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3장 - 8. 그들의 의도(3)
- 야, 중국에 한 달을 넘게 놀러갔다 온 놈이 빈손으로 오냐? 너무하구만.
그런 한수를 보며 철구가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짓는 순간 사무실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 택배 왔습니다.
한수는 택배 회사 직원을 보며 말했다.
- 택배? 우린 그런 거 시킨 적 없는데.
그러자 택배 회사 직원이 송장을 보며 말했다.
- 강철구 씨 앞으로 왔는데요?
철구는 택배 직원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 저한테요? 그럴 리가...
그러다가 송장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원강현'
자기가 아무 것도 안 받아갈까봐 택배로 보낸 것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 형님 선물이유.
택배를 받고 한수에게 넘겨주자 한수가 신나서 상자를 뜯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 야... 이.. 이건 너무...
철구는 한수가 뜯은 상자를 한 번 흘끗 보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귀해 보이는 산삼이 보였다. 한수는 갑자기 철구를 격하게 끌어안으며 말했다.
- 이 형님 몸이 안 좋아진 걸 알고 산삼을 가져오다니...
철구는 그 말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 먹고 건강해지쇼.
철구의 말에 한수는 들떠서 혼자 중얼거렸다.
- 이걸 어떻게 먹어야지? 고아서 먹을까, 아니면...
혼자 중얼거리다가 무릎을 탁 쳤다.
- 나 잠깐 나갔다 올게.
그러더니 산삼을 들고 어디론가 부리나케 나갔다. 그런 한수를 보고는 철구는 고개를 저었다.
- 저렇게 좋을까.
철구는 소파에 앉아 있다가 세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가 간 후에 세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가 왠지 반가웠다. 그런데 그 때 세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중국에서 뭘 그런 선물을 보냈어요?
철구는 그게 무슨 말인가 싶어 물었다.
- 선물?
철구의 말에 세현이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 방금 택배로 산삼이 왔는데요?
철구는 그 말에 어이없이 웃었다.
- 내가 보낸 거 아냐. 원 회장님이 보낸 거야.
철구의 말에 세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 그럼 그렇겠죠. 철구 씨가 선물이라니...
- 아무튼 일은 다 해결 됐어?
철구의 말에 세현이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 일이 너무 많아서 뭐부터 시작할지 모르겠어요. 아무튼 밤에 사무실로 오세요. 장 신부님도 어제 귀국하셨다고 들었어요.
- 알았어.
철구는 전화를 끊고 소파에 등을 기댔다. 그 때 한수가 들어오며 말했다.
- 야! 냉장고 비워놔. 이따가 약 들어올 테니까.
그러다가 갑자기 한수가 무언가를 잊은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혼자 중얼거렸다.
- 근데 이 자식 좀 떼고 달이는 거 아냐? 아, 이거 불안하네.
한수는 그렇게 얘기하더니 철구에게 말했다.
- 나 약방에서 있다가 바로 집으로 갈 거니까 이따 문 잠그고 가! 소주는 내일 한 잔 하자구.
그러더니 철구의 대답을 듣지도 않은 채 또 혼자 중얼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 아무래도 이 자식 비싼 거니까 떼고 달일 거야.
철구는 그런 한수를 보며 어처구니없어 할 말이 없었다. 한수가 밖으로 나가자 철구는 석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참 전화가 울리고 나서 석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 괜찮으세요?
철구는 내심 석호의 상황이 걱정되었다. 그러나 석호는 매우 유쾌한 말투로 대답을 했다.
- 네. 괜찮습니다. 돌아오셨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그 대화 이후로 두 사람은 묘한 침묵에 휩싸였다. 마치 서로에 대해 이해를 한다는 듯한, 대화가 없어도 대화를 하고 있는 듯한 침묵이었다. 이 침묵을 먼저 깬 사람은 철구였다.
- 이따 뵙죠. 드릴 말씀이 많습니다.
철구의 말에 석호는 짧게 대답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간 건 바로 얼마 후였다. 세현은 저녁때에 철구와 석호를 만난다는 것에 묘하게 들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자기도 모르게 그들에게 많은 것을 의지하고 있었고, 또 그들로 인해 살아간다는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그 전까지는 하루하루를 어떻게 하면 병이 나을까를 걱정하고 살았다면 지금은 오히려 내가 왜 그렇게 살았는가를 알아가는, 목적이 있는 삶이 되었다. 그 두 사람과 만나기 위해 이런 저런 것을 준비하던 세현은 뜻밖에 전화에 놀라 소리를 쳤다.
- 뭐라고요?
세현은 석호의 전화를 받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세현은 소라의 상황을 알고 있었기에 안절부절 못할 수밖에 없었다.
- 그 놈들 짓인가요?
세현의 말에 석호가 몹시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 우리의 예감이 맞았습니다. 소라 양이 있는 병원에 가 보니 그 원호라는 사람이 데려갔다고 하더라구요.
세현은 그 말에 정신이 멍해졌다. 혹시 하는 마음이었는데 이렇게 일이 벌어지고 나니 좀 더 세심하게 신경을 쓰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되었다.
- 어디로 갔을까요?
세현은 자신의 질문이 공허한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불안함을 없애기 위해 질문을 던졌다. 석호는 세현의 질문에 잠시 침묵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 분명한 것은 그들의 짓이라는 겁니다. 현재 우리가 파악하고 곳 중 하나라고 생각돼요. 소라 양의 상황을 원호라는 의사도 알고 있을 테니까요. 아마 먼 곳으로 이동하진 않았을 겁니다.
석호의 말에 세현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나 곧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 그럼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뭐죠?
세현의 말에 석호가 말을 했다.
- 세현 씨는 소라 양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세요. 소라 양의 병세에 대해 가장 잘 아시는 분이니까요. 저는 철구 씨에게 연락을 해서 의심나는 곳을 찾아보겠습니다.
석호의 말에 세현은 자신이 도울 수 있는 일이 이것뿐이라는 사실에 자괴감이 들었다.
- 소라 양을 데리고 가는 게 빠를 수도 있고 아니면 못 찾을 수도 있을 겁니다. 어쩌면 병세가 더 악화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세현 씨가 준비해 주셔야 할 게 많을 것 같습니다.
석호의 말에 세현은 마음을 다잡고 말을 했다.
- 네... 신부님... 반드시 소라 양을 구출해 주세요.
세현의 말에 석호가 힘을 주어 말했다.
- 네.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예정입니다.
석호는 세현과 전화를 끊고 철구의 사무실로 찾아갔다. 철구는 중국에서 돌아온 이후 약물 중독 증세로 몸이 그리 좋진 않았지만 눈빛만큼은 예전보다 훨씬 강렬해졌다. 석호가 보기에도 철구가 뭔가 큰일을 겪어 더 단단해진 느낌이었다. 아니 그보다 자신이 쉽게 접근하기 힘든 아우라 같은 것이 느껴졌다. 석호가 사무실에 찾아오자 철구는 크게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 아까 전화로 말씀하신 거 정보원들한테 알아보라고 해놨습니다.
철구가 본 석호는 마치 잔잔한 호수 같았다. 전보다 더 깊어진 눈과 어찌 보면 슬퍼 보이기도 하고, 어찌 보면 무표정해 보이기도 한 얼굴이 그간의 수심(愁心)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였다.
- 한국에 오셔서 좀 쉬셔야 하는데, 또 일이 터졌군요.
석호가 들어와 얘기를 하자 철구는 잠시 동안 침묵을 하다 입을 열었다.
- 최베드로 신부님께선...
철구는 그 말이 얼마나 아픈 말인 줄 알고 있기에 잠시 말을 끊었다. 그러나 석호는 오히려 담담한 표정으로 얘기를 했다.
- 홀가분해지신 것뿐입니다. 성인의 길을 포기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성인의 길에 가까워지신 것일지도 모릅니다.
석호의 말에 철구는 고개를 끄떡였다.
- 뵙지는 못했지만, 알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철구는 최베드로 신부가 자신에게 있어서 박 형사와 같은 사람임을 막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철구는 문득 박 형사와 임 박사가 그리웠다.
- 임 박사님께서는 잘 계시죠?
철구의 말에 석호는 고개를 끄떡였다.
- 지난번에 중국에서 가져온 샘플들하고 마르티노 시신을 부검하고 계실 겁니다. 지난번에 찾아 뵀을 때 무언가를 알아내려고 하신다는 말씀을 듣기는 했습니다만 워낙 바쁘셔서 길게는 얘기를 나누지 못했습니다.
석호의 말에 철구는 임 박사가 몹시 그리웠다. 철구의 표정이 아련해지자 석호 역시 마음이 몹시 애틋해졌다. 하지만 아직은 임 박사를 그리워할 때가 아니라는 듯이 철구는 고개를 한 번 젓더니 석호에게 얘기를 했다.
- 무병에 걸린 여자하고 희귀병에 걸린 딸. 그런데 그 딸이 지금 납치되었다는 거죠? 왜일까요?
철구의 물음에 석호는 고개를 저었다.
- 전혀 감이 잡히지가 않아요. 더욱이 납치한 인물이 딸의 엄마를 치료하던 담당의였거든요. 도대체 왜 그가 딸을 납치해 간 걸까요?
철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글쎄요. 아무튼 정보원들이 차와 관련된 동선(動線)을 따라 움직이고 있으니까 조만간 연락이 오겠죠.
그런데 그 순간 철구의 전화가 울렸다. 철구는 전화기를 보고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고는 전화를 받았다.
- 왜 안 오고 전화야?
그런데 그 순간 철구의 표정이 굳었다. 전화기 너머에는 험악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석호 역시 그 소리에 철구를 쳐다보았다.
- 알았으니까. 어딘지 얘기해. 내가 돈 가져간다고 하고.
철구는 한동안 침묵하더니 고개를 끄떡이며 전화를 끊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 정보원에게 연락이 오면 바로 연락을 드릴 테니까 그 때까지 사무실에 계세요. 갑자기 한수 형에게 급한 일이 생겨서요.
철구의 말에 석호는 왠지 가슴이 불안했다.
- 한수 씨가요?
철구는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 뭘 하느라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사채를 썼나 봐요. 그 녀석들한테 잡혀 있는데, 저보고 돈 가지고 오라네요.
철구의 말에 석호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 건강도 좋지 않으신데 괜찮으시겠어요?
석호의 말에 철구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 그래봤자 조폭 나부랭이들이겠지요. 금방 해결하고 오겠습니다.
철구는 낡은 점퍼를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석호는 그런 철구를 보며 낮게 한숨을 쉬었다.
- 바람 잘 날이 없구나.. 휴...
밖으로 나온 철구는 한수가 떨면서 얘기하던 쪽으로 차를 몰았다.
- 어떤 새끼들이 아직도 그 버릇 못 고치고.
철구는 구석에 버려진 것처럼 놓여 있던 장갑을 손에 꼈다. 그리고 건물 앞에서 내려 한수가 말한 건물 지하로 내려갔다. 내려가는 도중 건장한 남자 하나가 철구를 막았지만, 철구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그의 목울대를 향해 손날을 꽂아 넣었다. 그러자 건장한 남자는 '컥' 소리만 남기고 그 자리에 쓰러져 몸을 부르르 떨었다. 철구는 구석에 있는 허름한 방에서 욕하는 소리와 함께 한수의 처절한 목소리가 들리자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 이 형은 어떻게 사는 거야?
철구가 구석에 있는 방문을 발로 걷어차자 모두 방문 쪽을 쳐다보았다.
- 넌 뭐하는 새끼야?
철구는 그 말을 하는 녀석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주변을 보자 아는 녀석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 물갈이가 심하군.
철구의 중얼거리자 한수가 철구를 보며 말했다.
- 처... 철구야!
그러자 먼저 외쳤던 녀석이 철구를 향해 소리쳤다.
- 돈 가지고 왔지? 안 가져왔으면 어쩔 수 없이 돈만큼 이 새끼 장기를 빼야하거든.
철구는 그 말에 소리쳐 말했다.
- 총 얼만데?
철구가 묻자 조폭 녀석 하나가 철구와 한수를 쓰윽 쳐다보면서 말했다.
- 저 문 값까지 해서 1억.
조폭이 그렇게 말하자 한수가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 내.. 내가 빌린 건 처.. 천 만원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