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3장 - 8. 그들의 의도(5)
- 너 같은 놈들 가르친 적 없어.
철구의 냉정한 말에도 번개는 여전히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다가 조금 있으니까 문이 열리며 호봉이가 나타났다. 안을 쳐다보던 호봉은 철구를 보며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번개를 보며 말했다.
- 박 형사님은?
호봉의 말에 번개가 철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호봉의 표정이 찌그러지며 말했다.
- 얼굴이 다르잖아. 새꺄!
그러다가 다시 철구를 보며 말했다.
- 너 뭐하는 새끼야?
호봉의 말에 철구가 웃으며 말했다.
- 새끼, 의심은...
이 말에 호봉의 표정이 바뀌며 말했다.
- 바... 박 형사님? 그런데 얼.. 얼굴이..
호봉은 철구를 보며 놀란 표정이 되어 철구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철구는 그런 호봉을 보자마자 정강이를 걷어차며 표정을 굳혔다.
- 너 이 새끼, 사채하면서 장기까지 파냐?
순식간에 정강이를 걷어차인 호봉이는 정강이를 부여잡으며 말했다.
- 아... 혀.. 형님, 보자마자 그게 무슨...
철구는 그런 호봉을 보며 아까 있었던 상황을 얘기했다. 그러자 호봉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되면서 버럭 소리를 쳤다.
- 그 새끼, 언제 사고 한 번 칠 줄 알았어. 형님, 저는 절대 그런 거 시키지 않습니다. 형님이 저한테 착하게 살지는 않아도 나쁜 놈은 되지 말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철구는 그 말에 피식 웃었다.
- 그걸 기억해? 그럼 그 녀석이 단독으로 한 짓이란 말이야?
철구의 말에 호봉은 정말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얘기를 했다.
- 사채를 하긴 해도 장기를 빼거나 그러지는 않습니다. 고작 해야 협박 정도...
철구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 협박하는 게 나쁜 놈이 아니라고?
철구의 말에 호봉은 머리를 긁었다. 철구는 그런 호봉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았다. 호봉은 마치 선생님에게 꾸중을 듣는 학생처럼 고분고분했다. 번개 역시 자리에 앉지 않은 채 벌 서듯이 서 있었다.
- 사채 장부 가져와.
철구의 말에 호봉은 번개를 시켜 사채 장부를 가져오게 했다. 철구는 사채 장부를 보며 원금을 갚은 것은 찢어버렸고, 나머지는 정리해서 넘겨주었다. 그리고 한수의 사채 빚이 있는 서류를 보며 말했다.
- 이 돈은 내가 돈 생기면 갚을 테니까 재촉하지 마.
철구의 말에 호봉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 아... 아닙니다. 안 갚으셔도...
철구는 다시 주먹을 들어 호봉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 땅 파서 장사하는 거 아니잖아. 새꺄.
철구는 그 장부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호봉이 머리를 비벼대다가 철구를 잡았다.
- 형님, 오랜만에 뵀는데 술이라도 한 잔 하시고 가시죠.
철구는 호봉을 보며 말했다.
- 술 끊었어.
철구의 말에 호봉은 번개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번개가 자신의 안주머니에서 열쇠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철구 앞에 열쇠를 내밀었다. 철구는 열쇠를 보고 물었다.
- 이게 뭐야?
철구의 말에 호봉은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 형님 집 열쇠죠. 애들 시켜서 일주일에 한 번씩 청소하라고 시켜놨으니까 아마 깨끗할 겁니다.
철구는 열쇠를 받아 쳐다보았다. 갑자기 혜민과 함께 보내던 옛날이 떠올랐다. 그리고 도망치듯이 집에서 나온 것을 떠올렸다. 철구는 호봉에게 열쇠를 주었다.
- 이건 내가 그 때 빌린 돈 대신 준 거잖아.
그러자 호봉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 아니에요. 이건 형님이 맡겨놓으신 거죠. 저 그렇게 나쁜 놈 아닙니다.
철구는 호봉을 보며 말했다.
- 이제 나 형사도 아니고, 뭣도 아냐.
철구의 말에 호봉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 형사가 아니어도 저한테는 영원한 박 형사님입니다.
- 의리냐?
철구의 말에 호봉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 은혜를 갚는 거죠.
철구는 호봉과 번개를 보며 말했다.
- 아까부터 한 녀석은 절을 하고, 한 녀석은 은혜를 갚는다고 하고. 내가 너희들한테 해 준 게 없는데 뭐 하는 짓들이야?
그러자 호봉이 말을 했다.
- 형사님들은 모두 저희를 그냥 이용하는 대상이나 아니면 실적의 대상으로 보는데 박 형사님은 저희를 그렇게 봐주지 않으셨거든요. 그리고 솔직히 박 형사님 이름 팔아서 위험에서 벗어난 적도 몇 번 있구요. 지난 번 소탕 작전 때 번개가 형사한테 잡혔는데, 박 형사님 얘기를 하니까 조용히 불러서 훈방으로 풀려난 적도 있거든요.
철구는 호봉의 말에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 비리 경찰이군.
철구의 말에 호봉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 그게... 저희가 평소에는 합법적으로 살려고 노력하는데... 그게 일재소탕인가 하면서 그냥 잡아갔거든요. 잘못이 없다고 얘기를 했는데...
철구는 귀를 파며 말했다.
- 그거야 경찰 얘기니까 됐고... 아무튼 앞으로 착하게 살아라. 이런 짓 하지 말고.
철구가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호봉이 철구의 팔을 잡았다.
- 형님, 돌아가신 줄 알았는데... 그래도 소주라도 한 잔 하시고...
호봉이 팔을 붙잡자 철구는 호봉을 쳐다보며 말했다.
- 잡아? 너 많이 컸다. 그리고 내가 왜 니 형님이야?
그러나 철구의 말에도 호봉은 여전히 팔을 잡으며 말했다.
- 형님이 아니어도 좋고, 제가 많이 안 컸어도 좋으니까 소주나 한 잔 하고 가세요.
호봉의 간곡한 말에 철구는 몸을 돌려 자리에 앉았다.
- 그래. 그럼 소주 한 잔만 하고 가지.
철구의 입에서 말이 떨어지자 호봉이 밖에 크게 소리를 쳤다.
- 야! 가서 소주하고 족발하고 사와! 얼른. 불알에서 종소리 나게 뛰어.
호봉의 말에 떨어지자 밖은 몹시 부산스러워졌다. 철구는 번개를 보며 말했다.
- 너도 앉아. 건물 무너질 거 아니면.
철구의 말에 번개가 말석에 앉았다. 호봉은 철구를 찬찬히 살펴보며 말했다.
- 사고 때문에 수술 하신 겁니까?
호봉의 말에 철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깊이 알려고 하지 마. 다치니까.
철구의 말에 호봉은 그냥 고개를 끄떡였다. 철구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 내가 살아 있다는 것하고, 얼굴 바뀐 거 절대 얘기하지 마라.
철구의 낮고 강한 말에 호봉과 번개가 고개를 끄떡였다. 철구는 입을 꾹 다물었다. 어차피 이쪽 세계에서 자신의 존재를 아는 건 시간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신분을 최대한 감춰야 하는데 이렇게 하나 둘 씩 자신의 존재를 알게 되면 언젠가는 그들도 자신에 대해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호봉은 철구의 표정이 굳어지는 걸 보고는 눈치 빠르게 말했다.
- 절대 아무한테도 말 하지 않겠습니다. 절대로.
철구는 예전부터 눈치 빠른 호봉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 눈치 빠른 건 여전하구나.
철구의 말에 호봉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 눈치 하나로 강남을 다 잡은 접니다.
호봉은 자랑스럽다는 듯이 가슴을 쭉 폈다. 그런 호봉을 보고 철구가 뒤통수를 한 대 때렸다.
- 자랑이다. 새꺄.
그 때 술을 가지고 안으로 들어오던 똘마니들이 자신들의 보스가 생전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굽실거리고 뒤통수까지 얻어맞는 것을 보고는 그 자리에서 얼음이 되었다. 호봉은 그런 똘마니를 보며 소리쳤다.
- 빨리 안 깔고 뭐해?
호봉의 회침에 똘마니는 화들짝 놀라서 얼른 봉투를 풀고 소주를 깔았다. 그러자 호봉이 얼른 소주병을 따고 철구 앞에 놓인 잔에 술을 따랐다. 철구는 그렇게 한 잔 받고, 호봉이에게 한 잔 따라 주었다. 그리고 번개에게도 한 잔 따랐다. 두 사람은 황송하다는 듯이 두 손으로 술을 받았고, 세 사람은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했다. 호봉과 번개는 철구에게 과거에 대해 묻지 않았고, 철구 역시 묵묵히 술을 마셨다.
- 형님이 정보 물어오라고 했을 때가 재미있었는데요.
호봉이 그렇게 말하며 번개를 보자 번개 역시 고개를 끄떡였다. 철구는 그런 호봉과 번개를 보며 말했다.
- 이제 형사도 아니니까 그런 일은...
그러다가 문득 소라의 일이 떠올라 말을 꺼냈다.
- 혹시 앰뷸런스 하나 찾고 있는데, 찾을 수 있을까?
철구의 말에 호봉과 번개가 눈을 반짝이며 철구를 쳐다보았다.
- 앰뷸런스 백 대로 찾을 수 있죠.
철구는 그 말에 고개를 끄떡였다.
- 그래? 음... 그럼...
철구는 간단하게 병원 이름과 그 병원에서 나간 앰뷸런스를 조사할 수 있냐고 물었고, 번개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 똘똘한 똘마니 하나를 불러 세워서 병원 쪽으로 보냈다. 번개가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행동 대장으로 있는 녀석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번개에게 얘기를 했다.
- 번개 형님, 저 새끼 누군데, 저희 큰 형님을 애 다루듯이 합니까?
번개를 그 말에 눈이 휘둥그레지며 말했다.
- 뒈지기 싫으면 입 조심해라. 저기 계신 분은 나난 호봉이 형님보다 두 단계, 아니 한 열 단계는 윗분이시니까. 너나 나 같은 놈은 저 형님 주먹 한 방에 쓰러질 거니까. 아니 너처럼 멋모르는 놈은 덤비겠지만, 나는 저 형님이 주먹만 쥐어도 질질 쌀테니까.
번개의 말에 행동 대장이 여전히 인상을 쓰며 말했다.
- 그런 인간이 어디 있습니까?
번개가 그 말에 행동 대장 앞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 있어. 저기. 혹시 너 들었냐? 미드나잇이라고.
번개의 한 마디에 행동 대장은 놀란 눈이 되었다.
- 미.. 미드나잇이요?
- 쉿... 너만 알아라. 절대 비밀이다. 만약 새어 나가면 너나 나나 그리고 호봉이 형님까지 그날로 송장 치룰 테니까.
번개의 말에 행동 대장은 고개를 끄떡였다. 번개는 그 모습에 피식 웃고는 룸 안으로 들어갔다. 행동 대장은 번개가 들어가는 문틈으로 앉아 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무언가 알 수 없는 위압감이 자신에게까지 미치는 것이 느껴졌다. 번개가 안으로 들어오자 호봉이 얘기를 했다.
- 형님, 아까도 말씀드렸는데, 그 집에 들어가십시오. 제가..
철구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가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호봉이에게 말했다.
- 그 집 팔면 내 빚 갚고 얼마나 남지?
철구의 말에 호봉은 의아한 듯이 말했다.
- 집을 판다구요?
철구는 호봉의 반문에 고개를 끄떡였다.
- 아니 그 집 팔고 다른 집을 살 수 있나? 세 명이 살 수 있는?
철구의 말에 호봉은 무조건 고개를 끄떡였다.
- 세 명이 아니라 열 명이 살 수 있는 집도 구할 수 있죠.
철구는 호봉의 말에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말고, 아무튼 세 사람이 살 수 있는 집으로 구해줘. 돈 모자르면 말하고.
호봉은 그 말에 마찬가지로 인상을 쓰며 말했다.
- 거 형님, 그만 좀 딱딱하게 구십시오. 이제 형사도 아니면서.
그 말에 철구는 호봉을 쳐다보았다. 호봉은 취기가 조금 올랐는지 철구에게 말을 했다.
- 저한테 유일하게 형님 같은 형님이었습니다. 형님이 죽었다고 얘기 들었을 때 살면서 처음으로 누군가를 위해 울기도 했습니다. 제발 좀 제 말도 들으세요.
호봉은 그렇게 말을 하고 푹 쓰러졌다. 철구는 그런 호봉을 쳐다보다가 번개를 보며 말했다.
- 이 새끼 취했군.
번개는 철구를 보며 말했다.
- 형님,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저희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도울 테니까요.
철구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 안 돼.
그러자 번개는 서운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 저희가 이쪽에 있지만 그래도 나름 양심적으로 살고 있습니다. 저희가 조폭이어서 그러신다면...
번개의 말에 철구는 눈은 감았다 뜨며 말했다.
- 그것보다 위험한 일이어서 그래 임마.
번개는 그 말에 코웃음을 쳤다.
- 저희는 늘 위험하게 살고 있어요.
그 말에 철구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 죽음보다 무서운 거야.
철구의 말에 번개는 철구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몹시 위험하게 들렸다.
- 형님도 그럼 그 일에서 손을 떼시는 게...
철구는 자리를 털며 일어나며 말했다.
- 그게 내 일이야. 그리고 호봉이 일어나면 아까 부탁한 일 알려줘.
철구가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나서 전화 번호를 적어 번개에게 넘겨주었다. 그러자 번개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 제가 모셔다 드릴게요.
철구는 그런 번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 음주 운전은 안 돼 임마. 나 간다.
철구는 그렇게 얘기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번개는 그렇게 가는 철구의 뒷모습을 보며 몸서리를 쳤다. 행동 하나, 말 하나가 모두 마치 죽음의 사자와 같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목숨을 내걸고 일을 한다고 얘기를 했지만, 철구는 마치 죽음과 한 몸인 듯 죽음 그 자체를 두려워한다거나 죽음이 자신의 삶과 다른 것이라고 여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철구가 밖으로 나가자 번개는 혼자 중얼거렸다.
- 죽지만 마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