슈뢰딩거는 그 말을 듣는 동안 얼굴이 붉어졌다가 평안해지기를 반복했다.

- 그런 의미에서 앤더슨은 실격이지.

기계음의 말에 슈뢰딩거는 반박을 했다.

- 오히려 앤더슨이 우리에겐 더 필요한 인물입니다. 그에게 당분간 맡기면...

하지만 기계음은 단호했다.

- 자네의 이중 삼중 계획은 모든 것이 완벽하다면 문제가 없지만, 이번 일만 해도 문제가 있지 않았나?

기계음의 말에 슈뢰딩거는 고개를 저었다.

- 연구의 일환이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기계음은 냉소를 했다.

- 혹시 내가 자네의 의도를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니란 것쯤은 알고 있겠지?

슈뢰딩거는 그 말에 전혀 당황함없이 얘기를 했다.

- 저의 의도요?

기계음은 딱딱한 목소리로 얘기를 했다.

- 초.능.력.

기계음의 말에 슈뢰딩거는 그제야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 그.. 그건...

하지만 기계음은 전혀 냉정함을 잃지 않고 얘기를 했다.

- 자네의 꾸민 계획을 내가 어떻게 알았나 궁금하겠지? 하지만 놀라진 말게나. 자네의 계획은 그냥 나를 시험하기 위한 테스트의 과정으로 생각할 테니까.

슈뢰딩거는 그제야 모든 의문이 풀렸다. 이번 중국에서의 실험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얼토당토않게 자신의 측근인 앤더슨을 처리한 것이나, 굳이 다나카와 톰슨을 살려둔 것이나 그리고 최근 연구하던 샘플을 전량 폐기하고, 보존 가치가 있는 것들을 미국으로 옮기는 의도를. 더 이상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 저는 견제의 수단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피터의 경우처럼 되지 않으려면...

슈뢰딩거의 말에 기계음이 건조하게 웃었다.

- 어쩌면 자네는 그레고리의 능력을 이어받은 나를 과소평가하는군. 내가 받은 능력은 자네가 상상하는 이상이야.

슈뢰딩거는 그제야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젖었다. 그렇다. 자신이 생각한 것은 '인간'으로써 뛰어난 존재인 그레고리의 현신(現身)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오래 전 문헌을 통해서도 그레고리는 그저 '인간'으로 뛰어난 존재가 아닌 '인간 이상의 무언가'를 가진 존재였던 것이었다. 단지 그것이 고작 전기적 자극에 불과한 기억 이식에서 발현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폭주(暴注)하는 뛰어난 인간을 제어하기 위한 방법을 연구했던 것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한국에서만 연구를 한 것이 아니라 유럽의 마녀나, 아프리카의 흑마술, 미국 인디언을 통한 주술 의식 등 초능력적인 면을 통해 대적하려 했던 것이었다.

- 제가 실수를 했군요.

슈뢰딩거의 말에 기계음은 마찬가지로 건조하게 웃었다.

- 하지만 자네를 책망하진 않아. 누구나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을 수는 없지. 자네의 이성이 그렇게 하도록 만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지.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 두게나. 인간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슈뢰딩거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떡였다.

- 그럼...

슈뢰딩거의 말에 기계음은 말을 했다.

- 당분간은 너무 드러나는 일을 하진 않을 것이네. 아직 나도 그렇고, 조직도 그렇고 안정을 찾아야 하니까.

슈뢰딩거는 기계음의 말에 고개를 끄떡였다.

- 그럼 반대하는 이들은...

슈뢰딩거의 조금은 냉혹한 말에 기계음이 말을 했다.

- 조금만 기다리면 다들 원래대로 돌아갈 것이라네.

기계음의 말에 슈뢰딩거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 그럼 저도 이제 학교로 돌아가서 연구를 계속하겠습니다.

하지만 슈뢰딩거의 말에 기계음은 반대의 의사를 명확하게 드러냈다.

- 그건 아니야.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아직 인격적(人格的)으로나 외적으로는 미숙하지 않은가. 자네가 앞으로 나의 곁을 지켜주게나.

기계음의 말에 슈뢰딩거는 잠시 눈을 감았다. 지금 자신이 느끼는 이 당혹감과 불안함, 두려움 그리고 어찌하지 못할 환희와 같은 복잡한 감정이 샘과 에드워드가 꿈꿨던 일일까 싶었다. 슈뢰딩거는 알았다고 대답을 하고 방을 나왔다.

- 이보게들... 우리가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게 맞겠지?

슈뢰딩거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걸어가면서 다짐을 했다. 이제 '그'를 보다 완벽하게 '그'답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록 그것이 히틀러 독재에 맹목적으로 충성한 아돌프 아이히만(Karl Adolf Eichmann)과 같은 우(愚)를 범하는 짓일지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한 '그레고리'라는 인물보다 더 크고 어마어마하게 느껴졌다. 그의 파도 앞에서 모든 것이 재편(再編)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사회, 경제, 정치, 종교, 그리고 인간마저도. 자신이 꿈꾸던 세상이었나 하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 보였다. 슈뢰딩거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젖었다. 그가 커다란 부정(不正)이라면 자신이 믿지 않는 신(神)이 그것을 막는 것 외에는 없으리라 생각하고는 눈을 뜨고는 긴 복도를 걸어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