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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계(逐界)-쫓겨난 이들의 세계-143화 (143/309)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3장 - 7. 벗어날 수 없는 그늘(4)

석호는 원 회장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떡이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 안은 많은 물건들이 쌓여서 들어가기조차 힘들었다. 안쪽으로 한참 들어가자 탁자가 놓여 있었고, 거기에는 자신도 아는 일남이 앉아 있었다. 일남이 석호를 향해 손을 내밀며 말했다.

- 고생 많으셨습니다.

석호는 일남과 악수를 했다.

- 저를 어떻게...

일남은 네이멍구에 석호가 들어오는 순간부터 사람을 시켜 주시하도록 했다는 것이었다. 석호는 최베드로의 무고함을 찾느라 정신이 없어서 자신을 주시하는 눈초리조차 알지 못했었다.

- 혼자 계시는 시간이 없으시더라구요. 원 회장님께서 전하라는 말씀이 있으셔서요.

석호는 일남의 말에 고개를 끄떡였다.

- 시간이 없으니까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얼른 숙소로 돌아가셔야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석호는 시계를 들어 시간을 봤다.

- 한 10분 정도는 괜찮습니다.

일남은 그 말을 듣고 석호에게 서류를 하나 넘겨주면서 얘기를 시작했다. 자신이 최베드로 신부와 함께 있었다는 것부터 최근에 원 회장에게서 받은 여자 아이의 발병 원인과 철구의 약물 중독까지. 석호는 그러한 내막에 깜짝 놀랐지만, 일남은 최대한 신중하게 얘기를 했다.

- 최베드로 신부님은 결코 허투루 그럴 분이 아닙니다.

일남의 확신에 찬 말에 석호는 고개를 끄떡였다.

- 바티칸에 가셔서 최베드로 신부님의 무고함을 밝혀 주십시오.

석호는 일남의 말에 고개를 끄떡이고 서류를 잘 접어 품 안에 갈무리했다.

- 감사합니다. 제가 원 회장님께 인사드리겠습니다.

석호는 그렇게 말을 하고 돌아서 나오다가 일남을 보며 말했다.

- 스승님께서도 일남 씨를 좋아하셨을 겁니다. 분명히.

석호의 말을 듣자 일남은 멋쩍게 뒤통수를 긁었다. 석호는 이 서류가 최베드로의 무죄를 증명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석호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밤을 보냈고, 다음날 바티칸에 도착하자마자 슈테판에게 갔다.

- 최베드로 신부님의 무죄를 증명할 자료를 찾았습니다.

석호의 들뜬 말투와는 달리 슈테판 추기경은 슬픈 눈을 하고 있었다.

- 무... 무슨 일이 있습니까?

슈테판은 창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 최베드로 신부는 파문(破門)당했네.

슈테판의 말에 석호는 멍한 표정이 되었다.

- 여기 그걸 막을 증거가....

슈테판은 크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 그 증거가 아니어도 충분히 파문을 막을 수 있었는데... 정작 본인이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더군.

- 네? 어째서...

- 본인이 간음한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면서...

석호는 그 말에 소리를 쳤다.

- 간음이라뇨. 그냥 살덩어리들입니다. 마음은 결코...

석호의 외침에 슈테판은 고개를 돌려 석호를 쳐다보았다.

- 나도 알고 있네. 충분히... 최베드로의 의지를 막을 수 없었네.

석호는 그 말에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 그럼 지금 어디 계시나요?

석호는 넋이 빠진 표정으로 슈테판에게 물었다. 슈테판은 자신의 품 안에 있는 편지를 한 장 꺼내 석호에게 주었다.

- 떠났네. 자네가 오기 전에.

석호는 슈테판이 건네 준 편지를 받아 펼쳐보았다. 그 안에는 너무나도 익숙한 최베드로의 필체가 보였다. 그러나 그 안에 있는 말은 석호의 가슴을 후벼 파기에 충분했다.

'나를 찾지 말아라.'

석호는 그 편지를 보고 다리에 힘이 풀려 자리에 주저앉았다. 석호의 입장에서는 도대체 왜 최베드로가 파문을 선택하며 여기를 나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더욱이 이렇게 불명예스럽게. 물론 그런 선택을 한 이유를 대충은 짐작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이거 아니라고 생각을 했다.

- 최베드로 신부님을 찾겠습니다.

석호의 말에 슈테판은 고개를 저었다.

- 최베드로의 마지막 부탁이 있었네. 자신이 하던 일을 모두 자네에게 맡기라고.

슈테판의 말에 석호는 대들 듯이 말했다.

- 그럴 수 없습니다.

슈테판은 석호의 말에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 최베드로 신부를 찾는 건 내가 할 테니까 자네는 최베드로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게.

슈테판의 단호한 말에도 석호는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 저에게는 그럴 만한 힘이 없습니다. 최베드로 신부님만이...

하지만 슈테판은 냉정하게 얘기를 했다.

- 자네마저 그렇다면 나 역시 어쩔 수 없이 모든 걸 버리고 고향으로 가야만 하네.

슈테판의 말에 석호는 고개를 들어 슈테판을 쳐다보았다. 슈테판은 석호가 자신을 쳐다보자 결연한 표정으로 석호에게 얘기를 했다.

- 자네에게 특별 요원의 임무를 주겠네. 최베드로 신부가 했던.

석호는 처음 듣는 특별 요원이라는 말이었다. 석호의 어리둥절한 표정에 슈테판이 말을 이었다.

- 특별 요원은 바티칸에서 보증하는 세 가지를 갖고 있지. 본인의 판단 하에 이단 심판, 악령 퇴치, 부도덕한 사제 파문을 할 수 있다네. 그리고 살인에 대한 것도 임무와 관련된 것이라면 바티칸이 책임을 지는 것이지.

- 그건...

석호는 당황하였지만, 슈테판은 강하게 얘기를 했다.

- 최베드로의 역할이었다네. 이제 그 일을 그만 두고 나와 함께 바티칸에 있자고 했는데... 사실 이번 일만 끝나면 최베드로가 자네와 마르티노에게 부여할 역할이었다네.

석호는 슈테판의 말을 듣자 최베드로가 그간 자신에게 이런 저런 일을 맡긴 것이 떠올랐다. 결국 이 일을 맡기기 위한 안배였던 것이었다. 석호는 무릎을 꿇었다.

- 자네가 그런 역할을 한다는 걸 아는 사람은 바티칸에서도 몇 명 안 돼. 한 분은 자네에게 맡기는 걸 거부했지만, 다른 분들과 내가 자네에게 맡기도록 주장했지.

석호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 아직 저는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슈테판은 석호를 외면하며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 이제부터 준비하면 돼. 그만 나가보게.

석호는 무슨 말을 더 하려고 했지만, 슈테판의 뒷모습은 마치 거대한 바위처럼 단단해보였다. 어쩔 수 없이 석호는 인사를 하고 물러나왔다. 슈테판은 석호가 밖으로 나가자 창밖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집무실 앞으로 보이는 바티칸 미술관 위로 날아가는 새들이 보였다. 그 새들을 쳐다보며 슈테판은 조용히 혼자서 중얼거렸다.

- 훨훨 날아가게나. 가서 편하게, 모든 걸 놓고 편하게 지내시게나.

슈테판은 그렇게 한참을 날아가는 새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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