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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계(逐界)-쫓겨난 이들의 세계-145화 (145/309)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3장 - 8. 그들의 의도(2)

다나카의 말에 원호는 자신이 생각하는 계획을 얘기했다.

- 무당을 통해서 새로운 샘플이 나오면 미리 그런 의식을 해 보면 어떨까요?

원호의 말에 다나카는 피식 웃었다.

- 자네가 그렇게 한국의 무속 신앙에 빠져 있는 줄은 몰랐는데? 과학적인 접근으로는 더 이상 힘든가?

다나카의 말에 원호는 크게 고개를 저었다.

- 지금 당장 다른 샘플을 구하기가 힘이 듭니다. 연구는 한동안...

원호의 말에 다나카는 무슨 말이냐는 듯이 원호를 보며 말했다.

-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일을 해야지. 그런 상태인 누군가를 먼저 찾아서 연구를 계속 진행해 보게.

원호는 그 말에 다나카를 쳐다보며 말했다.

- 그런 상태인...

그러다가 문득 접신을 했던 석호가 떠올랐다. 잘은 모르지만, 세현과 장군 보살의 말로 미루어 그 신부의 어머니가 신 내림을 한 무당이었다는 걸 떠올렸다. 그러나 신부를 잡아다 실험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순간 원호의 머리에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 대개 강신무의 경우에는 자식한테 그 능력이 유전처럼 이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CH21의 경우에도 어쩌면...

원호의 말에 다나카는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 딸에게 이어진다... 그거 재미있군.

다나카의 표정이 조금은 기괴하게 변하더니 원호를 보며 말했다.

- 딸이 있으면 연구를 계속할 수 있겠나?

원호는 무겁게 고개를 끄떡이다가 말을 꺼냈다.

- 그런데 그 딸에 조금 문제가 있습니다만...

원호의 이어진 말에 다나카는 조금 짜증 섞인 말투로 얘기를 했다.

- 문제투성이군. 그 딸은 뭐가 문제지?

원호는 다나카의 말에 조금 당황하며 말을 했다.

- 그게... 그 딸이 유전병을 앓고 있습니다. 뭐 우리 연구엔 크게 영향은 없지만 새로운 환경이 필요해서...

다나카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 유전병이 결과에 지장을 주진 않겠나?

원호는 표정을 풀며 말했다.

- 신체적인 부분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다만 신체적인 부분 때문에 심리적인 부분이 영향을 받을 수 있지만 그 영향을 최소화하도록 하면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다나카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면서 말했다.

- 그래서 결과는 언제쯤 나올 것 같나? 우린 그다지 느긋한 편이 아니어서.

원호는 다나카의 말에서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자신이 말하는 우리에는 자신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다나카가 말하는 우리 안에는 자신이 배제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들의 연구에 적극 동참하고는 있지만 이런 이질감이 원호로 하여금 다른 생각을 품게 만들었다.

- 결과가 언제쯤 나올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원호의 달라진 태도에 다나카가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 자네가 뭔가 착각을 하는 것 같아. 결과가 언제 나올지 모른다는 애매한 태도는 조금 화가 나게 하는군.

원호는 다나카의 말에 인상을 굳혔다.

- 어떤 연구든 결과를 알아내는 데에 걸리는 시간을 가늠할 수 없습니다.

다나카는 크게 웃으며 말했다.

- 하하하. 그런가?

그러나 곧 웃음기를 없애고는 원호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 육 개월을 주지. 그 이후에도 상황에 진전이 없으면... 그 뒤는 알아서 생각하게.

원호는 다나카의 말에 몸이 떨렸다. 자신은 굳건하게 그들의 동료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결국 자신은 그들의 도구였던 것이었다. 자신이 아니어도 이용할 수 있는 대체물이 있는 도구. 원호는 왜 자신이 그들에게 협력을 했는지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그 뒤라는 것. 그건 죽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니 자신만의 죽음이라면 그나마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이 연구와는 전혀 관계없는 가족들의 목숨까지 들먹이는 것이 원호는 치가 떨렸다.

- 육 개월... 알겠습니다.

원호의 말에 다나카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 쓸데없는 생각은 안 하는 개 좋아. 자네와 관련된 모든 건 우리가 체크하니까.

원호는 주먹을 쥐었다. 다나카는 그런 원호를 흘끗 보고는 말을 이었다.

- 딸은 곧 잡아다 주지.

다나카는 원호가 휙 돌아서 밖으로 나가자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조센징들은 좋은 말로는 안 돼. 조만간 저 녀석도 폐기해야겠군.

그러더니 전화를 들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 접니다. 이번 건은 아무래도 실패 같습니다.

상대방의 목소리가 전화기를 타고 넘어오자 다나카는 당혹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곧 냉정을 찾고는 대답을 했다.

- 다름 샘플을 찾아 연구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착오 없이 확실히 하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다나카는 자신도 모르는 공포와 두려움에 몸이 떨렸다. 분명 목소리나 말투에서 아니면 대화 내용에서 그다지 무서운 것은 없었는데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 그런 기분에 빠지는 것이 이상했다.

- 기분 탓이겠지.

다나카는 애써 불안한 생각을 지우며 다시 전화기를 들어 명령을 내렸다.

- CH21의 딸을 잡아와.

다나카의 사무실에서 나온 원호는 그들이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일임을 뼈저리게 느꼈다. 밖으로 나온 원호는 마음이 급했다. 하지만 그들이 언제나 자신과 주변을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저절로 행동을 조심하게 되었다.

- 차근차근 생각해야 돼.

원호는 다나카가 말한 육 개월을 최대한 이용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실패가 예정된 실험이라면 최대한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상황이나 여건을 만들겠다고 다짐을 했다. 그러다가 뭔가 생각이 든 원호는 차에 시동을 걸고 어디론가 향해갔다.

한편 다나카와 전화를 끊은 앤더슨은 다나카에게 맡긴 일이 어그러지자 몹시 짜증이 났다. 특히 자신이 연구를 하고 있는 연구도 예외가 생겼다는 것에 대해 언짢았다.

- 신부가 멀쩡하다... 여자 아이도... 뭐가 문제지?

앤더슨은 중국에서 불타버린 공장과 실패한 실험체를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 음... 다시 시작해야겠군.

앤더슨은 톰슨에게 전화를 걸어 이 실험의 전면적인 재수정을 지시했다.

- 이것만 제대로 성공하면 조직을 장악하는 건 순식간인데...

앤더슨은 뭔가 몹시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다시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 조금만 있으면 내 손아귀에 다 들어올 테니...

앤더슨은 자신의 중얼거림이 마음에 들었는지 껄껄거리며 웃었다.

대평원. 하늘과 땅이 서로 맞닿은 그곳으로 알 수 없는 무언가가 흘러가듯 가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끝난 곳을 모르는 광활한 곳이 있었단 말인가?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모를 그 너른 공간 안을 채우고 있는 것은 알 수 없는 풀들과 흙, 바람, 그리고 스러져가는 태양빛이 전부였다. 그 안에 홀로 방향조차 가늠할 수 없는 왜바람을 맞으며 서 있지만 그조차도 원래 그 평원의 일부인 듯 움직이지 않는다. 발목 높이의 풀들은 바람을 따라 이리 흔들 저리 흔들거리고, 시야를 가리지 않는 끝은 태양의 마지막 불꽃을 받아 황금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구름조차 없는 하늘은 온통 주황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시간마저 대지와 허공 속으로 스며드는 것처럼 무감각했다. 그저 공간만이 지배하는 공허한 표면 위로 생을 가늠할 수 있는 것이라곤 바람뿐. 바람은 풀을 짓밟고 대지를 짓밟고 타고 있는 태양마저 흩으러 버릴 듯이 낮고 음산한 울음을 울며 불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멈춰 서 있던 그가 미묘하게 고개를 든다.

- 혜... 혜민아...

철구는 무언가가 가슴을 누르는 것 같아 고통에 벌떡 일어났다. 이질적인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의 팔뚝에 꽂혀 있는 링거 바늘이 팔을 따끔거리게 했다. 그리고 가습기에서 나오는 수증기가 왠지 낯설게 느껴졌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 위에서 파동을 그리고 있는 심전도 기계가 보였다. 철구는 두통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 때 병실 문이 열리면서 의사가 하나 들어왔다. 그는 어눌한 한국어로 철구에게 말했다.

- 괜찮으십네까?

철구는 의사를 보며 의아한 듯이 물었다.

- 여기가 어디죠?

철구의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그는 누군가에게 무전을 보냈다.

- 여긴 상해 병원입네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의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원 회장이 안으로 들어왔다.

- 철구 씨, 괜찮으십니까?

원 회장의 말에 철구는 미간을 조금 찌푸리며 말했다.

- 네. 그런데 전혀 기억이 없네요.

원 회장은 이해한다는 듯이 말했다.

- 그럴 겁니다. 여기 병원으로 오신 건 기억이 나십니까?

철구가 곰곰이 생각을 하자 원 회장과 얘기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 아.. 그렇군요. 네.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제가...

원 회장은 철구가 그날 새벽에 발작을 일으켰고, 지금까지 일주일 동안 의식을 잃었다고 얘기해주었다.

- 일주일이나요?

- 네. 아무래도 약물 중독이 심했던 것 같습니다.

철구는 원 회장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 약물 중독이라뇨?

원 회장은 철구에게 지난 상황을 말해 주었고, 철구는 그 말에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다가 문득 석호가 중국에 와서 최베드로 신부를 찾는 일이 떠올라 원 회장에게 물었다. 그러나 원 회장은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 아직 자세한 얘기는 모릅니다. 최베드로 신부님과 장석호 신부님 모두 바티칸으로 가셨습니다. 그 이후엔 전혀 연락이 없었습니다.

- 그렇군요.

철구는 뭔가 찜찜한 듯이 얘기를 이었다.

- 다 해결된 건가요? 어쩐지 찜찜하네요.

철구의 말에 원 회장 역시 고개를 끄떡였다.

- 해결인지, 아니면 그냥 덮인 건지 모르겠지만요.

철구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 그럼 저도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네요.

철구의 말에 원 회장이 손사래를 쳤다.

- 마저 치료를 마치고 좀 쉬셔야 합니다.

하지만 철구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 쉬는 건 제 아내와 아이를 찾고 난 다음에 해도 충분합니다. 지금은 마음이 급해서요.

철구의 말에 원 회장은 고개를 끄떡였다.

- 그러시겠군요. 약물 중독에 대한 치료는 어느 정도 마무리 되었다고 하니까 몸을 좀 추스르고 떠나시면 될 겁니다.

철구는 원 회장의 말에 고개를 끄떡였다. 원 회장은 철구를 안쓰러운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병실 밖으로 나갔다. 며칠 후 철구는 자신의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원 회장에게 인사를 하러 원보 호텔로 갔다. 원 회장은 미리 연락을 받았는지 철구를 마중하러 나왔다. 철구는 간편한 차림으로 밀항선을 탈 준비를 하고 나왔는데, 의외로 원 회장은 철구를 데리고 자신의 전용기 있는 곳으로 갔다.

- 편하게 가셔도 됩니다.

철구는 원 회장을 보며 약간 미간을 찌푸렸다.

- 저는 밀항선이 오히려 편합니다.

하지만 원 회장은 완강하게 얘기를 했다.

- 저의 작은 성의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모든 수속이나 절차는 제가 다 처리해 놓았습니다.

철구는 그 말에 고개를 끄떡이고 말했다.

-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철구는 원 회장과 손을 잡으며 인사를 했다.

- 그럼 가보겠습니다. 몸 건강 하십시오.

원 회장은 철구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 무슨 일 있으면 주저 말고 연락 주십시오.

철구는 그 말에 고개를 끄떡이고 비행기 쪽으로 몸을 돌렸다. 원 회장은 철구가 비행기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뒷모습을 보며 서 있었다. 원 회장은 비서를 보며 말했다.

- 비행기에 잘 챙겨놨지?

- 네. 잘 챙겨놨습니다.

- 도착하면 아마 안 가져간다고 할 테니까 반드시 택배로 보내게.

- 네. 알겠습니다.

원 회장은 비행기가 이륙하자 그답지 않게 비행기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철구는 창밖으로 원 회장을 보다가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고는 뚱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 닭살스럽게...

하지만 한편으로는 오랜만에 아버지와 같은, 박 형사와 같은 느낌을 받은 것이 싫지는 않았는지 철구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떠올랐다.

한국에 들어온 철구가 사무실로 찾아가자 한수는 빈손인 철구를 보고 면박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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