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3장 - 9. 흔적(1)
9. 흔적
소라가 눈을 떴을 땐 사방을 분간하기 힘들었다. 붕대로 온몸을 친친 감은 것 때문이기도 했지만, 사방은 늘 그녀가 머물던 어둠의 공간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소라는 붕대 사이를 비집고 사방을 둘러보려고 노력했다. 그들이 어두운 지하실로 밀어 넣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소라는 강렬한 햇빛 아래에서 죽어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소라는 자신에게 벌어진 이 일이 믿기지 않았다. 분명히 의사는 엄마가 정상이 되었다면서 엄마를 만나러 간다고 하고는 자신을 차에 태웠다. 그 의사는 엄마의 병원에서 봤던 사람이었기에, 그리고 자신의 주치의와 알고 있던 사람이었기에 그를 믿고 앰뷸런스에 몸을 실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도착한 곳은 엄마가 있는 병원이 아니라 낡고 허름한 병원이었다. 그리고 자신을 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이런 곳에 던져 놓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소라는 어떻게 된 일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눈물도, 살려달라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 혹시 아빠가?
소라는 그러다가 문득 아버지의 행방이 궁금했다. 워낙 거리감을 두고 살아와서도 그렇겠지만 소라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도 그리 많지 않을 뿐더러 아버지라는 존재 자체도 희미하게 느껴졌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항상 바빴고, 자신이 어느 정도 컸을 때는 어둠 속에서 잠깐 얘기하는 것 외에는 그다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 그렇기에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돌봐 준 엄마에 대한 애착이 컸던 것이었고, 애착이 커지면 커질수록 엄마가 자신보다 더 몹쓸 병에 걸린 게 한스러웠다. 그리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몹시도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엄마를 그렇게 만든 것이 자신과 아버지라고 생각했다. 사랑을 받지 못하는 여인이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딸을 키우면서 생기게 된 마음의 병이라고. 하지만 엄마의 병이 단순히 그런 이유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땐 그 분노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렇게 아름답고 현숙한 여인이 어느 순간부터 미친 사람이 되었고, 남편은 그들을 돌아보지 않았다. 자신에게도 자주 면회를 오지 않은 아빠가 엄마한테 자주 찾아갔으리라고 생각지 않았다. 소라는 그 순간 분노에 사로잡혔다.
- 그냥 놔둬도 죽을 텐데, 왜?
소라는 지하실 구석에 쪼그려 앉았다.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지만, 더 이상 무언가를 생각하기 싫었다. 아니 생각을 하면 할수록 점점 부정적으로 변했기에 생각을 하기가 무서웠다. 소라는 이대로 죽기에 너무나 억울했다. 죽더라도 엄마와 함께 있고 싶었다.
- 엄마...
그 때 지하실 철창 안으로 빵과 우유가 들어왔다. 소라는 그 소리를 듣고 재빨리 지하실 문 앞으로 다가가서 말했다.
- 살려주세요. 저는 치료를 받지 않으면...
소라의 간절한 외침에 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 금방 다른 곳으로 옮길 테니까 그 때까지 참아.
소라는 그 목소리가 엄마를 담당하던 의사라는 걸 알았다. 소라는 다급하게 그 의사에게 엄마의 상태를 물었다.
- 어.. 엄마는 괜찮죠?
의사는 잠시 침묵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 모.. 몰라.
의사가 밖으로 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소라는 다시 소리쳤다.
- 엄마는 괜찮죠? 그렇죠? 네? 네?
하지만 지하실에서는 소라의 목소리만 울려 퍼졌다. 소라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무서운 예감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 어... 엄마...
한편 철구는 사무실에 돌아오자 갑자기 몸이 몹시 피곤했다. 예전에는 몇 명 때려눕히고, 술 몇 잔 마셨다고 이렇게 피곤하지는 않았기에 철구는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철구는 소파에 누워 곧바로 잠이 들었다. 그러다가 쏟아지는 아침 햇살에 자신도 모르게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철구의 핸드폰에는 부재중 전화가 10통이 넘게 와 있었다. 철구는 핸드폰을 보며 전화를 걸었다. 건너편에서는 조금은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 형님, 그 앰뷸런스가 어디로 갔는지 대충 파악했습니다.
철구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 어디로 갔는데?
- 시흥에 있는 병원인데요. 폐업한지 꽤 된 곳입니다.
- 시흥?
철구는 자리에서 일어나 차 쪽으로 걸어갔다. 전화를 건 건 호봉이였다. 호봉이는 병원 앞을 찍는 CCTV를 통해 차량 번호를 알아냈고, 그걸 바탕으로 차를 찾았다는 것이었다. 철구는 웃으며 호봉이에게 얘기를 했다.
- 예전보다 빠릿빠릿한데?
철구의 말에 호봉은 웃으며 말했다.
- 형님, 저도 이제 잘 나가는 놈이에요.
철구는 호봉의 말에 냉랭하게 말했다.
- 잘 나가긴. 아무튼 고맙고. 착하게 살아라.
철구가 전화를 끊을 때 호봉의 목소리가 들렸다.
- 애들 좀 보낼까요?
철구는 그 말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 내가 조폭이냐? 됐어.
철구의 말에 호봉은 민망한 듯이 말을 얼버무리다가 말을 했다.
- 나중에 소주나 한 잔 더 해요.
철구는 그 말에 대꾸를 하지 않고 전화를 끊고는 석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철구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바로 전화를 받았다.
- 시흥 쪽에 있는 폐쇄된 병원 쪽이랍니다. 저는 지금 출발할 건데, 신부님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철구의 말에 석호 역시 그 곳에서 바로 출발한다고 얘기를 했다. 두 사람은 바로 시흥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철구는 곡예 운전을 하듯이 도로를 빠져 나갔고, 철구는 시흥까지 30분 만에 도착을 했다. 호봉이 알려준 곳에 도착을 하니 다 무너져 가는 병원이 하나 보였다. '호산나 산부인과'라는 간판에 글씨가 몹시 빛이 바래 있었고, 문은 커다란 열쇠로 잠겨 있었다. 철구는 잠겨 있는 문 옆으로 움직여 담벼락을 살펴보았다. 예전에 있던 전형적인 가정식 산부인과였다. 뒤쪽으로 걸어가자 산부인과에 딸린 집으로 들어가는 대문이 보였다. 마당은 잡초와 갈대가 무성했다. 누군가의 손을 타지 않은 집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았다. 철구는 대문을 살펴보았다. 자물쇠 구멍은 몹시 녹이 슬어 있었는데, 한 구석만 최근에 사용한 것처럼 녹이 벗겨져 있었다. 철구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담벼락을 재빠르게 넘었다. 마당에는 갈대가 높게 있어서 철구가 몸을 숙이자 갈대 안에 철구의 몸이 가려졌다. 그때 집 안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다투는 소리가 들렸고, 곧이어 비명 소리가 들렸다. 철구는 몸을 움직여 문 앞으로 다가갔다. 거기에는 검은 양복을 입고 귀에 이어폰을 긴 경호원 같은 모습을 한 건장한 남자 두 명이 서 있었고, 바닥에는 웬 남자가 하나 쓰러져 피를 흘리고 있었다. 허벅지에서 피가 흐르는 것으로 보아 상처를 입은 것처럼 보였다. 철구는 그런 상황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 돌아 나오려는데 안에서 소리가 들렸다.
- 어디가 숨겼어? 빨리 말하지 않으면 넌 죽는다.
건장한 남자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남자에게 낮고 강하게 말했다. 바닥에 쓰러진 남자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저었다. 철구는 안의 상황을 더 지켜보기로 했다. 그 때 철문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철컹.. 철컹...'
- 어디로 간 거지?
석호의 목소리가 들리자 바닥에 있던 남자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 살려주세요. 신부님...
그 소리와 함께 건장한 남자의 발이 바닥에 있는 남자의 입을 걷어찼다.
- 윽...
- 무슨 일입니까?
바깥에서 석호의 목소리가 들리자 건장한 남자가 가슴에 손을 대고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총?'
철구는 바깥으로 나오는 건장한 남자 뒤를 덮쳤다. 그러자 남자는 놀랐는지 가슴에서 총을 꺼내려고 했고, 철구는 그 손을 가슴 안쪽으로 밀어 넣으며 발로 낭심을 걷어찼다.
- 헉...
그 순간 현관문 안쪽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철구는 그 남자를 방패삼아 뒤로 물러났고, 총알은 남자의 이마를 관통했다. 철구를 자신 쪽으로 쓰러지는 남자를 팔로 지지하면서 손을 뻗어 남자의 가슴 안에 있는 총을 꺼냈다. 그 순간 또다시 총소리가 들렸고, 이마에 총을 맞은 남자의 몸이 또다시 풀썩 했다. 철구는 총을 뽑아 현관 안쪽을 향해 발사했다. 그리고 남자를 놓고 구석 쪽으로 펄쩍 뛰며 몸을 숨겼다. 잠시간의 대치 상황이 이어졌고, 그 순간 석호가 담을 넘어 들어오는 게 보였다. 그 때 또다시 총소리가 들렸고, 철구는 석호가 걱정되었지만, 재빨리 몸을 움직여 현관 앞에서 건장한 남자를 향해 총을 발사했다. 건장한 남자는 믿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철구 쪽을 쳐다보았고, 철구는 남자가 쓰러지는 모습을 보고 석호 쪽으로 달려갔다.
- 괜찮으세요?
철구의 물음에 석호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 그냥 넘어진 겁니다.
석호가 흙을 툭툭 털며 일어나서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 뭘 찾으세요?
철구의 말에 석호는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조금 큰 종이백을 들고 왔다.
- 옷이요. 찾을 사람이 햇빛을 보면 안 돼서요.
철구가 흘끗 종이백 안을 보자 인형 탈과 인형 옷이 하나 있었다. 철구는 석호를 잠깐 쳐다보다가 그냥 고개를 끄떡이고 총을 들고 건장한 남자를 향해 겨냥을 한 채 집 안으로 들어갔다. 건장한 남자가 쓰러져 있는 위로 창백한 얼굴의 남자 하나가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 원호 씨!
석호가 다가가자 원호는 억지 미소를 지었다.
- 시.. 신부님이시군요..
석호는 갑자기 자신의 옷을 벗어 찢어내더니 원호의 허벅지를 묶었다. 그러나 원호가 흘린 피가 이미 도랑처럼 흐를 정도로 엄청났다.
- 병원으로 가야 합니다. 엎히세요.
석호가 원호에게 등을 내밀자 원호는 고개를 저었다.
- 저.. 전 끄... 끝.. 헉.. 헉..
석호가 원호를 엎으려 할 때 원호는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철구가 원호의 등을 보자 원호의 등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칼이 하나 박혀 있었다.
- 잔인한 새끼들..
철구가 그렇게 얘기를 하자 원호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듯이 손가락을 들어 TV 쪽을 가리켰다.
- 저.. 저...
원호의 눈이 뒤집히며 힘없이 쓰러졌다. 석호는 그런 원호의 눈을 덮어주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눈을 감더니 기도를 올렸다. 철구는 그런 석호를 두고 원호가 가리킨 TV 쪽으로 가까이 갔다. 거기에는 열쇠 꾸러미가 하나 놓여 있었다. 철구는 열쇠 꾸러미를 들고 석호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 열쇤데요? 죽으면서 이건 뭐죠?
철구가 살펴보며 말했다.
- 이건 차키고, 이건 대문 열쇠 같고, 이건 뭐죠?
거기에는 생김새가 이상한 열쇠가 하나 있었다. 쇠꼬챙이같이 생긴 긴 막대형 열쇠였다. 철구의 말에 석호가 철구에게 다가오며 열쇠를 건네받고 말했다.
- 이 집은 일제 강점기에 지은 집 같네요. 구조도 그렇고. 내부 인테리어만 바꾸었고, 구조는 일본식 구조랑 똑같네요.
석호의 말에 철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 일본식 구조요?
-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런 구조로 집을 짓지 않아요. 거실이 있고, 그걸 둘러서 방을 배치하는데, 일본은 다다미를 깔고 문이 겹쳐서 있죠. 문은 모두 떼어버렸는데, 천장에 서까래와 연결되어 있는 것은 그대로 놔뒀네요.
철구가 천장 쪽으로 보자 석호의 말이 이해가 되었다. 그 때 석호가 말을 했다.
- 이런 집에는 피할 수 있는 비밀 공간이 있어요. 일본에서 부호들이 전쟁이나 암살자를 피하기 위해 만드는 비밀 공간 같은 곳이죠.
그러더니 석호는 안쪽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갔다. 석호는 벽을 이리저리 두드려보기도 하고, 바닥을 두드려보기도 했다. 세심하게 바닥을 두드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 대개는 큰방에 만드는데...
석호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다시 거실 쪽으로 나와 이리 저리 돌아다녔다. 그동안 철구는 바닥에 쓰러진 건장한 남자 쪽으로 갔다. 양복 안쪽에 손을 넣어 지갑을 꺼내보았다. 그 안에는 신분증도 카드도 없었고, 현금만 잔뜩 들어 있었다. 그리고 다시 몸을 뒤집어 뒷주머니를 뒤질 때 석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 여기네요.
석호가 들어간 화장실 쪽에서 소리가 나자 철구가 몸을 일으켜 그쪽으로 가려할 때였다. 넘어진 건장한 남자가 철구 쪽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철구는 본능적으로 그 주먹을 피하긴 했지만, 정통으로 가슴을 얻어맞았다. 철구는 가슴에서 불에 대인 것 같은 화끈함을 느꼈다.
- 윽...
남자는 철구가 자신의 주먹에 맞은 것을 보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철구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재빨리 철구 쪽으로 몸을 날렸다. 철구는 남자를 피해 한쪽 구석으로 피하며 외쳤다.
- 얼른 들어가서 문 잠가요!
철구의 말에 석호가 밖으로 나오다가 남자와 철구가 싸우는 모습을 보았다. 그런데 그 순간 남자는 몸을 한 번 구르더니 총을 집어 철구 쪽을 향해 겨누었다. 철구 역시 뒤춤에 꽂았던 총을 꺼내 남자를 겨누었다. 석호는 그런 대치를 보고는 어쩔 수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 넌 누구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