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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계(逐界)-쫓겨난 이들의 세계-139화 (139/309)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3장 - 6. 의식의 분열(5)

놀라는 세현을 보고 지수가 힘없이 얘기를 했다.

- 놀라지 마세요.

지수의 목소리는 아까와 다르게 놀랍도록 침착했고, 차분했다. 세현은 지수 옆에 앉아서 지수를 보았다.

- 몸이 많이 안 좋은 상태세요. 정신적인 치료도 앞으로 계속해야 되지만, 몸도...

세현의 말에 지수는 힘겹게 말을 했다.

- 몸 안에 뜨거운 불이 들어 있는 것 같아요.

세현은 이런 경험이 없었기에 무어라고 얘기해 주기가 힘이 들었다. 그러나 대답을 바란 것이 아니었는지 지수는 다시 입을 열어 얘기를 했다.

- 전 그리 오래 가지 못할 거에요.

지수의 말에 세현이 지수의 손을 부여잡으며 말했다.

- 아니에요. 정신적인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었으니까...

그러나 지수는 세현의 말을 끊고 자신의 말을 꺼냈다.

- 시간이 많지 않아요. 제 정신으로 사는 게 아니라 이 몸의 한계가 있어요.

세현은 지수의 말에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 알았어요. 하지만 오늘은 무리를 했으니 좀 쉬어야 해요.

하지만 지수는 고개를 저었다.

- 아뇨. 저는 알 것 같아요. 제 몸 안에 뜨거운 게 지금 밖으로 나오려고 해요. 그게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그러면 저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다칠 거에요.

세현은 지수의 말에 장군 보살이 말했던 귀문관살(鬼門關殺)을 떠올렸다.

- 무슨...

지수는 한숨을 쉬며 얘기를 했다.

- 지금부터 제가 하는 얘기를 잘 들어주세요. 꼭이요...

지수는 힘겹게 숨을 쉬어가며 자신의 얘기를 풀어냈다. 세현은 그 말을 듣는 동안 점점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분노가 차올랐다. 지수는 순간순간 가슴을 부여잡기도 했고, 얼굴이 붉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놀라운 정신력으로 버티면서 세현에게 끝까지 얘기를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현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 우리 불쌍한 아기... 아기를 잘 돌봐 주세요.

세현은 지수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 그건 걱정 마시고, 일어나셔서 그들과 싸워야지요.

그러나 지수는 고개를 저었다.

- 제게 허락된 시간이 얼마 없어요. 그게 느껴져요. 신부님의 노력이 아니었으면...

세현은 자신의 상황을 직시하고 있는 지수의 눈이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

- 저는 더 이상은 힘들 것 같아요.

지수의 손을 잡은 세현은 지수에게 힘을 주어 말했다.

- 아녜요. 힘을 내야 돼요. 소라 양을 위해서도. 그리고... 그 놈들을 부숴버려야 하잖아요.

지수는 서글픈 눈으로 세현을 보며 말했다.

- 그 전에 제가 모두를, 우리 아가마저도 죽일지도 몰라요. 제 눈엔 그 장면이 보여요.

세현은 그 말에 몸이 굳었다. 지수는 세현을 쳐다보며 말했다.

- 원래 가진 한(恨)이 많은 분께 제 한(恨)까지 더하니 마음이 무겁네요.

세현은 지수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 그런 말 마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한 최대한 도울게요.

지수는 그런 세현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그 말을 하고는 지수는 세현의 손을 놓았다. 세현은 서글픈 눈으로 지수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 순간 지수의 표정이 돌변했다. 세현은 놀란 눈이 되었고, 지수는 그런 세현을 한 번 쳐다보고는 두꺼운 유리창 쪽으로 몸을 던졌다. 세현은 놀라 소리를 쳤다. 정신병원의 창문은 그리 크지 않고,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에 강화 유리로 만들었기에 세현은 지수의 돌발 행동이 무위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오산이었다. 지수의 몸은 강화 유리를 깨고 그 조그만 창밖으로 떨어져 나갔다.

- 안 돼!

세현은 창문 쪽으로 몸을 옮겼다. 세현이 창문을 통해 아래를 내려다보았을 때에는 이미 지수는 10층 아래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세현은 놀라서 복도를 뛰어가며 소리를 쳤다.

- 원호 씨, 원호 씨...

세현의 목소리를 듣고 원호가 뛰어 나왔다.

- 무슨 일이세요?

세현은 다급하게 엘리베이터를 잡으며 말했다.

- 지수 씨가 창밖으로 뛰어내렸어.

세현의 말에 원호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얘기를 했다.

- 거긴 사람 하나 겨우 빠져 나갈 창문 밖에 없어요. 그리고 그나마도 강화유리고..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세현이 원호와 함께 타고 내려가며 말했다.

- 그곳을 통해 뛰어내렸어. 눈 깜짝할 사이에.

원호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병원 아래에 도착하자 병원 입구는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온몸이 처참에게 뭉개진 지수의 시신이 형체를 알 수 없는 형태로 놓여 있었다.

- 이... 이건...

얼마 후 신고를 받은 경찰이 병원을 찾아왔고, 세현은 경찰에게 자신이 겪은 상황을 얘기했다. 경찰도 처음에는 믿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병실에는 어떤 도구도 없었고, 또 원호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나중에 참고인으로 오라는 얘기만 듣고 경찰이 돌아갔다.

- 아... 결국은 이렇게 되었네요.

원호는 원망도 한탄도 아닌 소리를 했다. 세현은 그런 원호를 보며 말했다.

- 휴... 오늘은 나도 뭐가 뭔지 모르겠어... 원호 씨한테 미안하네. 괜히 내가 나서서...

세현의 말에 원호가 고개를 저었다.

- 저도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원장님 말씀대로 제가 생각한 것과 다른 세상이 있더군요.

세현이 뭐라 얘기를 하려는데 복도 끝에서 석호가 깨어나 걸어 나왔다.

- 신부님!

세현이 석호에게 다가가자 석호는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다.

- 괜찮으세요?

세현의 질문에 석호가 또다시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 조금 피곤하네요.

석호는 원호를 보며 말했다.

- 죄송합니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러며 세현을 쳐다보며 말했다.

- 지수 씨는 괜찮은가요?

세현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그 때 원호가 나서서 얘기를 했다.

- 오늘 일은 밖에서 되도록 함구해 주십시오.

원호의 말에 세현과 석호는 모두 고개를 끄떡였다. 세현은 원호에게 인사를 하고 비틀거리는 석호를 부축하고 병원 밖으로 나왔다. 병원 입구 쪽에 노란 폴리스라인이 쳐진 걸 보고는 석호가 세현에게 물었다.

- 무슨 일이 있었나요?

석호의 말에 세현이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 지수 씨가 죽었어요.

세현의 말에 석호는 놀란 표정이 되어 세현을 쳐다보았다.

- 자세한 얘기는 사무실에서 할게요.

세현은 조금 서둘러 석호를 차에 태우고 병원 밖으로 나왔다. 원호는 그렇게 떠나는 세현과 석호를 병원 로비에서 쳐다보았다. 사무실로 가는 차 안에서 세현은 자신이 지수에게 들은 얘기를 했다. 석호는 그 말에 분노에 사로잡혔다.

- 그렇다면 이 모든 게 그 놈들 짓인가요?

- 네. 그런 거 같아요. 그리고...

세현이 다음 말을 이으려 하자 석호가 세현의 말을 가로 막았다.

- 저와 관련된 얘기는 나중에 듣고 싶습니다. 지금은 이 일이 먼저인 것 같아요.

석호의 말에 세현은 입을 닫았다. 석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 제 꼴이 우스웠죠? 결국은 이거였어요.

석호는 뭔가 상념에 젖은 채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가로등 불빛이 일자를 그리며 넓게 펴져가는 걸 보고 석호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자신의 몸에서 이상하게 들끓는 무언가를 억누르기 위해 크게 심호흡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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