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3장 - 8. 그들의 의도(1)
8. 그들의 의도
- 실험체가 죽었다고?
다나카의 말에 원호는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이었다.
- CH21은 부작용이 너무 심했습니다. 의학적으로는 도저히 손쓸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원호의 말에 다나카는 고개를 끄떡였지만 뭔가 불만이 섞인 표정이었다.
- 그래도 가장 근접한 표본이었어. CH21조차 실패했으니...
다나카의 말에 원호는 몸을 조금 움찔했다. 하지만 이내 긴장을 플고 본인이 하고자 하는 말을 했다.
- 잠재의식이 발현되더라도 CH21처럼 된다면 이용이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원호의 말에 다나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신의 계획이 어긋나는 것에 조금 짜증이 났지만 그렇다고 이 일이 단시일 내에 이루어지리라는 생각을 하진 않았다.
- 자네 생각은 어떤가? 이 실험이 성공할 것 같은가?
원호는 다나카의 말에 고민을 했다. 처음 이 실험을 제안 받았을 때의 떨림과는 다른 떨림이 몸 안에서 전해져왔다. 이 실험을 제안 받았을 때에는 반신반의하던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러한 실험 샘플을 구하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구한다 할지라도 이 실험에 참여해 주느냐도 관건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나카는 그런 원호의 걱정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자신의 계획을 얘기해줬고 원호는 그 말에 충격을 받았지만 학자적 양심보다는 그러한 연구를 주도할 수 있다는 욕심 때문에 실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물론 가끔은 이 일에 회의도 들곤 했지만 어느 정도의 성과가 눈앞에 보이자 그런 회의 따위는 양심의 강을 건너가 버렸다. 하지만 이번 실험체인 CH21, 최지수를 통해 자신의 의도와 믿음이 헛된 것은 아닌가 하는 회의감을 들게 했다. 하지만 원호는 그런 마음을 애써 부정하며 대답했다.
- 가능성은 있습니다만, 과연 부작용 없이 그러한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을는지는 좀 더 연구를 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원호의 말에 다나카는 고개를 끄떡였다.
- 하긴 그럴 거야. 단순한 생체적 반응이나 발현이 아니니까.
다나카는 그렇게 얘기를 하면서 마음속으로는 뭔가 풀리지 않는 고민을 했다. 다나카는 그 고민의 실체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기에 답답했지만, 이번 실험을 성공하면 왠지 그 고민도 어느 정도 풀리리라는 믿음 때문에 이번 실험은 더욱 중요하게 여겼다. 그러나 가장 결과에 근접했던 CH21의 죽음이 다나카는 몹시 안타까웠다. 하지만 다나카 스스로에게 나름의 확신을 준 것은 실험체가 자살이라는 선택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다나카가 생각하기엔 그것만으로도 이미 엄청난 결과물이었기에 그것으로 만족했다. 시간만 있다면 그럼 실험체야 또 만들 수도 있고, 어쩌면 CH21보다 부작용이 훨씬 덜한 실험체가 나올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 결국은 잠재의식이 초능력적인 것과 연결되는 건데...
원호는 다나카의 말이 의미하는 바를 잘 알고 있었다. 원호가 다나카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처음 들었을 땐 무척 황당한 얘기였지만 원호는 그의 말과 그가 보여준 실험실을 통해 원호는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믿음이 생겼었다.
- 육체적 진화가 아무리 가속되더라도 정신을 지배하지 못하면 그건 힘센 노예만을 만드는 것이지요.
다나카가 원호에게 톰슨 병원의 실험실을 보여주며 한 말이었다. 원호는 처음 보는 톰슨 병원 실험실에 충격을 받았지만, 이내 그 실험실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 이 배양액은...
원호가 대형 실린더 앞에 서서 실험체를 올려다보며 다나카에게 말을 하자 다나카는 웃으며 말을 했다.
- 인간이 원래 자궁 안에서는 아가미를 갖고 태어나지요. 그래서 그걸 퇴화시키지 않고 발현시키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이지요.
원호는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그 아는 사실을 실제로 실험을 통해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더욱이 진짜 인간을 대상으로 그럼 실험을 하고 있다는 게 더 놀라운 일이었다.
- 이.. 이건 윤리적으로...
원호는 다나카에게 최소한 학자의 양심을 토로하듯 말했지만 다나카는 웃으며 말했다.
-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실험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솔직히 저들도 인간의 형상을 갖고 있으니 인간이지요. 하지만 저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외형이 인간이기 때문에 실험을 할 수 없다는 것은 편견이지요. 배양된 돼지의 간으로 실험을 하나 배양된 인간의 간으로 실험으로 하나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실험을 위해 배양하는 것이지 같이 삶을 살아가기 위해 탄생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윤리적이라는 말은 결국 인간의 이기심이 인간을 위해 만든 말일 뿐이지요.
다나카의 말에 원호는 반박을 하고 싶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다나카와 윤리 논쟁을 한다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원호는 입을 다물었다. 만약 그렇게 윤리적인 태도였다면 처음에 다나카가 제안을 해왔을 때 거절해야 했을 것이다. 그의 말에 흥미를 느끼고 그와 이미 상당한 협력 관계를 맺고 있는 상황에서 발을 뺀다는 것은 이미 불가능한 일이었다. 원호의 놀란 표정을 뒤로 하고 다나카는 앞에 있는 실린더 앞에 섰다. 원호는 다나카의 뒤를 따라 그 실림더 앞에 멈춰 서서 실린더를 살펴보았다. 앞에 있는 실린더들과는 달리 평범한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앞의 것들은 모두 외형적으로 특이한 것들이었다. 팔이 네 개인 것도 있었고, 민머리인데 뒤통수에 눈이 달린 것도 있었다. 어떤 것은 팔 아래 갈퀴처럼 살이 늘어진 것이 보였고, 어떤 것은 피부가 투명하여 내장이 비치는 것도 있었다. 그러나 다나카가 보여준 샘플은 평범한, 아니 평범하지 않은 외모를 가진 여자였다. 원호가 한눈에 보기에도 대단한 미인이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그런 마음이 드는 게 민망할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 몹시 매력적인 여인이죠?
다나카의 말에 원호는 화들짝 놀랐다.
- 그.. 그렇군요. 그런데 이 실험체는 앞의 것들과 다르군요.
원호의 말에 다나카가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 그렇습니다. 앞의 것들은 모두 외형적인 부분을 강화한 것들이지만 이 샘플은 다른 부분을 강화하고 있는 것이지요. 어쩌면 여기 있는 샘플들 중 가장 두려운 존재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원호는 그 말에 의아함이 들었다. 단순히 여성으로서의 매력만으로 가장 무서운 존재가 된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원호의 의문을 알고 있는지 다나카가 다시 원호에게 질문을 했다.
- 이 샘플이 왜 매력적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원호는 다나카의 말에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얼굴이나 몸매가 보통의 여성보다 뛰어나긴 했지만 그래도 넋을 놓을 만큼 대단하진 않았다. 더욱이 눈을 감고, 입도 다문 채 무표정하게 있는 그 얼굴은 생동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호는 그 샘플에게서 매력을 느꼈다. 아니 단순히 매력이 느껴지는 수준이 아니라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을 정도였다.
- 글쎄요. 제 취향의 여성은 아닌데... 묘하게 매력적이네요.
원호의 말에 다나카가 웃으며 말했다.
- 하하하. 아마 모든 남자들이 같은 느낌일 겁니다.
원호는 다나카의 말에 고개를 끄떡였다.
- 음.. 매력은 충분히 위험할 수 있겠네요.
원호의 말에 다나카는 다시 웃었다.
- 하하하. 매력이 위험하다라... 하긴 역사적으로 매력 있는 여인들이 물줄기를 바꾸긴 했지요. 하지만 이 샘플은 단순히 매력을 위해서 만든 게 아닙니다. 이제 이쪽으로 오시지요.
원호가 넋을 잃고 쳐다보다가 다나카의 말에 그의 뒤를 따랐다.
- 저 샘플은 아직 완성이 되지 않은 것입니다. 지금부터 보여드리는 것이 진짜들입니다.
원호가 다른 샘플 앞에 섰을 때 원호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샘플들은 실린더 배양액 안에서 눈을 뜬 채 밖을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원호가 앞으로 가자 실린더 앞에 서 있는 원호를 향해 무언가 얘기하듯이 입을 뻥끗거렸다. 그러자 원호 앞에 선 모니터 앞에 글자들이 떴다.
- 자주색과 빨간색 원 무늬의 팬티와 하얀색 평범한 런닝셔츠.
원호는 그 순간 놀란 표정으로 다나카를 쳐다보았다. 다나카는 뭘 그리 놀라냐는 표정으로 원호를 쳐다보았다.
- 사람의 인지와 사고를 뛰어넘는 것. 그것이 이 연구의 핵심이지요.
원호는 그제야 다나카가 한 이야기의 핵심을 알 수 있었다. 단순히 호기심으로 초능력에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유전적으로 발현되거나 후천적으로 이식할 수 있는 초능력을 연구하는 것. 그리고 그 모든 능력을 한 곳에 모으는 일. 이 모든 것을 실험을 통해 만들고 있는 것이었다. 다나카는 그러면서 옆에 있는 배양액을 보여주었다.
- 이것은 CH31입니다. 앞에 내보낸 실패작들도 있습니다만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야심작이죠.
원호는 다나카의 말에 몸서리를 쳤다. 이미 병원에 있는 최지수가 그들이 만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그 놀람은 더욱 컸다.
- 그래도 그 와중에 CH21이 가장 오래 살아남았고 가장 근접한 샘플이었는데 발작이 심하니 어쩔 수가 없죠.
원호는 다나카의 말에 놀람을 금치 못했다. 그들의 이 연구가 적어도 20년은 지속되어 왔기에 그 축적이 얼마나 되었을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 저 샘플은 그럼 그간 연구한 모든 것이 집약되어 있는 것입니까?
원호의 말에 다나카는 크게 웃었다.
- 그런 위험한 짓은 하지 않습니다. 실패 때문이 아니라 성공 때문이지요. 프랑켄슈타인을 만든 프랑켄슈타인 박사 꼴이 되지 말란 법은 없으니까요.
원호는 그 말에 작은 탄식을 내뱉었다.
- 사실 CH21이 그 당시 모든 역량을 집중했던 샘플입니다. 나름 성공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현실로 내보냈는데...
원호는 CH21이라고 불리는 지수의 능력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에 저절로 고개를 끄떡였다.
- 비록 실패작이지만 그 안에서 무언가를 이끌어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제 제안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시겠지요?
원호는 고개를 끄떡였다.
- CH21에 대한 여러 실험에 대한 결과를 보고하면 되는 것입니까?
원호는 이미 그 일에 매료되어 그보다 더한 일이라도 할 기세였다. 다나카는 만족스러운 듯이 고개를 끄떡였고, 그 이후 원호는 지수에 대한 치료를 빙자한 다양한 실험과 테스트를 했던 것이었다. 원호는 지금 앞에 서 있는 다나카가 처음 자신을 대할 때와 다르게 지금은 마치 부하 다루듯이 하는 것을 생각하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풀며 말했다.
- CH21의 실패는 의외였습니다.
원호의 말에 다나카는 냉정한 표정으로 말했다.
- 정신적으로 폭주할 줄은 알았지만 자살로 죽을 줄은 몰랐지. 아무튼 이번 CH21을 통해서 새로운 걸 알아냈으니 다음 샘플 연구도 자네가 맡아서 해주었으면 하는데...
원호는 그 말에 고개를 끄떡였다. 이제 와서 거부할 이유도 의지도 없었기 때문이다.
- 그나저나 CH21이 자살이라.. 명령 코드에도 없는 행동을 한 것은 폭주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아.
원호는 그 말에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이었다.
- 혹시 신 내림을 받은 것이 문제가 된 걸까요?
원호의 말에 다나카는 무거운 침묵을 했다.
- 신비한 일이긴 하지만, CH21은 원래 그런 능력을 갖고 있었지. 하지만 그 신 내림인가를 통해 폭주하던 게 멈췄다면 분명 그것도 어떤 의미가 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