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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계(逐界)-쫓겨난 이들의 세계-150화 (150/309)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3장 - 9. 흔적(2)

철구의 질문에 남자는 대답이 없이 철구를 노려보았다. 철구는 그런 남자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남자 역시 말없이 철구를 향해 총을 겨누고만 있었다. 철구가 살펴보니 남자의 다리 아래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총을 맞긴 했지만 치명상은 아니었는지 잠깐 기절했다가 깬 것이었다. 미리 상황을 파악해 놓지 않은 자신의 부주의함을 원망하긴 했지만, 남자는 총에 맞은 자리가 고통스러운지 움찔거렸다.

- 피가 많이 나는군. 지금이라도 나가면 살 수 있어.

철구의 말에 남자는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철구는 총을 겨눈 채 말을 했다.

- 복장을 보니까 경호원 같은데, 총까지 들고 있는 걸 보니까 대단한 곳 소속이겠군.

철구의 말에 남자는 여전히 총을 겨눈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시간이 흐르면 너만 손해야. 아니면 빨리 결판을 내던가. 총보다 빠른 사람은 없으니까 둘 다 죽으면 끝나는 거 아냐?

철구의 말에 처음으로 남자의 표정이 변했다. 철구는 그런 남자의 표정과는 상관없이 말을 했다.

- 빨리 끝내자구.

철구의 치킨 게임에 남자가 얘기를 했다.

- 잠깐...

남자는 잠시 머뭇거렸다. 철구는 그 순간 남자의 주저함을 보았다. 철구는 그런 그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지만, 눈은 잠시 석호가 들어간 곳을 향했다. 그 찰나의 순간 남자는 재빠르게 몸을 현관 쪽으로 움직였고, 철구 역시 그 움직임을 따라 현관 쪽으로 몸을 옮겼다. 어느새 남자는 담벼락을 넘고 있었고, 철구는 남자를 향해 총을 한 발 발사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를 맞추기 위한 것이 아닌 위협사격이었다. 철구는 남자가 담벼락을 넘자 자신도 담벼락을 뛰어 넘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남자가 차에 올라타는 것을 보았고, 철구는 자신의 차로 달려가 시동을 걸었다. 철구는 차 안에서 핸드폰을 꺼내 석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 저는 아까 그 놈 뒤쫓고 있으니까 얼른 데리고 탈출하세요.

철구의 전화를 받은 석호는 화장실 안쪽에 뚫려 있는 곳으로 몸을 옮겼다.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공간으로 들어오자 석호는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 살피기 위해 안력(眼力)을 높였다. 좁은 길이 앞에 있었고, 석호는 벽에 손을 대며 좁은 길을 따라 걸었다. 그러자 앞에 낮은 계단이 보였다. 석호는 계단 아래로 한 걸음씩 움직이며 발을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퀴퀴한 냄새가 풍겼지만, 냄새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 소라 양! 소라 양!

석호가 소라의 이름을 불렀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석호는 그러다가 문득 자신의 스마트폰이 떠올랐다.

- 왜 진작...

석호는 스마트폰의 카메라 기능을 켜고 플래시를 밝혔다. 자신이 내려온 좁은 계단 옆으로 또다시 조그만 길이 하나 있었고, 석호는 플래시를 비치며 그 길을 따라 갔다. 그리고 막혀 있는 조그만 쪽문이 하나 보였다. 석호는 쪽문을 살짝 밀어보았다. 문은 소리도 없이 열렸고, 석호는 그 안으로 다시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쪽문을 지나오자 다시 몇 개의 계단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철창이 있는 철문이 하나 보였다. 석호는 철문을 당겨보았다. 그러나 철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석호는 철창 안으로 플래시 불빛을 비췄다. 서너 평 정도 되는 밀폐된 공간이 보였고, 한 쪽 구석에 걸레처럼 널브러져 있는 헝겊 조각이 보였다.

- 소라 양! 소라 양!

석호는 문을 두드리며 소리를 쳤다. 넝마 조각 같은 헝겊 아래로 사람의 손 모양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석호는 재빨리 주머니를 뒤져 열쇠 꾸러미를 들었다. 그리고 철문에 있는 열쇠 구멍에 하나씩 밀어 넣었다. 세 번째 열쇠가 안으로 들어가자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석호는 문을 열고 재빨리 소라 옆으로 다가갔다.

- 소라 양!

석호는 한 쪽 구석에 쓰러져 있는 소라를 발견하고 얼굴에 귀를 가져다 대었다. 미약하게 숨소리가 들려왔다. 석호는 그런 소라를 등에 업다가 문득 다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종이백에서 옷을 꺼냈다. 불빛에 약한 소라였기에 석호는 핸드폰 불빛마저 꺼버린 채 손의 감각으로만 소라에게 옷을 입혔다. 소라의 옷이 엉망이었기에 석호는 옷을 뜯어버리고 자신이 가져온 옷을 입히기 시작했다.

- 왜 하필이면...

석호는 왜 자신이 하필이면 인형 옷과 인형 탈을 가져왔는지 자책을 했다. 전신을 가릴 옷만 생각하다 문득 떠올라서 샀지만, 소라에게 입히기엔 영 불편했다. 석호는 소라의 몸에 생긴 수포들이 터져 감염이 될 것이 우려되어 재빨리 인형 옷 안으로 소라를 밀어 넣었다. 그리고 지퍼를 올릴 때쯤 갑자기 소라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 아... 아악... 안 돼... 안 돼!

소라의 발버둥에 소라의 옷을 입히는 데에만 정신이 팔렸던 석호가 주르륵 밀려났다.

- 나... 나쁜 놈...

석호는 소라를 안심시키기 위해 황급하게 얘기를 했다.

- 저... 저에요. 장석호 신부...

석호의 목소리를 들은 소라는 어둠 속에서 석호 쪽으로 눈빛을 반짝이며 쳐다보았다.

- 시... 신부님?

소라의 말에 석호는 핸드폰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 아악...

석호의 얼굴에 빛이 비춰지자 석호의 얼굴이 괴기스럽게 보였는지 소라가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석호는 당황해서 얼른 핸드폰 화면을 끄며 말했다.

- 미.. 미안해요. 놀라게 할 생각은...

소라는 석호가 핸드폰을 끄자 석호 쪽을 보며 말했다.

- 그런데 제가 왜 이런 옷을...

석호는 소라에게 자신이 가져온 인형 탈을 넘겨주며 말했다.

- 일단 한 시가 급하니까 여기서 나가시죠. 빛에 보호할 수 있는 보호복이 딱히 떠오르지 않아서 가져온 겁니다.

석호가 넘겨준 인형 탈을 받아든 소라는 자신의 머리에 인형 탈을 뒤집어쓰며 말했다.

- 옷도 그렇고 탈도 너무 커요.

석호는 어둠 속에서도 미안해하며 말했다.

- 일단 병원으로 가는 데까지만 입고 가세요.

석호는 얼른 손을 뻗어 소라의 손을 잡았다. 소라는 석호에게 손을 잡힌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 무슨 일이죠?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오면서 소라가 묻자 석호가 목소리를 낮추면서 얘기를 했다.

- 아직 저도 정확한 내막은 모릅니다. 다만 여기서 빨리 나가서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석호의 말에 소라는 석호의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 제가 쓰러져 있었나요?

소라의 질문에 석호가 대답을 했다.

- 제가 몇 번을 불렀는데 대답이 없더군요.

소라는 석호의 말에 한숨을 푹 쉬었다.

- 목이 말라서 가져다 준 우유를 한 모금 마셨는데...

석호는 소라를 이끌고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화장실 바깥의 상황과 마주친 소라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한 사람은 등에 칼에 꽂힌 채 죽어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피를 온몸에 덮어쓰고 온몸이 찢긴 채 쓰러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 이.. 이건..

석호는 그런 소라의 손을 강하게 잡아채면서 이끌어갔다. 그리고 대문을 열고 주변을 살피다가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자신의 차 쪽을 향해 걸어가다 문득 아까 원호가 자신에게 건네 준 차키가 떠올랐다.

- 일단 차에 먼저 타 있어요. 내가 금방 갈 테니까.

하지만 방금 전 무서운 광경을 목격한 소라는 전신이 타들어갈 것처럼 따끔거렸지만 석호의 손을 놓지 않은 채 고개를 저었다. 석호는 여기서 실랑이를 하느니 차라리 빨리 해결하고 차에 오르는 게 낫다는 생각에 원호의 차로 보이는 차 문을 열었다. 그리고 차 안 이곳저곳을 살폈다. 콘솔 박스를 열자 USB 메모리 하나가 보였다. 석호는 USB 메모리를 꺼내 들고 차 안을 다시 살폈다. 그리고 몸을 돌려 트렁크 쪽으로 갔다. 석호가 차키를 트렁크 열쇠 구멍에 넣고 돌리자 갑자기 차 트렁크 쪽에서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다. 석호는 본능적으로 소라를 구해야 된다는 생각해 소라 쪽으로 몸을 돌려 소라를 끌어안았다. 석호의 등 뒤로 차가 폭발하며 엄청난 화염이 석호를 뒤덮었다.

- 아악...

소라의 비명 소리가 퍼졌지만 이내 차 폭발음에 묻혔고, 화염이 그 두 사람을 잡아먹을 듯이 덮쳤다. 소라는 석호와 자신이 이렇게 죽는가 보다 싶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화염의 불길이 덮친 것치고는 뜨거움이 덜했다. 소라는 놀란 눈으로 석호를 쳐다보았다. 석호는 소라를 안은 채 웃고 있었다. 너무도 환한 웃음 뒤로 알 수 없는 환한 빛이 흘렀다. 보통의 빛이라면 소라는 눈이 따갑고, 이내 눈 아래에서 진물이 흘러내렸을 텐데 전혀 그런 느낌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아까 느꼈던 따가움조차 조금은 사라진 기분이었다.

- 시... 신부님...

석호는 소라를 보며 물었다.

- 괜찮아요. 내가 지켜 줄 테니까.

석호는 놀란 눈의 소라를 데리고 자신의 차 쪽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소라를 뒷좌석에 앉힌 채 세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 이... 이리로 좀 와 주실래요? 소라 양을 찾....

앞좌석에 앉은 석호가 핸드폰을 떨어뜨리자 소라는 놀라서 소리쳤다.

- 시.. 신부님. 신부님...

핸드폰 안에서는 세현이 다급하게 위치를 묻는 목소리가 들렸다. 소라는 몇 번이고 석호를 불렀지만, 석호는 아무런 미동도 없이 쓰러졌다. 소라는 석호가 떨어뜨린 핸드폰을 들고 세현에게 얘기를 했다.

- 시... 신부님이 쓰러지셨어요.

세현은 그 말에 소라를 진정시키며 말했다.

- 거기가 어딘지 알아야 갈 수 있으니까...

세현의 말에 소라는 자신을 손을 덮고 있는 인형 옷을 뜯었다. 손에서 피고름이 흘러나왔지만 소라는 그런 걸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리고 스마트폰 지도 어플리케이션을 열었다.

- 경기도 시흥시....

소라는 위치를 말해주고 다시 석호를 흔들어 깨우려고 했다. 그러나 석호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쓰러져 있었다.

- 앙... 죽으면 안 되요... 아... 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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