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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계(逐界)-쫓겨난 이들의 세계-151화 (151/309)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3장 - 9. 흔적(3)

철구가 놈을 따라 도착한 곳은 톰슨 병원이었다. 철구는 이들과 지겹게도 엮이는 것에 입맛이 썼다.

이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대충 감을 잡을 수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심증이었기에 아무런 조치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확실한 물증이 있다고 해도 자신이 나서서 이곳을 깨부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까지 따라왔으니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당연했다.

그들이 어찌되었건 이번 일과 연결이 된 것을 안 이상 그냥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물러나 그들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지금은 그들의 의도를 파악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철구는 톰슨 병원이 보이는 먼 곳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병원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저녁때였지만 병원은 여전히 분주했다.

응급환자들이 수시로 들어왔고, 의사와 간호사들은 몹시 바빠 보였다. 철구는 응급실 쪽 문으로 몸을 옮겼다.

그리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응급실에는 경비원 두 명이 새로 들어온 응급 환자를 의사에게 보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철구는 자연스럽게 그들을 피해 '외부인 출입금지'라고 쓰인 곳 쪽으로 향했다. 버튼을 누르자 문이 열렸고, 철구가 그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아무도 인식하지 못했다.

철구는 아주 자연스럽게 문안으로 들어가자 의사들 휴게실인 듯한 공간이 보였다. 거기에는 한 남자가 피로에 지친 모습으로 소파 위에서 잠이 들어 있었다.

철구는 그가 벗어서 의자에 걸어 놓은 가운을 걸쳤다. 그리고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안으로 더 들어가자 계단과 연결되는 문이 하나 나왔다.

철구는 문을 열고 계단 쪽으로 몸을 옮겼다. 위아래로 뚫려 있는 계단에서 철구는 자연스럽게 몸을 아래층을 옮겼다.

직감으로도 그 쪽이 맞는 것으로 느껴졌고, 지금까지 그들을 생각해 본다면 지상보다는 지하 쪽에 더 타당하게 느껴졌다. 철구는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지하 2층에 도착하자 지하 3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의 철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철구는 어쩔 수 없이 지하 2층으로 연결된 통로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어두운 공간이 펼쳐졌다. 밤이어서 그런지 사람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철구는 그 곳이 지하 주차장 쪽으로 뚫렸을 것이라는 짐작으로 들어왔는데, 주차장이 아닌 엉뚱한 곳이었다.

그렇다고 특별한 것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혈액 검사실, CT 촬영실 등 검사실과 몇몇 사무실만이 보였다. 철구는 그 안을 걷다가 멀리서 미세하게 들리는 발소리에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는 가까이 보이는 사무실의 문을 열었다. 사무실 문은 의외로 쉽게 열렸고, 철구는 그 안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자 말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리기 시작했다. 철구는 사무실 안에서 주변을 살피다 아래가 막혀 있는 책상 아래로 몸을 숨겼다. 조금 후에 두 명의 남자가 투덜거리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와 불을 환하게 켰다.

- 젠장, 샘플을 놓치고서 큰소리는...

목소리가 가는 남자가 투덜거리자 쉰 목소리의 남자가 그 말을 받았다.

- 그러게. 우리가 이제 와서 어떻게 찾아?

쉰 목소리의 남자 말에 목소리가 가는 남자가 말을 받았다.

- 그 샘플을 찾으래? 어이없네.

- 내 말이. 그 좋은 기회를 놓치고. 하여간 그 놈들이 하는 일이 그렇지 뭐.

쉰 목소리의 남자 말에 목소리가 가는 남자의 옆구리를 툭 치며 말했다.

- 조용히 말해. 윗선에서 파견했는데 듣는 귀가 많아.

그러자 쉰 목소리 목소리의 남자는 오히려 보란 듯이 말했다.

- 그러던가. 이번에 그 일 망치고 다른 샘플 이동 업무 맡았다면서?

그 말에 가는 목소리의 남자가 이번엔 분통이 터진다는 듯이 말했다.

- 지하 4층에 있는 샘플 옮긴다는데, 선배 말로는 무슨 신주단지 모시듯이 한다던데. 아무튼 그걸 미국으로 옮긴다나봐.

가는 목소리의 남자 말에 쉰 목소리의 남자가 되물었다.

- 지하 4층 샘플? 그게 뭐야?

- 어? 넌 모르겠구나. 이 병원에 명물 있어. 기가 막히게 예쁜 여신 하나가 커다란 유리병 안에 담겨 있거든.

- 뭐? 그게 무슨 말이야?

쉰 목소리의 남자가 되묻자 가는 목소리의 남자가 목소리를 낮췄다.

- 그게.. 중요한 샘플이라는데, 내가 초년생에 따라갔다가 데려왔거든. 임신 중이었는데...

그 순간 철구의 옷에 있던 삐삐가 울렸다.

'삐삐.. 삐삐..'

그 소리에 경비원 둘이 책상 쪽을 향해 쳐다보았고, 철구는 책상 아래에서 재빨리 몸을 일으켜 두 사람을 공격했다.

주먹을 뻗어 멍하니 있던 남자 하나의 인중을 가격했고, 재빨리 몸을 틀어 다른 남자를 향해 발을 뻗었다.

그러나 조금의 시간차가 있어서인지 첫 번째 남자는 인중을 얻어맞고 그 자리에 부대 자루 가라앉듯 쭈그려 앉았지만, 두 번째 남자는 발차기에 몸이 뒤로 밀려났을 뿐이었다.

철구의 발길질을 간신히 막아낸 남자가 철구를 향해 주먹을 뻗었다. 철구는 그 주먹을 피해 남자를 향해 발길질을 했다.

철구의 발길질이 그의 목덜미를 향하자 남자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철구의 발길질이 그의 머리통을 강타했고, 남자는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철구가 재빨리 그를 향해 주먹을 내뻗었지만, 그는 자신의 앞가슴에서 총을 뽑아 철구를 향해 발사를 했다.

소음기가 장착된 총알은 철구의 어깨 쪽을 관통했고, 철구의 주먹은 그의 코를 정확하게 강타했다.

둘 다 충격에 의해 뒤로 물러났고, 코를 얻어맞은 경비원은 주르륵 미끌어지듯 쓰러졌다. 철구 역시 총격에 의한 충격으로 벽에 뒤통수를 부딪치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철구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칠흑 같은 어둠만이 텅 빈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방향이나 거리 따위는 어둠 속에 묻혀 알 수 없었다.

시간조차 어둠 속에서는 흐르지 않는 것처럼 아무런 느낌조차 들지 않았다. 하다못해 바람조차도 어둠 속에서는 불 자리를 잃은 것처럼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적막은 어둠과 함께 숨을 죽인 채 엎드려 있었고 어둠의 불투명이 너무 진하다 보니 오히려 모든 것이 관통되는 듯 그 자체로만 존재하고 있었다.

아무도, 아니 어떤 존재를 느낄 수조차 없는 완벽함이 마치 깨진 유리 조각처럼 날카롭게 피부를 관통했다. 어둠이 온몸에 스며들어 자신의 본질마저 원래는 어둠이 아니었나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는 손을 올려보았다. 그러나 손을 올렸다는 인지와 의지만 있을 뿐 어디에도 손아 올라갔다는 것을 확인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 순간 겁이 덜컥 났다. 이 어둠 안에는 그저 어두운 공간과 피부로 느껴지는 공기와 언제든지 흐르는 시간만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 무참하게 깨졌기 때문이다.

이 어둠 안에는 자신의 손처럼, 아니 자신의 존재처럼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있을 수도 있다는 막연한 두려움이 스멀스멀 머릿속으로 기어들어왔다.

무지가 주는 공포는 그로 하여금 정상적인 사고보다는 가슴 서늘함을 더 크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완벽한 적막과 어둠 안에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여전히 아무 것도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는 어둠만이 전부였다. 그는 이 순간 가만히 있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행동이란 것을 알면서도 두려움 때문에 한 걸음을 내딛었다.

이 한 걸음이 자신을 이곳에서 벗어나게 할 것인지 아니면 어 깊은 어둠으로 이끄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가만히 어둠 속에 함몰되어 있는 것이 오히려 자신을 더 질식시킬 것만 같았기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발을 뗀 것이었다.

그러면서 마치 무협지의 주인공이나 미래 인간들처럼 어둠을 투시하는 능력이 있었으면 하는 엉뚱한 바람을 떠올렸다.

그러다가 커다란 벽 앞에서 우뚝 멈춰 섰다.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지만 그냥 그렇게 넘길 수만은 없었다.

- 도대체 너희들은 뭐야!

철구의 외침은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머리를 울렸다. 누구도 대답하지 않을 것이란 걸 알면서도 철구는 그 벽을 향해 소리쳤다.

그리고는 벽을 손으로 내려쳤다. 손은 비현실적으로 벽에 부딪혔고, 통증 또한 전해지지 않았다.

- 여.. 여긴...

그 순간 철구는 몸을 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깨와 뒷목에 몹시 심한 통증이 찾아왔다.

하지만 철구는 극심한 통증보다 더한 조급함이 생겼다. 어깨에 극심한 통증이 찾아와 인상을 쓰고 있지만 그건 마음의 고통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철구는 어렴풋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 이 건물 어딘가에는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아내와 아이가 있다는 것을.

하지만 지금은 철구가 어찌할 수 없었다. 설사 이 건물을 무너뜨린다고 해도 아내와 아이를 여기서 무사히 데리고 나갈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하지만 철구는 아내와 아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그들에게 쓸모가 있기에 그들은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질러진 사무실에 앉아 철구는 감정을 추슬렀다.

- 냉정해야 해. 침착하자. 침착하자...

철구는 쓰러져 있는 남자의 웃옷을 벗기고 입고 있던 의사 가운을 벗어던졌다. 그리고 웃옷을 걸친 채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남자의 가슴에 있던 총을 주머니에 넣었다. 손에 피 묻은 흔적이 있었지만, 그건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철구는 4층으로 무리하게 내려가느냐 아니면 여기서 일단 물러나느냐를 고민했다. 하지만 철구는 냉철해지기로 했다.

그 임산부라고 불린 샘플이 혜민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벌써 6년이 흘렀는데 그들이 이곳에 있을 리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설사 그녀가 혜민이라고 해도 부상까지 입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크게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그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 철구는 독하게 마음을 먹고 재빨리 몸을 돌려 아까 나온 통로로 걸어 나왔다.

응급실 안은 여전히 바빠 보였다. 최대한 얼굴을 숙인 채 톰슨 병원 밖으로 나가려는 데 간호사 한 명이 철구를 불렀다.

- 저, 환자분, 그냥 가시면 안 되요. 피가 많이...

간호사가 철구를 불렀지만, 철구는 간호사의 말을 무시한 채 무작정 밖으로 나왔다. 경비원들도 그 소리에 철구를 쳐다보다가 말았다.

- 미친놈이야? 다친 놈이 병원에 왔다가 왜 그냥 가?

철구는 거기서 빠져나와 얼른 차 있는 곳으로 갔다. 피를 많이 흘려서인지 점점 의식이 흐려져 갔다.

철구는 차를 몰아 강남에 있는 세현의 병원 쪽으로 옮겨갔다. 철구가 그 앞에 도착해서 세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 여... 여기 병원 앞인데... 피...

그리고 철구는 의식을 잃었다. 철구의 전화를 받은 세현은 부리나케 밖으로 나와 철구의 차로 가서 철구를 끌고 병원 안으로 옮겼다. 차 바닥에는 피가 흥건했다.

- 오늘 다들...

세현은 철구의 혈액 검사를 하고, 수혈을 준비했다. 그리고 철구의 어깨에서 총알을 빼내는 수술을 했다. 철구의 수술이 끝나자 세현은 몸이 축 늘어졌다.

오늘 하루 동안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었고, 힘이 들었다고 생각하자 그들이 모두 불쌍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런 불쌍함도 몰려오는 피곤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세현은 의자에 기댄 채 자기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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